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인터뷰
매 인연의 끝에 우리는 어디에서 만나게 될까
노트 속에서 46년 잠들어있던 시어(詩語)

매 인연의 끝에 우리는 어디에서 만나게 될까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2024)

  12살, 서로의 사랑이던 소년과 소녀는 소녀의 이민으로 헤어진다. 그들은 12년 후 재회하지만 결국 현실의 벽 앞에 관계는 역시 끊긴다. 그리고 다시 12년. 만남은 또 한 번 이뤄지지만, 여전히 사랑은 이어지지 않는다. 겉보기에 이 영화는 어긋난 첫사랑의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의 초점은 단순히 연애의 ‘순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대신 사랑이 놓이는 인생의 ‘시간’까지 멀리 가닿는다. 끝없이 흐르는 삶 속에서 찾아오고 떠나가는 관계를 어떻게 읽어낼까. 《패스트 라이브즈》는 삶과 관계에 관한 하나의 애틋한 독법이다.

 인연이라는 운율의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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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포스터 ©다음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셀린 송 감독이 처음으로 제작한 장편영화다. 정적인 카메라 워킹, 구름의 속력처럼 느긋한 시퀀스, 작중 직접 표현되듯 “긴 침묵의 활용”이 가득한 함축적 대사. 영화는 마치 한 편의 서정시처럼 느껴진다.

  이 서정시는 세 개의 연(聯)으로 구성된다. 첫째 연은 서울에서 펼쳐지는 ‘노라’와 ‘해성’의 유년 시절 첫사랑을 담아낸다. 그때는 노라가 아직 개명하기 전이었으므로, 노라는 한국 이름인 ‘나영’으로 불렸다. 첫 연은 나영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며 노라가 될 때 끝이 난다.

  12년의 행간을 두고 재개되는 둘째 연, 노라와 해성은 어느덧 24살이다. 그들은 각각 뉴욕과 서울에 있으며, 화상통화로 만난다. 마음은 다시 움트지만, 결국 이번에도 각자의 직업과 상황으로 인해 관계는 어긋난다. 마지막 셋째 연은 36살의 해성이 노라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찾아오며 펼쳐지지만, 노라는 이미 미국인 남성 ‘아서’와 결혼한 뒤다.

  모든 연을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운율은 바로 연(緣)이다. “한국어엔 이런 말이 있어. ‘인연’.” 인연은 영화 중반 노라의 입을 빌려 직접 핵심 주제로 소개된다. 인연은 사람이 맺는 관계를 단순한 우연으로 보지 않는다. 더 복잡하고 필연적인 작용으로 인식한다. 내가 이번 생에 만난 누군가는 사실 전생에 특별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다고 여길 정도로. 이 운명의 실은 다음 생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끝내 매듭을 맺지 못해 끊기기도 하며, 새로운 실타래와 엮이기도 한다. 영화는 이 인연이라는 실로 이야기와 인물들의 구성을 섬세하게 잇고 묶는다.

어긋나는 시차 속의 회전목마

  해성과 노라는 희붐한 조명의 뉴욕 바에서 마주 본다. 36살의 그들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던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소회를 나눈다. 문득 추리하듯 물으면서.

  “전생에 우린 누구였을까?” 인연을 되짚는 일은 지난 생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이때 전생은 말 그대로 먼젓번 삶만을 의미할까.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의 인생 속에서도 복수의 삶을 경험한다고. 그를 증명하듯 해성과 노라는 12살, 24살, 36살에 모두 다른 삶의 모습을 살아간다. 십이간지의 주기가 한 차례씩 돌아올 때마다 인생의 풍경은 이전에 상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광경이다. 그러므로 이때 전생을 회상하는 것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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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영화

  12살의 나영은 서울에 사는 울보 꼬마였다. 그러나 24살에는 뉴욕에서 작업을 이어가는 캐나다인 극작가 노라로 변했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자연스러워졌고, 운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울음도 그쳤다. 36살에는 이미 결혼도 하고 영주권을 얻어 뉴욕에 정착한 뒤다. 이제는 배가 고플 때 밥이 아닌 치킨윙을 먼저 떠올리는 미국인이다.

