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해 4월 16일을 기억한다

세월호 참사의 기억을 돌아보다
▲인터뷰 참여자 정보

  모두가 선명히 기억하는 10년 전의 하루가 있다. 세월이 흘러도 도저히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또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서울대저널〉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6명을 만나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들었다.

▲인터뷰 참여자 정보

2014년 4월 16일

  2014년 4월 15일 밤 9시경, 승객 443명과 선원 및 승무원 33명을 포함해 총 476명이 승선한 연안 여객선 세월호가 인천항에서 출항했다. 승객 중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도 있었다. 4월 16일 8시 48분경, 세월호는 병풍도 앞바다에서 오른쪽으로 급하게 항로를 변경했고, 급변침 후 1분 만에 좌현으로 약 47도까지 기울었다. 8시 52분 단원고 학생이 119에 최초로 신고했고, 2분 뒤 목포해경에 침몰 상황이 전달됐다. 하지만 배가 기울어졌을 때 다시 원래대로 일어서는 성질인 복원성이 상실된 상태에서 세월호는 10시 17분경 108.1도까지 기울었고, 11시 18분경 배의 앞부분 일부만 남기고 바다 밑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총탑승자 476명 중 배가 기울기 시작한 초기에 탈출하거나 갑판으로 올라갔던 생존자 172명을 제외한 299명이 사망하고 5명이 실종됐다.

  연수(가명) 씨는 10년 전 중학교 1학년이었고,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세월호 참사를 처음 접했다. ‘전원 구조된 것 같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11시 1분, 언론 또한 단원고 학생이 전원 구조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단원고에서는 미수습자 포함 250명의 학생이 희생됐다. 귀가하는 버스에서 세월호에 탄 사람을 찾는 글이 SNS에 하나둘씩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며 연수 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예진 씨는 세월호 침몰이 처음 보도된 오전에는 뉴스를 바로 접하지 못했다가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친구들이 웅성이는 모습을 봤다. 배가 침몰하는 장면과 구조가 이뤄졌다는 보도 화면을 친구들과 함께 지켜봤고, 집에 도착한 후에도 TV를 통해 경과를 주시했다.

  상진 씨는 당시 군인이었다. 수요일 오후, 훈련이 끝나고 4시쯤 TV를 켰을 때는 구조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처럼 보도됐다. 상진 씨는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훈련 때 사용한 물건들을 마저 정리하러 갔고, 저녁에는 집에 전화해 별일은 없는지 확인했다. 이후로는 TV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소식을 더 접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고 첫 휴가를 나가서야 세월호 참사의 경과를 알게 됐다.

  고등학교 교사인 영규 씨는 1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가 선생님들이 세월호 속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봤다. 처음에는 다들 구조가 잘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고, 영규 씨 스스로도 구명조끼를 입고 즉시 탈출하면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인명 피해가 크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다. 영규 씨의 걱정은 오히려 사람들이 선체에서 뛰어내린 후 급류에 휩쓸리는 일이었다. “선생님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어요”라는 말을 동료와 나누며 다음 수업에 갔는데, 시간이 지나고 참사의 심각성이 드러나며 학교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2주 뒤에 수학여행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영규 씨의 걱정은 더욱 커졌다.

  은미(가명) 씨는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를 두고 있었다. 집에는 TV가 없어 소식을 접하지 못하다가 카페에 도착해서야 세월호 참사를 알게 됐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구조됐다고 보도됐기 때문에 안심하며 일상을 이어가다, 두세 시간 후 친구를 통해 구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두 배의 충격을 받았다.

  안용(가명) 씨는 중학교 교사로 근무 중이었다. 1교시 수업 전 9시쯤 속보가 나서 교무실 TV에 뉴스가 틀어져 있었다. 곧 구조가 이뤄지겠다고 생각하고 수업에 들어갔는데,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구조는 되지 않았다. 해군과 해경이 출동하는 모습을 보며 걱정을 따로 하지 않았다가, 오후가 돼서도 그대로인 모습을 지켜보며 혼란스러웠다. 결국에는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며 안용 씨는 할 말을 잃었고, 참담한 기억에 학생들을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는 심정이었다.

▲”전원 구조” 오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 ⓒ송나윤

상흔이 돼 버린 기억

  이후로도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세월호의 출항에서부터 침몰, 생존자 구조와 희생자 수색, 정부의 유가족 사찰과 책임 회피, 시민들의 추모와 기억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다시 짚어보자. 평형수를 넣지 않고서는 스스로 직립할 수 없도록 한 세월호의 증개축, 규정을 어긴 청해진해운의 적재, 승객을 구조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먼저 탈출한 선장과 일부 선원, 선실 내부 사람들을 구조할 책임을 방기한 해경, 즉각적인 구조 명령 없이 상부 보고만 요구했던 지휘부, 사회적으로 확대된 참사에 대응하고 피해자들의 고통에 응답하는 데에 실패했던 무능한 정부…. 수색구조 과정이나 사후 대책이 마련되는 동안 피해자와 유가족의 인권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고, 오히려 배·보상 금액이 과도하게 부풀려 보도되며 피해자와 유가족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

  상진 씨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세월호가 지겹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은미 씨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집회에 나갔을 때 ‘자식 갖고 장사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적 있고, 안용 씨는 ‘세월호 시위를 너무 오래 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오랜 친구를 보고 낯선 감정을 느낀 적 있다. 은미 씨와 안용 씨는 “슬픔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묻으려고 하는 시대”라고 말하며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애도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는 사회에 깊은 실망감을 표했다.

