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을 둘러싼 5개월

서울대에서 행동했던 이들이 바라보는 R&D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라”.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제가 여러분 손을 굳게 잡겠다”. 지난 2월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2024년 학위 수여식에 축사로 참석해 한 발언이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21일, 정부에서 발표한 확정 R&D 예산안은 윤 대통령의 발언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이었다. 확정된 예산은 작년 8월 22일에 발표된 예산안에서 겨우 1.6% 회복된 26조 5천억 원이었다. 여전히 예년에 비해 14.3%가 삭감된 금액이다. 

  4개월간의 논의 끝에 발표된 확정 예산안은 얼핏 보면 여전히 10%대 삭감률을 유지해 크게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26조 5천억 원은 예산안을 되돌리고 연구를 지키기 위해 행동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끌어낸 숫자다. 비록 일부지만, 결국 회복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 내에도 R&D 예산 삭감안에 대응하기 위해 행동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난 8월부터 예산안이 확정된 12월까지 약 4개월간, 이들은 어떤 싸움을 해왔던 것일까. 예산안이 확정된 이후로도 왜 이들은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대 내에서 R&D 대응에 힘써왔던 이들을 만나 그간의 이야기와 앞으로의 전망을 들어봤다. 

서울대 내 투쟁의 목소리들

  R&D 예산 삭감안에 대응하기 위한 단체로는 학부생 측 대응 조직인 총학생회 산하의 ‘정부 R&D 예산 삭감 대응을 위한 특별위원회(R&D특위)’와 학교 단위로 참여한 ‘R&D 예산 삭감 대응을 위한 대학생 공동행동(공동행동)’이 있었다. 대학원생 측에서는 대학원총학생회 산하의 ‘R&D 예산삭감 대응 TF팀(TF팀)’을 꾸렸다. 

인포그래픽 시작. 서울대 내 R&D 예산 관련 대응 타임라인 - R&D 특위를 큰 제목으로 아래에는 2023년 8월 22일 R&D 삭감안 발표부터 2024년 1월 31일 해체까지의 활동이 직선을 따라 시간순으로 정리돼있다. 정치권과의 만남(11월 2일, 11월 3일)과 학내 공청회(11월 29일) 등 10가지 활동이 간략하게 설명돼 있다. 인포그래픽 끝.
 R&D특위 활동 타임라인 ⓒ송나윤

  학교 안팎에서 운영된 다양한 대응 조직은 학부생과 대학원생이라는 구성원의 특징에 따라 서로 다른 분야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다. 우선 R&D특위는 작년 9월 24일 제43차 총학생회 운영위원회의 의결로 설치돼 지난 1월 31일에 활동을 종료한 총학생회 산하 조직으로, 학내의 목소리를 모으고 학교 밖 사회에 대학생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R&D특위 활동의 가장 큰 특징은 학내 활동과 학외 활동의 균형이다. 지난 4개월간 R&D특위는 학내에서 R&D 관련 카드뉴스 배포, 활동 보고 및 패널토론을 포함한 공청회 개최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학외에서는 국회, 행정부 등 유관 조직과의 면담 및 간담회뿐만 아니라 비정치권 전문가와의 면담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했다.

사진설명 시작. R&D 예산삭감, 어떻게 볼 것인가 라고 쓰인 보라색 현수막 뒤에 5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다. 사람들 뒤로는

R&D특위가 개최한 공청회 2부에 진행된 패널토론

  11월 2일에 진행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 강훈식 간사(더불어민주당)와의 공개 간담회는 R&D특위의 영향력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본 간담회는 학부 총학생회 중 최초로 추진한 활동으로, 학생회와 민주당 국회의원 간의 소통 기구 확립을 협의했다. 이는 추후 공동행동이 민주당 예결산 위원회와 브라운백 미팅*을 추진하는 기반이 됐다. 

*브라운백 미팅(brown bag meeting): 점심 식사를 곁들이면서 편하고 부담 없이 하는 토론이다.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하여 최근 자주 활용되고 있다.

