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익(一翼)임을 자랑한다.” 1960년 4월 19일, 한반도 전역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울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리과대학 학부생들은 이승만 독재 정권 아래서 자유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고, 다른 학생들도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일에 기꺼이 동참했다.
1960년 4월에 울린 자유의 종은 1990년에 이르기까지 약 30년간 소리가 멎을 틈이 없었다. 격동하는 정권 교체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유의 종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1970년대 유신 정권의 탄압에 반대하며,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외치며, 1987년 권력 앞에 스러져간 친우의 의지를 이으며, 종소리는 캠퍼스에 울려 퍼졌다.
민주 담론을 구축해 나간 1990년대를 거치면서 학생운동은 거시적인 저항에서 미시적인 논의로 초점을 옮겼고,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함에 따라 예전처럼 학생운동으로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이전에 울렸던 종소리의 잔음은 여전히 관악 캠퍼스 곳곳에 머무르고 있다. 올해로 15주년을 맞이하는 민주화의 길, 그 위에서 자유의 종의 잔음은 추모비의 형상으로 남아 지나가는 이들이 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캠퍼스에 기억을 새기다
민주화의 길은 규장각 인근 4·19 기념탑에서 시작해 사회대를 지나 농생대까지 이어지는 1.2km 길이의 코스다.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은 2007년 기획이 시작돼 2009년 11월 3일에 공개된 민주화의 길은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뉘며, 각 구역에는 본교 출신 민주열사들의 추모 조형물이 위치해 있다. 지정된 코스를 따라 걸으며 민주열사들의 추모비를 답사하고, 관련된 학생운동의 기억을 되새기며 민주주의 정신을 활성화하는 것이 민주화의 길의 주된 의의다.

민주화의 길은 학내에 산재해 있던 추모비들을 정리하고, 민주화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의 기억에서 과거 치열했던 학생운동들이 소멸하는 상황을 막고자 조성됐다. 2007년 고려대·서울대·연세대·이화여대 학생 1,089명을 대상으로 각 대학 학보사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6월 민주항쟁을 알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전체의 44.1%에 불과했을 정도로 학생운동은 2000년대에 들어서 빠르게 잊혀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본부는 캠퍼스에 민주화 정신과 학생운동의 기억을 새기고자 했고, 그 노력의 결과물이 민주화의 길이다. 당시 대학 본부에서 구성한 ‘민주화의 길 조성위원회’ 측은 ‘민주화 이전 세대들의 치열했던 학생운동의 기억을 되새기고 열정과 민주주의 정신의 승계를 유도한다’며 민주화의 길을 조성한 취지를 밝혔다.
다시금 민주화의 길을 걷다

민주화의 길이 시작되는 4·19 기념 공원은 정문으로 들어와 조금만 직진하면 바로 다다를 수 있다. 64동 IBK 커뮤니케이션센터 앞 나무들 사이 솟아있는 탑의 끄트머리를 쫓아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면, 넓은 터와 4·19 기념탑이 나타난다.

언덕 입구에 놓인 표지석에는 4·19 혁명 당시 공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은 민주열사 여섯 명의 이름과 그들의 추모비가 서울대 내부로 오기까지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고순자(응용미술 58), 김치호(수학 58), 박동훈(법학 59), 손중근(국어교육 57), 유재식(체육교육 59), 안승준(경제 58) 6명의 열사,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나갔다는 공통점으로 이곳에 함께 자리했다.

표지석을 지나쳐 올라가면 나오는 넓은 공간에는 추모비와 기념비, 동상과 기념탑이 있다. 민주화의 길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조흥식 명예교수(사회복지학과)는 일전 〈서울대저널〉과의 인터뷰에서 ‘4·19 혁명이 민주화의 물꼬를 텄고, 그것이 6월 민주항쟁으로 열매를 맺었다’고 말했다. 민주화의 길의 시작점이 4.19 기념 공원으로 선정된 것은 4·19 혁명이 민주화의 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4·19 기념 공원에서 나와 사회과학대학 건물 사이로 올라가다 보면, 공사 중인 사회과학대학 도서관을 뒤로한 채 종합운동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저항한 김태훈 열사(경제 78)와 우종원 열사(사회복지 81), 김성수 열사(지리 86)다. 1981년 5월, 스스로를 바쳐 부조리함에 저항한 김태훈 열사, 저항 중 의문사라는 이름 아래 설명되지 못한 죽음으로 떠나간 23세 어린 나이의 우종원 열사와 19세의 김성수 열사. 이들은 군부 독재 아래에서 자행되는 사회의 부조리를 그저 참아내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지켜낸 현재에서 우리의 캠퍼스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

