예상치 못한 잉태: 축복이기 전에 사건

오드리 드완 감독의 《레벤느망》(2021)

*이 기사는 영화 《레벤느망》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 설명 시작. 영화 《레벤느망》(2021)의 포스터다. 한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정면에 오른쪽 얼굴을 보이고 있다. 여자의 오른쪽 귀부터 볼까지의 공간에 영화의 제목인
▲《레벤느망》(2021) 포스터

  2022년 6월 24일, 미국 연방 대법원이 낙태를 허용하는 판결문인 일명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지하면서 낙태 허용 여부가 각 지방 연방법에 따라 결정되게 됐다. 이에 보수 성향의 주지사가 있는 주에서는 즉시 낙태가 금지됐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낙태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여성의 억압된 신체 자기 결정권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영화 《레벤느망》(2021)은 낙태가 금지된 1960년대 프랑스에서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대학생 안이 겪는 불안과 좌절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출산을 강요하는 사회

  가톨릭의 전통으로 보수적인 분위기였던 1960년대 프랑스는 낙태를 허용치 않았다. 낙태 수술을 받은 여성이나 수술에 가담한 의사는 범죄자로 치부돼 형벌을 받았다. 음지에선 불법 낙태 수술이 성행했고 이는 당사자의 목숨까지 잃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수술이었다. 설사 불법 낙태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고, 의사의 진단에 따라 아이를 잃은 행위가 유산 혹은 낙태로 판정됐다. 낙태로 판정된 경우, 여성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규정돼 감옥행을 면치 못했다.

  의사의 진단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는 것 외에도 여성들은 다른 고통을 겪었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에게 낙태는커녕 성적 자유에 대한 담론은 상상할 수 없었다. 가족과 친구를 포함한 사회는 임신한 여성을 외면했고 낙태하려는 자에게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범죄자라는 주홍 글씨 아래 여성은 모든 비난과 책임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진 설명 시작. 주인공 안이 강의실에서 팔짱을 낀 팔을 책상에 올린채 턱을 괴고 있다. 안은 머리를 올려 묶었고 남색과 흰색의 세로 줄무늬가 그어져 있는 반소매 셔츠를 입었다. 안의 뒤로는 흐릿한 배경 속에 여러 학생들이 함께 강의를 듣고 있다. 안의 두 팔 아래, 책상 위에는 몇 장의 종이와 파일이 놓여 있다. 사진 설명 끝.
▲《레벤느망》(2021) 스틸컷

  많은 위험 요인에도 불구하고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한 여성들은 불법 낙태 수술을 받았다. 여성에게 미혼모가 된다는 것은 본인을 희생하면서 원하는 이와 결혼하지 못하고 아이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미래를 저버릴 수 없기에 여성들은 온전한 자신의 삶을 누리고자 낙태를 결정했다. 선택권이 없는 잉태는 그들에게 잔혹한 폭력으로 다가왔다.

스스로 선택했기에 참아야 하는 고통

  1940년에 태어난 대학생 안은 허름한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성적이 우수한 모범생이며 교사라는 꿈을 향해 나아가던 안은 술집에서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며칠 뒤, 월경이 제때 시작되지 않자 그녀는 병원으로 향하고 자신이 임신했다는 통보를 받는다. 안은 본인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의사에게 낙태를 요청하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한다. 의사는 그녀에게 “그런 여자가 되지 말라”는 말만 전한다.

사진 설명 시작. 흰 가운을 입은 중년의 남자 의사가 그의 정면에 앉은 안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안은 의사 쪽을 보지 않고 외면한 채 화면을 향해 왼쪽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설명 끝.
▲《레벤느망》(2021) 스틸컷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안은 다른 병원을 방문한다. 물론 그 병원에서도 임신 중절 수술은 불법이라며 도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대신 태아를 죽이는 약물을 소개한 후 이를 주사하라고 알려준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약물을 주사했고 유산되기를 기도했다.