인포그래픽 시작. 서울대 내 R&D 예산 관련 대응 타임라인 - 대학생 공동행동을 큰 제목으로 아래에는 2023년 8월 22일 R&D 삭감안 발표부터 11월 13일 진행한 국회토론회까지의 활동이 직선을 따라 시간순으로 정리돼있다. 성명문 발표, 국회토론회 등 4가지 활동이 소개돼있다. 인포그래픽 끝.
대학생 공동행동 활동 타임라인 ⓒ송나윤

  한편 공동행동은 서울대를 포함한 11개 학교의 총학생회 단위가 모여 구성된 만큼, 전국 대학교의 목소리를 모아 대학생이라는 집단 전체의 의견을 정부에 전달하는 데 목표를 뒀다. 10월 7일 서울대, 연세대, KAIST의 공동 회의로 설치된 공동행동은 연대에 참여하는 대학 수를 늘려가며 활발히 활동했다. 

  공동행동은 대한민국 내 여러 대학들이 연대해 조직한 만큼 외부 영향력이 상당했는데, 개중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국회토론회는 외부 언론에 노출되며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11월 29일 진행된 국회토론회에서 공동행동 측은 ▲R&D 예산 백지화 및 전면 재검토 ▲학생 및 연구현장 신뢰 회복 ▲R&D 예산 규모 유지와 관련한 국정과제 이행 ▲과학기술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학생 및 연구현장과의 소통과 그를 위한 협의체 마련 ▲R&D 예산안 조정 과정에서 학생 및 연구현장과의 소통 다섯 가지를 요구했다. 

인포그래픽 시작. 서울대 내 R&D 예산 관련 대응 타임라인 - 대학원 총학생회를 큰 제목으로 아래에는 2023년 8월 22일 R&D 삭감안 발표부터 12월 21일 TF팀 해체까지의 활동이 직선을 따라 시간순으로 정리돼있다. 연세대, 고려대 대학원 총학생회와 같이 R&D 예산삭감 합동간담회를 개최한 사실이 소개돼있다. 인포그래픽 끝.
대학원총학생회 활동 타임라인 ⓒ송나윤

  대학원총학생회는 지난 10월 TF팀을 꾸려 대응에 나섰다. R&D 예산이 대폭 삭감돼 서울대 대학원생들이 연구 활동과 생활에 큰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하자 학내 구성원, 특히 대학원생의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출범한 TF팀은 R&D 예산 삭감 합동 간담회 개최 및 학내 공청회 참여 등 여러 활동을 수행하고 12월 21일 활동을 종료했다.

  TF팀은 지난 11월 25일 연세대 및 고려대 대학원총학생회, 대학원생노조, 과학기술노조, 과학기술 바로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 등과 함께 R&D 예산삭감 합동 간담회를 개최해 연구 현장의 목소리를 수렴했다. 이후 12월 7일 서울대 내에서 진행된 ‘이공계 학생들과의 릴레이 대화’에 참석해 R&D 제도 및 대학원생 처우에 관해 목소리를 냈다. 

근원에 닿지 못한 목소리

  R&D특위, 공동행동, TF팀 모두 현재 시점에서는 활동을 종료한 상태다. 이번 학생사회의 R&D 대응 활동은 2000년대 이후 대학생 학생운동의 의제가 거대 담론에서 일상과 현실로 옮겨가면서 학생사회가 사회와 점차 분리돼가는 현 상황에서 직접 정치권과 접촉하고 요구사항 및 의견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R&D 대응 활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학계의 목소리가 정부에 닿았다는 점에서 만족감을 표하면서도 본질적인 문제에 닿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표현했다. 오정민 전 R&D특위 위원장(지구환경과학 20)은 R&D특위 활동에 관해 “예산이 일부 복원됐고,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포함해 여러 가지 목소리를 사회에 드러낸 것”을 의의로 제시하면서도 “기존에 계획했던 목표를 다 이루진 못했다”고 토로했다. “활동을 하다 보니, 가장 큰 문제는 당장 1년의 예산안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제도적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됐다”는 말을 이은 오 전 위원장은 “제도적·구조적 문제를 제시하고 싶었는데, 이 부분이 명확히 전달되지 않았다”며 대응 활동의 한계를 논했다. 