세 사람과의 만남을 가진 후, 경영대학 방향으로 돌아서 인문대학으로 올라간다. 인문대학으로 향하는 길에, 인문대학 1동 앞에서 1980년대 후반, 전두환 정권에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했던 또 다른 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1986년 4월 민주주의를 향한 불씨를 품고 분신한 김세진 열사(미생물학 83), 이재호 열사(정치 83)와 홀로 남아 고뇌 속에서 세상과 삶을 부끄러워했던 박혜정 열사(국어국문 83)가 그들이다. 박혜정 열사의 추모비는 인문대학 1동 앞 우거진 풀밭 깊은 곳에 놓여있다. 밖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사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놓아둔 꽃과 함께 박혜정 열사는 변화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한 세상을 지켜보고 있다. 박혜정 열사가 위치한 곳에서 빠져나와 위로 세 걸음 올라가면 조금은 더 개방된 곳에 김세진 열사와 이재호 열사의 추모비가 위치한다. 작은 공간에 있는 추모비 앞에는 김세진·이재호 기념사업회 사람들을 포함한 여러 명의 화환과 국화가 놓여있었다. 그들을 기억하는 흔적은 그들을 몰랐던 사람들도 한 번쯤 추모비를 돌아보게 한다.

인문대학을 지나쳐 관정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관정 도서관 3층으로 향하는 언덕길에는 어쩌면 가장 익숙할 이름과 조금은 생소할 이름이 기다리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고 평가받는 박종철 열사(언어 84)와 같은 해 9월, 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최우혁 열사(서양사 84)다. 1997년 건립된 박종철 열사의 추모비 옆에는 흉상이 함께 배치돼 있다. 최근 학내 팔레스타인 연대 동아리 ‘수박’ 측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선배 대학생들의 전통을 이어 나가겠다는 의미”를 담아 흉상에 팔레스타인 전통 스카프를 두르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군부 독재에 맞서 싸웠던 그의 정신이 여전히 캠퍼스에 형상으로 남아 후대에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두 열사의 추모비에는 오늘날에도 누군가의 꽃이 놓이고, 그들을 기억하는 타인은 캠퍼스에 찾아와 그들의 흔적을 오래 지켜보기도 한다.