  약물을 주사하고도 낙태가 되지 않자 안은 본인이 임신 중절 수술을 자행한다. 대바늘로 본인을 찌르는 모습은 그녀가 겪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또한 실패에 그치자 안은 처음 방문한 병원을 다시 찾아가고, 병원에서 태아가 버젓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녀가 투여한 약물이 에스트라디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아를 건강하게 발달하도록 돕는 약물이었다.

  안은 불안과 절망에 휩싸여 학업에 소홀한 채 방황한다. 그러다 한 친구의 도움으로 불법적인 수술을 시행하는 곳을 알게 된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그곳을 찾아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으나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안은 극심한 고통과 불안감에 빠지고 만다.

  더 이상 돌아갈 곳도 없다고 생각한 안은 다시 한번 수술을 받고자 한다. 합병증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은 수술을 받는다. 결국, 안은 간절한 노력 끝에 낙태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 순간 건강에 무리가 오고 안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향한다. 의식을 잃어가는 그녀에게 들린 목소리는 ‘유산’이었다.

사진 설명 시작. 안과 두 명의 친구들이 벤치에 앉아있다. 왼쪽부터 초록색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자주색 가방을 끌어안고 있는 친구와 검정 머리에 하늘색 셔츠, 흰색과 초록색 격자의 치마를 입고 있는 친구가 어깨동무를 하며 앉아있다. 가장 오른쪽에 안이 남색과 흰색의 세로 줄무늬가 그어진 반소매 셔츠를 입고 벤치에 팔을 올리고 친구들과 함께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사진 설명 끝.
▲《레벤느망》(2021) 스틸컷

  병원에서 유산 판정을 받은 안은 일상을 회복한다. 안은 다시 학업에 정진하고 낙제도 면하게 된다. 그녀가 시험을 보기 전 교수는 학생들에게 빅토르 위고의 시 「레미제라블」을 들려준다. 비장한 시와 함께 보이는 긍지에 찬 안의 모습은 보수 사회에 대한 저항과 해방을 암시한다.

혼자만의 투쟁

  상황을 홀로 버티기 힘들었던 안은 동급생들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리곤 낙태의 언급조차 금기시되는 현실에서 낙태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범죄에 연루되고 싶지 않던 동급생들은 그녀를 모르는 체하고 스스로 해결하라고 외면한다. 

  가족들이 안에게 거는 기대가 많았기 때문에 안은 가족들에게도 이런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가족과의 갈등은 점점 잦아지고 안은 공포에 빠졌다. 안은 본인을 임신시킨 남성에게도 찾아갔지만, 그가 보인 것은 책임 회피뿐이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개인은 무시했고 사회는 묵살했다. 철저하게 외면받는 경험은 그녀를 고립시켰다.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사회의 통념을 거스르기에 현실은 가혹했다. 신체의 고통보다 그녀를 힘들게 했던 것은 주위의 시선과 억압된 자유였다.

사진 설명 시작. 안이 중년의 여성과 포옹을 하고 있다. 분홍색 민소매 상의를 입은 안은 화면에 등을 보이면서 여성의 어깨에 완전히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 중년의 여성은 안 뒤쪽을 응시하면서 두 팔로 안을 안아주고 있다. 사진 설명 끝.
▲《레벤느망》(2021) 스틸컷

현실과 유리된 제도

  《레벤느망》은 주인공의 체험을 통해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이 겪어야만 했던 참혹한 현실을 드러낸다. 낙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영화는 오롯이 홀로 모든 것을 견뎌야 하는 여성의 시간을 직선적으로 보여준다. 어떠한 과장 없이 그녀가 겪은 일련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아냈을 뿐이다. 그녀의 극심한 고통과 그녀를 향한 차가운 시선은 낙태에 대한 물음에 실재적인 답을 제시한다.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이지만 60년이 지난 현실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다. 여전히 낙태에 대한 시각은 부정적이고 여성은 출산하면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된다. 다시 시작되는 사회적 억압은 이런 상황을 고착시킨다. 사회의 압제에 본인의 인생이 송두리째 붕괴된 그들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어졌을까. 신체와 삶의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이 영화의 장르가 ‘공포’로 체감되는 현실로부터 멀어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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