  ‘그만해라’, ‘지겹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인터뷰 참여자들은 모두 세월호 참사에 대해 계속 말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했다. 아직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연수 씨는 “왜 아직도 여기까지밖에 일이 진행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예진 씨는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희생자의 유가족, 생존자의 요구가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대통령을 비롯한 수뇌부가 참사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구조할 수 있었던 시간에 해경이 왜 움직이지 않았는지” 등 여전히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지점이 남아있다고 평했다.

상진 씨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싶었던 것은 

“배가 왜 침몰했는지, 그리고 침몰 상황에서 왜 사람들을 안 구했는지”라는 사실뿐임에도 둘 다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고 모든 가능성이 설로만 남아있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말했다. 상진 씨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했을 당시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의 최종 책임도 함께 묻고자 했으나,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은 직접 구조 의무가 없다고 설시하며 이마저 좌절된 점을 함께 짚었다

  영규 씨는 “청해진해운이 세월호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고, 그에 대해서는 출항 이전부터 문제점이 지적됐다”고 언급하면서도, “언론이 구원파라는 종교 집단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전환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실질적인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졌다는 설명이다. 영규 씨는 “처벌받기 싫다는 마음에 지휘부의 누구 하나도 명확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없었다”며 “진상 보고서가 발표되긴 했으나 여전히 명쾌한 책임 소재는 가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은미 씨는 “어떤 일의 실체적인 진실을 알 수 있다고 믿는 편은 아니지만, 세월호 참사는 해도 해도 너무한 감이 있다”고 토로했다. 은미 씨는 긴 시간 동안 밝혀진 건 “정부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라 말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듣고 구조를 기다리다가 죽어나간 사람들의 억울함을 생각하면 은미 씨는 하염없이 슬퍼진다. 은미 씨는 재난이 발생했을 때 “내가 속한 세상이 최소한 목숨은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느껴야 하는데, 세월호 참사는 국가가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4.16기억교실 칠판에 노란 리본이 그려져 있다.

반복해 흉이 져 버린 기억

  반복되는 참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인터뷰 참여자들에게 무력감을 줬다. 영규 씨가 초등학생 때는 서해훼리호 참사가 있었다. 1993년 10월 10일, 221명이 정원인 배에는 총 362명이 탑승했고, 규정을 초과한 화물이 함께 적재됐다. 서해훼리호는 악천후에도 출항을 강행했다. 복원력이 절대적으로 약해진 상황에서 배 왼쪽 부분에 닥치는 파도가 높아지자 선장은 항로 변경을 무리하게 반복했고, 결국 배는 전북 부안군 인근 해상에서 갑작스럽게 침몰하고 말았다. 그렇게 292명이 숨졌다. 영규 씨는 “서해훼리호 참사 20년 후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것인데, 이런 식이면 20년 후에 또 다른 선박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며 재난 안전 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아직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반응했다.

  안용 씨는 “세월호 참사 후에 다시는 이런 식의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황당하게도 땅에서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는 사건이 또 생겼다”며 이태원 참사를 언급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로 159명의 목숨이 스러졌다. 인파가 몰릴 것이 충분히 예상됐음에도, 압사 위험이 있다는 신고가 수차례 접수됐음에도, 국가는 또다시 국민을 지키지 못했다. 1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간의 수사나 재판은 이태원 참사를 일으킨 일부 관계자들에게만 책임을 물었을 뿐 참사의 구조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나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데에는 힘쓰지 않고 있다. 안용 씨는 “반복되는 참사를 막기 위해 진실을 규명하자는 것인데, 실제로 비슷한 사회적 참사가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음에도 ‘그만하자’는 쪽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이 답답하다”는 심정을 밝혔다. 예진 씨도 이태원 참사에 대해 “똑같은 일이 반복됐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무력감을 다시금 느낀 사건”이라고 말하며 “우리 사회가 애도라는 작업에 걸리는 시간이나 비용을 충분히 들이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상진 씨는 “세월호 참사 당시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생존자분이 페이스북에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내용의 글을 쓰신 걸 봤다”고 했다. 불법 증축과 부실시공, 서초구청과 건설업계의 유착, 오전부터 발견됐던 이상 조짐을 무시한 경영진, 허술한 구조 지휘까지.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도 대형 인재를 관리하는 국가의 능력을 의심하게 했던 사회적 재난이었다. 상진 씨는 “1995년에는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 2022년에는 이태원 참사까지 발생한 것을 보면 국가의 재난 관리 시스템이 사실상 30년째 제자리걸음인 것”이라고 꼬집었다.