관정 도서관 중앙 통로를 지나면 마주하는 관정 도서관 입구와 자연과학대학의 경계선에서, 세 명의 열사를 더 만날 수 있다. 1983년 11월 도서관에서, 1988년 5월 명동 성당에서, 1989년 화양동의 공장에서 떠나간 그들은 황정하 열사(도시공학 80), 조성만 열사(화학 84), 조정식 열사(물리 82)다. 각자 시간과 장소는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당시의 암울한 현실에 저항하고자 했다. 황정하 열사는 민주화를, 조성만 열사는 평화 통일을, 조정식 열사는 노동자의 삶을 외치며 이 모든 것을 넘어선 올바른 세상을 좇았다. 3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에도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 남북 관계와 캠퍼스 내에서조차 내몰리는 노동자의 삶,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우리가 아직도 올바른 세상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남아 있는 추모비와 기억은 이들의 목소리와 정신이 결코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자연과학대학을 빠져나가 도착한 마지막 장소, 농업생명과학대학의 식당으로 내려가는 계단 중턱에서 오래 기다렸을 두 열사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김상진 열사(축산 68), 이동수 열사(원예 83)다. 각각 1975년 4월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에, 1986년 5월 전두환 정권의 유신 체제에 저항한 두 열사는 10년 가까이 되는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종류의 폭력에 저항했다. 민주주의를 되찾고 난 뒤 새로운 적이 등장해 다시 탈취당하고, 그 적에 대항해 다시 민주주의를 구해내는 순환이 30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학생들은 선대를 이어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이 목소리가 지금은 조형물의 형태로 캠퍼스에 남아 있다.
기억하고자 했던, 기억하려는 사람들
민주화의 길을 걸으며 만난 19명의 열사가 관악 캠퍼스에서, 민주화의 길에서 기억되기까지 누가 그들을 기억했고 또 그 기억을 이곳에 새긴 것일까. 당시 ‘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교수연구자협의회(민교협)’ 회장이자 민주화의 길 조성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조흥식 명예교수는 각 열사들을 기리는 기념사업회뿐만 아니라 그들을 기렸던 당대 학부생들이 기억을 새겨 넣었다고 설명했다.
민주화의 길에 놓인 추모비와 조형물 등은 각 열사를 기리는 기념사업회 측에서 만든 것이 대부분이지만, 당시에 모든 열사를 대상으로 하는 기념사업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념사업회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을 기억하는 학부생과 동창회는 그들을 새겨넣었다. 조흥식 명예교수는 학내에 흩어져 있던 추모비를 이전하고 유가족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당시를 회상하며 “열사가 속했던 학과에서 학생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작은 추모비를 세운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인문대학 앞에서 만났던 박혜정 열사와 농업생명과학대학 앞에서 만난 이동수 열사의 추모비가 그것이다. 두 추모비의 규모는 다른 추모비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학생운동조직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그렇지만 세상에 저항했던 열사들은 당시 언론에 의해 ‘비운동권’이라 칭해지며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당대 학생들만의 기억으로 남게 될 수도 있었던 열사들은 학생들이 세운 추모비를 통해 같은 학과 내에, 나아가 학교 전체에 새겨졌다.
잔음이 흩어지기 전에
민주화의 길은 조성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았다. 민주화의 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많은 유가족들이 도움을 줬고, 타 대학 소속이었던 이한열 열사의 모친도 관심을 가지고 다른 유가족들에게 사업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도움을 더했다. 교수진들도 조감도를 그리고 조형 디자인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다. 조성 이후 홍보를 위한 팸플릿도 제작됐고, 민주화의 길을 소개하는 기성 매체와 민주화 기념사업회의 보도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0년 이후로 민주화의 길은 점점 관심을 잃어갔다. 조흥식 명예교수는 “정권이 여러 번 교체됐고, 그 과정에서 학내 분위기도 계속해서 변화했다”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민주화의 길이 출범 당시의 화제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서울대의 법인화와 더불어 빠르게 전환되는 학내 분위기 속에서 민주화의 길이 가진 입지가 흔들려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대학 본부 또한 민주화의 길에 거의 관심을 끊은 상황이다. 2022년부터 본부에서 배포 중인 홍보 책자에도 민주화의 길과 관련한 내용은 빠져 있다.
민주화의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지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우선 학부생들이 민주화의 길의 존재를 인지해야만 이 기억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조흥식 명예교수는 “서울대에 민주화를 위해 기여한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민주화의 길이 가진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밝히며 이를 위해서 “학교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학생들이 주도해 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학생들이 민주화의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눠야만 후대 학생들에게까지 민주화의 기억과 역사가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길은 서울대 내부에서 있었던 투쟁의 기록이자 나아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했던 수많은 학생들의 투쟁의 증명이다. 민주화의 길이 잊힌다는 것은 이 기억과 정신들 역시 그저 역사의 한 흐름으로 치부된다는 것과 같다. 민주화의 길은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이 도사리는 현대 대한민국에서 가장 필요한 정신과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들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역사를 잊으면, 다시 한번 투쟁해야 할 때가 왔을 때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 역사를, 나아가 투쟁의 정신을 다시금 새기기 위해서라도 민주화의 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올해로 15주년을 맞이한 민주화의 길, 그 위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잔음에 귀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