  오정민 전 특위위원장은 R&D특위 활동의 한계점으로 외부 관심과 내부 영향력이 떨어져 활동이 어려워진 점을 짚었다. 오 전 위원장은 “예산안 확정 이후로 정치권에 몇 번 접촉을 시도했으나 확정 이전과 달리 잘 되지 않았다”며 “양측 협의 하에 예산안이 확정된 이후로 관심이 식었고 분위기도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사회가 더 이상 이 사안을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오 전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30일에 학생회 임기가 종료되면서 R&D특위 내부 구성원들이 학생사회에서 멀어지게 됐다”고 내부적 원인을 논하면서 “여건상 추가적인 활동이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TF팀과 대학원총학생회 측 역시 대응 활동에 대해 “대학원생들이 스스로 저지하고자 자발적으로 나선 활동이라는 점”과 “대학원생 및 신진연구자에 대한 추가 지원을 확보하는 성과를 낸 점”을 의의로 제시하면서도 “단기간에 많은 학생들의 역량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점”을 아쉬움으로 꼽았다. 당장의 예산은 회복됐고, 이 과정에서 대학원생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나, 짧은 대응 기간으로 대응을 위한 준비와 역량이 부족해 더 큰 변화를 위한 움직임을 지속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허점 투성이 예산안, 근시안적 대책

  R&D 예산안이 확정된 이후로도 추가적인 대응을 위한 행동과 목소리는 계속됐다. 정부 역시 예산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인지하고, 이를 보완할 여러 대책을 제시했다. “새로운 체계로 탈피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으로 봐달라”며 정부는 예산 삭감으로 인한 당장의 문제를 먼저 해결한 이후 R&D 자체의 구조를 차차 개혁할 것이라 예고했다. 과연 확정 예산안은 장기적인 구조 개편을 위해 일시적으로 감수할 수 있을 만큼 합리적인 것일까. 정부가 제시한 대책들은 확정 예산안에 제기되는 우려를 종식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것일까. 

인포그래픽 시작. 확정된 예산안과 부작용 대책의 현실이라는 큰 제목 아래 세로로 두 개의 검은 박스가 있다. 각 박스 안에는
예산안과 대책의 실상 ⓒ송나윤

  정부의 기존 삭감안이 학계에 가져온 가장 큰 우려는 인건비 삭감과 연구과제 감소로 인한 연구 생태계 붕괴였다. 이에 정부는 12월 21일 발표한 확정 예산안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기초연구 지원 예산을 장학금과 연구장려금을 포함해 2,078억 원 증액하고, 계속과제 예산을 1,430억 원 증액했다. 여기에 인건비 삭감에 대한 추가적인 보완책으로 대학원생 연구생활장학금 지원제도를 내세웠다. 이는 국가 R&D 사업에 참여한 석사급 대학원생에게 매달 80만 원을, 박사급에게는 매달 110만 원을 지급하는 제도다. 기존에는 4대 과학기술원에만 적용하던 제도를 타 이공계 대학원까지 확대 적용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내놓은 예산안과 대책은 유감스럽게도 기존 우려에 대한 충분한 해답이 돼주지 못했다. 우선 예산안에서 액수로만 보면 기초연구 예산이 많이 회복된 것으로 보이나, 문제는 회복된 예산이 기존에 예산 삭감으로 인한 피해가 우려되던 사업들이 아닌, 다른 사업들에 주로 안배된 것이다. 이준호 기초과학연구원장   (생명과학부)은 “소액 개인기초 연구, 비전임에 대한 연구지원, 보호학문과 지역 우수연구자 지원사업 등은 여전히 일몰 상황”이며, “계속과제 역시 여전히 10%대의 삭감”이 이뤄져 기초연구 예산의 단순한 액수 회복은 실질적 우려를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평했다. 

