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만이 확실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4)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터 ©네이버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터 ©네이버 영화

※본 기사는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된다. 화면은 수직으로 올려다본 하늘로 채워진다. 그 하늘 앞에서 무수히 많은 갈래로 숨 쉬고 있는 나무들이 차례로 담긴다. 무성한 잎이 달린 장성한 나무들과 몸의 음영이 그대로 드러나는 앙상한 나무들이, 카메라 움직임에 따라 존재감을 표출한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도 역동적이며, 침묵하면서도 술렁거린다. 그야말로, 숲은 웅성거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웅성거림은 한 여자아이가 걸어들어오면서 급작스럽게 끝나버린다. 아이의 눈 밟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공허한 공간으로 한순간에 변모한 숲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비로소 시작된다.

악이 존재하지 않듯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예기획사 플레이모드의 직원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중소기업 코로나19 보조금을 받기 위해 졸속으로 기획된 글램핑장 건설 계획을 담당하게 된다. 그들은 산골 마을에 해당 계획을 알리기 위해 설명회를 열지만, 정화조 규모와 위치, 산불 방지 대책 미흡 등을 이유로 마을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이를 타개할 방법을 강구하던 그들은 마을에서 신뢰받는 존재인 타쿠미의 자문을 구하고자 다시 한번 산골 마을에 찾아간다.

  전체적인 줄거리만을 놓고 살펴보면 일견 이 작품은 선명한 두 가치의 대립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자연과 사람, 시골과 도시, 선과 악의 구조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구도는 자연에게 선이란 가치를 부여하거나 시골 사람을 곧 자연과 같은 위치에 놓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위험하다. 그러나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위의 이분법을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무너뜨린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은 존재한다’도 아니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건 선이다’도 아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여주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과 사람을 담는 연출에서 보다 선명히 드러난다. 본래 영화에서 자연물은 풍경 내지는 배경으로 기능한다. 모든 창작물이 그렇듯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화면을 구성하는 주

(主)와 부(副)의 경계가 명확히 나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자연을 담듯 사람을 연출하고 사람을 담듯 자연을 연출한 화면이 연속되면서, 관객들이 점차로 자연다운 것과 인간다운 것의 경계를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네이버 영화

  가령 서두에서 언급한 오프닝 시퀀스에서 영화는 수직으로 올려다본 하늘을 아주 느린 롱테이크 쇼트로 보여준다. 카메라의 움직임을 따라 4분 가까이 공들여 보여지는 하늘과 나무는 어느 순간 더는 배경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것들이 지닌 불가해한 목소리와 생명력 넘치는 움직임에 주목하게 된다. 반면 타쿠미가 자신의 딸 하나가 다니는 학교에 도착하는 장면에선 아이들이 모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느라 정지해 있는 풍경이 연출되면서, 사람이 너무나 쉽게 배경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중요한 건, 자연이 의인화되거나 인간적 가치에 부합하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명화된 존재, 이성적인 존재, 조명받아 마땅한 존재 등 영화 안팎에서 사람이 독식하던 권력들을 자연이 탈취했다는 점에서 자연과 사람 사이 존재하던 이분법의 해체가 일어난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음향인 음악이 대체로 자연을 비출 때만 사용된다는 점 역시도 이 영화의 특이점이다. 배경음악은 풍경으로만 보이던 자연에 대한 인상을 동요하게 만드는 장치로 사용된다. 영화 내 설정 속에서도 음악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타쿠미는 피아니스트였던 아내의 죽음으로 음악을 잃은 반면, 자연물인 꿩 깃털은 음악 소리를 만들어내는 악기로 사용된다고 재차 언급된다. 인간이 상실한 음악과 공생하며 스크린에 비치는 자연은 인간보다 더 복잡하고 다면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존재’가 된다. 음악은 인물들이 등장하면 어김없이 급작스럽게 멈춰버린다. 마치 자연을 대상으로서만 인식하는 인간의 무신경한 시선에선 음악으로 드러나던 자연의 ‘존재’가 상실되고 만다는 듯이 말이다. 때문에, 인물들의 등장은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언제나 어딘가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과 사람의 경계가 무너지듯, 시골과 도시의 경계도 무의미하다는 걸 영화는 금방 드러낸다. 글램핑 사업 계획 설명회에서 산골 마을의 주민들이 직접 고백하듯, 산골 사람들 역시 자연의 입장에선 모두 이방인에 불과하다. 이사 온 지 몇 년 되지 않은 사람들부터 20세기 중반 토지개척 때 이주해 온 사람들까지 사실 그들도 마을에 터를 잡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도 선도 모두 사람들이 임의로 정해둔 경계선에 불과하기에.