  “어떤 여정은 대가가 유독 비싸요. 인생 전체를 지불해야 할 때도 있죠.” 노라는 두 차례의 이민이라는 여정을 거쳤고, 서울에서 나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삶을 저버렸다. 그것은 자신의 언어와 근거지를 포기하는 중대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민에 대해 노라의 어머니가 말했듯, “버리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노라는 복잡한 인생행로를 거쳐, 꿈꾸던 작가 생활을 뉴욕에서 자유로이 펼칠 수 있게 됐다.

  반대로 해성은 서울에 남았다. 해성은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이다. 노라에 비해 해성의 궤적은 분명 범상할지 모르지만, 돌아보면 해성의 삶 역시 예측할 수 없는 변화로 가득했다. 12살에 농구공을 튕기던 소년은, 24살에 명문대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36살에는 중국에서 만난 연인과 결혼을 고민하고 있다. 각자의 삶을 고정된 모습 그대로 이어나가는 사람은 없다. 영화는 전생이라는 소재로, 우리가 가변적인 존재이며 다양한 얼굴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러나 우리는 나아가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리워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해성은 12살의 나영을 기억에 품고 노라를 다시 찾았다. 노라 역시 해성과 만나며 서울의 기억을 그리워한다. 그것들은 이미 지나가고 없는 순간의 향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사실 지금의 삶은 늘 전생을 토대로 삼고 있다. 노라는 12살 때처럼 여전히 작품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하고, 해성은 12살 때처럼 누군가의 곁을 다정하게 지켜주고 바라본다. 그리고 바로 그 전생의 기억에 대한 그리움은 지금 생의 만남을 주재한다. 이렇게 본다면 전생이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은 어쩌면 덤덤한 진리인 셈이다.

  즉 우리의 살아온 생과 살아갈 생은 서로 긴밀하게 얽혀있고, 그것은 마치 회전목마처럼 서로 손을 잡은 채 천천히 회전한다. 해성과 노라가 나란히 앉아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뉴욕의 한 회전목마 앞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는 삶의 만남과 헤어짐이 한 자리에 포개져 있다는 사실을 이러한 이미지들로 반복해서 전달한다.

나의 언어로는 가닿을 수 없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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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영화

  이 영화에서 해성과 노라만큼이나 중요한 등장인물은 아서다. 아서는 노라가 24살에 해성과 연락을 끊은 뒤, 예술가 레지던시에서 만나 결혼한 남자다. 그러므로 12년 뒤, 해성의 뉴욕행은 관객에게는 애틋한 귀환이지만 아서에게는 청천벽력이다. 평온한 일상을 살고 있었는데, 아내의 한국인 옛사랑이 24년 만에 재회하러 온다니.

  해성의 방문에 대한 아서의 첫 번째 반응은 당연히 불안이다. 해성이 노라와 쌓아온 인연의 운명적인 전사에 비하면, 자신이 노라와 공유한 시간은 턱없이 납작해 보이기 때문이다. 해성은 노라가 나영이었을 시절도 알고, 나영이 울보였다는 사실도 안다. 노라가 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과는 달리.

  아서는 불안 속에서 잠망경을 들여다보듯 전생을 돌아본다. 그에게 노라는 자기 삶의 의미를 더 크게 해주는 존재였지만, 자신은 노라에게 그런 존재였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자신은 다른 유사한 미국인 작가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을 만큼 평범해 보인다. 노라가 이민을 올 때 꿈꿨던 미래가 고작 자신과 함께하는 삶으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닌지 불안해한다.

  그러나 노라는 자신이 아서를 사랑하고, 이 삶이 자신이 선택하고 받아들인 결과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운명과 인연의 차이를 제시한다. 미리 하나의 완벽한 구두점으로 찍히는 운명과 다르게, 인연은 여러 가닥으로 흘러가는 실타래와 같다. 운명처럼 보이는 해성과 노라의 관계 역시 조금 더 길게 엮인 인연의 연속일 뿐이다. 어느 인연의 선에 우리의 손가락이 엮일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 선을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우리가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그 선이 운명의 형상처럼 깔끔하지 않고 조금은 너저분할지라도.