  대학원총학생회 측은 학문 후속세대 양성이라는 대학원의 취지에 초점을 맞춰 확정된 예산안을 평가했다. 장학금과 연구 장려금을 포함한 예산은 일부 회복됐지만 이공계열과 인문사회계열 지원 간 격차가 발생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원총학생회는 “이공계 대학원생 대상 지원사업은 늘었으나 인문사회계열, 특히 박사과정생들이 주로 받던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B유형 예산은 50% 삭감됐다”며 정부의 정책이 대학원의 취지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수립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대책으로 제시된 대학원생 연구생활장학금 지원제도에 대해서는 학부생과 대학원생, 현장 전문가 측 모두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근본적인 문제와 거리가 멀다”고 평했다. 오정민 전 특위위원장은 “당장 2024년은 긍정적으로 전망할 수 있지만, 결국 근시안적인 해결책”이라고 지적했다. 오 전 위원장은 “이번 일이 선례로 남아 앞으로도 계속 R&D 예산이 삭감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인데, 근본적으로 제도적 충격 완화 장치 없이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정부의 대응 방식이 가진 한계를 언급했다. 

  대학원총학생회는 “연구생활장학금은 재원이 불안정”하고 “R&D 사업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은 받을 수 없다”며 대책의 불안정성과 어긋난 방향성을 논했다. “정부의 정책은 자원이 집중되는 곳에 더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이라고 평한 대학원총학생회는 예산을 인문·사회·이공·예술을 구분해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 있게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학원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학업과 연구에 안정적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학문 후속세대 양성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준호 기초과학연구원장은 확정 예산안에 대해 “학생들의 우려는 반영됐으나, 정부의 대응은 너무나 근시안적인 것”이라 평했다. 이 연구원장은 “대학원생 수당 신설이라는 대책은 근본적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며, “핵심은 무너진 신뢰가 회복되지 못한 것과 대학원생들이 제대로 연구할 기회를 박탈당할 가능성”이라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예산안 삭감과 이에 대한 대책은 눈앞의 문제만을 해결하기에 급급한 결과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딘가 이상한 개혁 설계도

  R&D 예산안과 대책이 구조 개혁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말했지만, 정부가 주장하는 구조 개혁 역시 미묘한 부분이 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11월 27일 발표한 ‘윤석열 정부 연구개발(R&D) 혁신방안 및 글로벌 연구개발(R&D) 추진전략’에서 ‘의미 있는 성과 차출을 독려한다’며 기존의 소액연구과제 비중을 줄이고 대규모 과제의 비중을 늘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세부적으로는 연구과제당 연구비 최소 지원 금액을 1억 원 이상으로 설정해 2~3억 원 규모의 과제가 주를 이루도록 대형화하고, 기존 사업들에는 일몰제*를 강하게 적용해 1,200여 개 사업 중 20% 이상을 대형 계속사업으로 바꿀 계획이라 밝혔다. 

*일몰제: 각 부처가 종료 시한 명시 없이 관행적으로 수행하던 계속 지원형 R&D 사업의 타당성을 재평가해 검토를 거쳐 순차적으로 종료시키는 제도

바로 위 막대>맨 위 막대>위에서 세 번째 막대>위에서 두 번째 막대 순으로 길고, 오른쪽에 있는 모형은 위에서 세 번째 막대>두 번째 막대=네 번째 막대>맨 아래 막대>맨 위 막대 순으로 길다. 같은 위치에 있는 막대 사이에는 예산의 규모가 적혀 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규모가 커진다. 두 모형 아래에는 현재('22 기준) (화살표) 향후 모습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설명 끝. " width="761" height="311" style="width: 761px; height: 311px; vertical-align: middle;" />