강물, 흘러 들어온 물과 흘러 나갈 물의 무수한 연쇄

  영화는 강물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다룬다. 물맛이 좋아 이사를 온 사람이 있을 정도로 물은 마을의 자랑이요 포기할 수 없는 정체성이다. 그래서 연출에서도 강물의 이미지가 여러 가지로 변주되며 다양하게 그려진다.

  강물은 흘러 들어오는 물과 흘러 나가는 물의 무수한 연쇄로 이뤄져 있다. 이는 상대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는 정의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강물을 마시고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다. 즉, 존재의 의미가 전복되고 악과 선이라는 절대적 가치가 상실됐을 때 중요한 것은 순환하는 강물이 다음 물결에서도 자정할 수 있는 정도를 지키는 것이다.

▲©네이버 영화

  산골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때 보통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운다. 반면 도시 속에 위치한 연예기획사 플레이모드에서 타카하시와 그의 상사가 담배를 피울 때는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운다. 그러나 다 같은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진 않는다. 타카하시는 창 쪽으로 가 담배를 피우거나 비흡연자인 마유즈미를 고려하는 반면, 상사는 자기 자리에 앉아 그대로 담배를 피운다. 도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위치에 놓이지는 않는 것이다. 이렇듯 담배를 통한 비유에서 우리는 산골과 도시 속 여러 사람들이 각자 어디서 강물을 마시고 있는지,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물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상류와 하류는 나눠진다. 선행하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상류에 위치할 것이고, 후행하는 물을 마시게 되는 사람은 하류에 위치할 것이다. 그리고 수질에 큰 타격을 받는 건 하류다.

  이러한 상류와 하류의 구도는 영화 전체의 구도와도 동일하다. 상사의 명령에 따라 산골로 내려온 타카하시와 마유즈미, 그리고 그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에게 문제점을 항의하는 산골 사람들이라는 순차적 구성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의 흐름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마을 사람들도 이미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설명회에서 “문제는 균형이야.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져”라거나,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미쳐”라고 발언하면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전달한다.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판가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 역시 말단 직원인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도시 생태계에서 살아남고자 보조금을 받으려고 아등거리는 중소 연예기획사가 절대적 악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각자의 위치에서 강물을 받아 마시는 주변 존재들을 인지할 필요가 있음을 피력할 뿐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 상류와 하류라는 이분법이 언제까지고 유효한 것은 아니다. 상류와 하류란 개념 그 자체가 상대적인 위치를 말하고 있는 임의의 개념일뿐더러 물의 속성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득한 시선에서 물은 순환하고 있으며, 역류하거나 기화할 수 있는 유동적 존재다. 결국, 상류와 하류란 상대적 위치 역시 너무 쉽게 전복될 수 있다. 영화는 시각적으로 이를 계속 인지시킨다.