  연수 씨는 “국가의 모든 안전 관련법은 유가족들의 피로 작성돼 있다는 말이 있다”며 “피를 흘렸는데도 아직 작성되지 않은 법이 많다”고 역설했다. 연수 씨는 “참사가 반복될 때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는 같다”며 “사회적 참사에는 국가의 책임이 무엇보다도 크고, 사람들은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최소한의 책임을 지키길 바란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현정부가안전 관련법을 작성하겠다는 의지를 전혀 표명하지 않는 상황에서, 연수 씨는 “사람들은 아직도 기본적인 안전이 보장되지 않다고 느끼며 쉽게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비판했다.

가슴에 새긴 노란 리본

  예진 씨는 청소년기에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자라나는 감각을 느꼈다. 예진 씨가 마주한 사회는 “고통받은 사람들을 제대로 대하지 못하는 사회”였고, 이는 예진 씨의 영상과 논문 작업에 큰 영향을 줬다. 예진 씨는 올해 초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다룬 단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세월호 참사 당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각자의 경험과 감정을 나누는 일이 예진 씨에게는 지난 감정을 들여다보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도움이 됐다. 예진 씨는 기억을 계속해서 말하는 작업이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아 힘이 되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상진 씨는 제대 후 세월호 참사 2주기 때 학교 친구들과 추모 집회에 갔던 경험을 돌이켰다. “비옷을 입어도 의미가 없을 정도로 다 젖어버리는” 날씨에도 자리를 지키며 집회에 참여하던 도중 상진 씨는 2014년 4월 16일에도 비가 왔던 것을 떠올렸다. “졸졸 흐르는 비에도 이렇게나 추운데 물에 빠졌던 친구들은 얼마나 추웠을지 생각해 보니 이전까지 가졌던 불만들이 민망해졌던” 순간의 기억이었다. 이후로 상진 씨는 항상 노란 팔찌를 찬다. 상진 씨의 손목은 노란 팔찌가 없을 때보다 불편해졌지만, 그럼으로써 상진 씨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알량한 마음을 다잡”으며 시민단체에서의 활동을 이어간다. 상진 씨는 “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연대와 기억의 대상이 광주였던 것처럼 모두가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세대가 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고 밝혔다.

영규 씨가 속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서는 매년 4월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학생들에게 노란 리본을 나눠주고, 교문에 플래카드를 걸고, 포스트잇을 붙이는 등 학교라는 공간에서 세월호를 기억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지속하고 있다. 물론 바쁜 일상에 세월호 참사를 챙기는 일이 힘에 부칠 때도 분명히 있지만, 영규 씨는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세월호를 기억하고 추모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영규 씨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에도 기성세대였고 지금도 기성세대지만, 다음 세대에게만큼은 더 나은 세상을 전해주고자 하는 약속의 의미가 노란 리본에 있다”고 짚었다.

은미 씨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간을 돌려 2014년 4월 16일 그 배에 타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라며 세월호 참사가 “모두의 마음의 짐”이 됐다고 언급했다. 사람들이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것은 세월호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해야 할 당위성을 인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은미 씨는 힘줘 말했다.

안용 씨는 “무엇보다도 먼저 산 사람으로서 부끄럽다”며 

“왜 젊은 세대에 계속 참사가 발생해 함께 살아가는 것을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특히 안용 씨는 4.16기억학교를 다녀오고 세월호 참사를 다룬 책을 읽으며 “세월호 참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해결되지 못해서 속상한 일”임을 마음에 새겼다. 안용 씨는 “기득권이 아무리 조용히 하라고 해도 힘없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곁에 둔 이들은 피눈물을 흘린다”며 “내 사람은 그렇게 가더라도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유가족이 투쟁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일명 ‘세월호 세대’인 예진 씨와 연수 씨 또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부채감이 있다고 말한다. 예진 씨는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고,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에 노란 리본을 표시해 뒀다. 예진 씨는 노란 리본을 본인의 일상에 포함하는 일은 곧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에 조금이라도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연수 씨는 세월호 참사 당시 중학생이었고, 지금은 22살이 됐다.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이 고등학생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며 연수 씨는 “그들의 못다 한 삶을 기억하고 못다 한 말을 들어야겠다”고 다짐한다. 특히 노란 리본을 다는 방식으로 여전히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마주할 때, 연수 씨는 그날의 기억이 혼자만의 기억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으며 세월호를 오래도록 기억해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한다.

  연수 씨에게는 4살 어린 동생이 있다. 10년 전에 연수 씨 동생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기에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제 세월호 참사 때 10살이었던 어린이들이 성인이 됐다. 연수 씨는 “세월호 참사를 잘 모르는 세대에게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해주고 싶다”며 세대를 불문한 모두의 기억을 만들어갈 필요성을 강조했다.

▲책상에 노란 리본이 쌓여 있다.

  간직한 기억의 모습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에게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 기억하는 일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 〈서울대저널〉은 같은 믿음으로 기억의 작업에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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