  아서 역시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해성에 대한 아서의 반응은 불안에 그치지만은 않는다. 아서는 최선을 다해 해성을 환대하기도 한다. 해성을 받아들이고, 해성과 대화하려 한다. 아서와 해성은 노라를 사이에 둔 경쟁자가 아니다. 노라를 경유해 서로 맺게 된 또 하나의 인연일 뿐이다. 해성은 노라가 자리를 잠시 비울 때 아서에게 서툰 영어를 건넨다. “You and me, 인연.” 아서는 안다는 듯 흔쾌히 말한다. “Yes, you and I are 인연, too.”

  바에서 담소를 나눌 때, 나영과 해성이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면 아서는 자연스레 소외된다. 언어의 문제는 아서에게 중요하다. 아서는 노라가 한국어로 잠꼬대 한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내가 이해 못 하는 말로 꿈꾸는 거. 마음속에 내가 못 가는 장소가 있는 거잖아.” 자신이 소외되는 그리움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해성의 얼굴로 등장해 아서에게 불안을 심어준다. 하지만 아서는 불안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한국어를 배우려는 건가 봐.” 아서는 의기소침하지 않고 소외를 이겨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것은 일종의 심정적인 이민을 위해 비자를 마련하는 일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오기 위해 언어를 교체해야 했던 노라처럼, 아서 역시 노라의 꿈에 동참하기 위해 노라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여타의 이민자 영화에서 언어의 소외가 주로 이민자에게만 중요하게 부각됐던 것과 달리, 영화는 선주민에게도 유사한 문제의식을 부과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해성이 한국으로 떠난 뒤, 노라는 해성을 배웅하고 돌아와 울음을 터뜨린다. 오랜만에 되살아난 울보의 눈물을 다독여주는 사람은 이제 아서다. 아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할지 모르는 자신과 노라의 인연을 수긍했다. 해성과 막 시작된 인연까지 받아들였다. 그리고 노라의 언어와 눈물을 배워가며 자신만의 인연을 덧쌓아간다.

아직 찍히지 않은 시의 마침표

  36살의 시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마치지만, 그들은 12년 후 또 조우할지 모른다.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인연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런 영화의 끝을 염두에 두면 무심코 지나쳤던 프롤로그가 의미심장하게 되돌아온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뉴욕의 바, 새벽 4시. 해성과 노라와 아서가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눈다. 카메라는 그들을 관찰하는 어느 남녀의 시선이다. “저 사람들 무슨 사이 같아?” 여자가 묻는다. 남자는 답한다. “모르겠는데.” 남녀는 그들의 관계를 열심히 추측한다. 해성과 노라가 커플일지도, 혹은 남매일지도 모른다고. 혹은 아서가 노라와 커플일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아서가 가이드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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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영화

  그 추측들은 관계의 여러 가능태를 제시한다. 우리는 노라와 아서가 부부고, 해성은 손님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의 관계가 항상 같은 모습으로 지속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나로 확정되지 않고 관계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는 남녀의 대화는 영화의 메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퀀스다.

  인연이 이어지는 한, 이 서정시는 끝없이 작성되는 연작과도 같다. 영화가 미래를 기약한다는 사실은 해성의 변주되는 작별 인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12살 때 해성은 캐나다로 떠나는 나영에게 “잘 가라”라고 말하고 떠났다. 그리고 24살 때, 해성은 노라의 작별을 수용할 때 “잘 가”라고 체념하듯 답했다.

  그러나 36살 때는 다르다. 해성은 헤어지기 전, 노라에게 이것 역시 하나의 전생이고 다음 생에서 다른 인연으로 만나지 않을지 묻는다. 해성은 “그때 우리는 누구일까?”라고 질문하고, 나영은 “모르겠어”라고 답한다. 해성은 미소 짓고, 세 번째 작별 인사를 남긴다. “그때 보자.” 체념으로 보내는 말이 아니라 재회를 기약하는 말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 다음 이야기는 그때 가봐야만 알 수 있다. 다가올 삶은 살아봐야만 알 수 있으니까.

 

  《패스트 라이브즈》는 지나온 과거를 애틋하게 어루만지는 동시에, 그 속에 내포된 미래를 초연히 약속한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관객은 자문할 수밖에 없다. 나의 전생은 어땠을까. 나의 전생은 어떤 다음 생을 초대할까. 영화가 끝나면 암전된 상영관에 천천히 조명이 밝아오듯, 우리의 마음속에 멈춰있던 회전목마 역시 불이 들어오며 서서히 가동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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