정부에서 발표한 기술분야 R&D 구조 개혁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산자원부(산업부)가 지난 1월 18일에 발표한 ‘산업·에너지 R&D 투자전략 및 제도혁신 방안’에서 이러한 구조 개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산업부가 내놓은 시장성과 극대화를 위한 대형과제 중심 사업체계로의 개편안은 2023년 57개였던 100억 원 이상 과제 수를 올해 160개로 대폭 확대하고, 소규모 사업을 통폐합해 50개 가까이 줄이는 것이었다. 우선은 산업·에너지 R&D에 한정된 내용이긴 하나, 정부가 언급한 개혁이 어떤 모습으로 이뤄질 지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학생·박사 후 연구원 연수지원, 순수 이론 연구, 개념연구 등 1억 원 이하의 소액으로도 충분히 연구가 가능한 분야는 소규모 연구를 유지한다고 언급돼 있으나, 정부가 내세운 구조는 소액연구과제는 성과가 나지 않는다는 편견에 근거해 해석한 결과다. 소액연구과제는 신임 교수나 비전임 교원들, 박사 후 연구원들의 초기 연구와 중견 연구자들의 다양한 연구를 지원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연구원들이 현장을 이끌고, 그 연구원들 아래에서 후속세대가 성장하면서 연구 생태계가 순환하기 때문이다. 소액연구과제의 감소는 이러한 체계를 붕괴시킬 위험이 있다. 

  개혁안에서 언급되지 않은 기초과학연구 지원 분야의 구조도 불안정한 상황이다. 이준호 기초과학연구원장은 “연구 생태계는 피라미드식으로 구성돼 예측 가능한 성장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며 안정적인 R&D 과제 구조를 논했다. 기초연구 분야의 지원금은 이번 예산안에서 상당 부분 회복됐지만, 사업 구조가 대거 변경되면서 실질 우려는 해결되지 못했다. “현재의 기초연구지원 체계는 과제 수로 볼 때 허리가 잘록해진 상황”이라며 불안정한 기초연구 R&D 구조를 설명한 이 연구원장은 “신진연구자들이 당장 지원을 잘 받아도 조만간 보릿고개를 만나게 될 것이 너무나 명확하니 불확실한 미래가 더욱 걱정스럽다”고 우려했다. 

  확정 예산안은 기존 예산안의 우려를 해결하지 못했고, 대책 역시 빈틈을 메우지 못했다. 이후 예정된 R&D 구조 개혁마저도 불명확하며 현재 제시된 것은 오히려 현장의 목소리와 어긋난다. 결국 이번 확정 예산안은 연구계 전체의 현재도, 미래도 불투명하게 만든 결정이 돼버린 것이다.

학생사회를 넘어 시민사회로

  R&D 예산이 단번에 대폭 삭감된 선례가 남아버리면서, 언제든 다시 비슷한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학계와 연구계에 퍼졌다. 현장에 몸담은 사람들의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어쩌면 당장의 연구계 전망은 그리 밝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R&D 예산 삭감이 연구사회에 불안감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R&D 예산 삭감에 대응하기 위한 활동들은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이 학생사회를 넘어 사회에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선례를 남겼다. 대학원총학생회는 “대학원생들이 기존의 부차적으로 목소리를 내던 것을 넘어서서 자발적으로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 큰 의의였다”며 “이번 R&D TF의 활동을 바탕으로 향후 대학원생의 처우 및 학술연구 환경 개선의 움직임이 이뤄지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전까지는 사회와 분리돼 학생사회라는 집단 내에서만 머무르던 이들이, 사회에 하나의 계층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국가 R&D 예산은 학계와 연구계를 순환시키는 동력이다. 이를 갑작스럽게 대폭 삭감한 정부의 행태는 R&D 예산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현장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결과물이다. 현장과의 논의 없이 통보식으로 발표된 예산안에 대해 학계는 침묵하지 않았다. 정부의 일방적인 R&D 예산 삭감에 대응하는 학생들의 적극적인 활동은 단순한 결과를 넘어서서 학생사회가 함께 연대해 더 넓은 공동체에서 대학생이라는 집단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번 대응 활동을 선례로 학생들이 두려움 없이 사회적 논의에 참여해 사회의 일원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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