  영화는 순환하고 유동하는 물의 이미지로 수증기를 활용한다.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타쿠미와 함께 마을의 우동 가게에서 끼니를 해결할 때, 화면은 우동을 만드는 장면에 잠시 집중한다. 끓인 물에서 생성된 수증기는 한없이 올라가다가 천장에 부딪혀 옆으로 이동하고, 그 수증기 끝에는 우동 가게 주인이 위치한다. 카메라는 가게 주인의 시선을 따라 다시 내려오고, 그가 우동을 완성하는 과정을 마저 관찰한다. 하강을 상징하던 물이 수증기란 상태로 변모해서 올라가고, 벽을 만나 옆으로 이동하는 그 끝에 산골 마을 사람이 위치하고 있는 것은 물에서 상하의 위치가 얼마나 쉬이 흔들릴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해서 수증기는 물에 부여된 하나의 가치를 부정하는 이미지로도 사용된다. 마을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로서 물이 갖는 치유적 이미지와 산불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인 불이 갖는 파괴적 이미지가 함께 결합할 때 비로소 수증기가 생성되므로, 결국 수증기는 선도 악도 아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마을 뒷산은 안개로 뒤덮인다. 이때 화면 속의 안개는 희뿌열 정도로 강한 물의 이미지와 더불어 산불이 났을 때 뒤덮이는 연기의 이미지를 동시에 암시한다. 해가 지면서 생긴 노을은 산을 습기가 가득하면서도 산불로 뒤덮인 듯한 동시적 이미지로 그려낸다.

두 손에 담은 시냇물만으로 강물을 상상할 수 없다

▲©네이버 영화

  아무도 절대적 위치를 점유할 수 없는 물의 흐름처럼,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들은 모두 역동성과 즉흥성 내에서 서로에게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다. 영화의 말미는 실종된 타쿠미의 딸 하나를 수색하는 과정으로 이뤄져 있다. 손을 다친 마유즈미를 제외한 타쿠미와 타카하시는 늦은 밤에도 수색작업을 지속하고, 이내 총에 맞은 사슴과 대치 중인 하나를 발견한다. 앞서 타쿠미가 야생 사슴 중 총에 빗맞은 사슴과 그 가족만이 인간을 공격한다고 말했기에 타카하시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 하나를 구하려고 달려간다. 그러나 타쿠미는 갑자기 타카하시를 공격하고, 그가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가 돼서야 놓아준다. 그동안 사슴은 사라지고 없고 하나는 코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 타쿠미가 그런 하나를 안고 한없이 숲을 달려 나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해당 장면은 관객들에게 당혹감과 질문을 남긴다. 서사의 개연성을 생각한다면 타쿠미는 하나를 구하러 달려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타카하시를 공격하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영화의 의미를 완성하는 키워드다. 

  타쿠미의 선택으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모든 점에서 불확실해진다.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왜 공격했는지는 물론 타카하시의 생존도, 하나의 생존도, 사슴의 생존도 모두 확실하지 않다. 심지어 사슴이 하나를 공격했는지조차 모호하다. 하나와 사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타쿠미와 타카하시의 싸움 장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공백들을 채우는 건 관객의 임의적 판단과 상상이지만, 그마저도 영화는 그다지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모든 것을 불확실하고 생경한 상태로 남겨두길 바란다. 세상을 메꾸고 있던 이분법을 지우고 낯설게 바라보게 만드는 이제까지의 작업이 유효할 수 있게, 명쾌한 해석과 도덕 판단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결말을 거부하는 것이다.

  타쿠미는 하나를 안고 숲을 가로지른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더불어 다시 수직의 하늘이 펼쳐진다. 오프닝 시퀀스와 동일한 구도의 쇼트 속에서 흘러가는 하늘과 나무들은 마치 강물과도 같다. 그러나 이는 카메라가 임의로 정한 물결일 뿐 숲의 흐름은 정해져 있지 않다. 타쿠미가 흘러가고 있는 그 방향도 정말로 하나를 살릴 수 있는 길로 향하는지 알 길이 없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듯한 나무들이 끝없이 연쇄되는 공간에서, 누구의 생존과 죽음도 불확실한 그 시간에서, 어느 순간 타쿠미의 질주가 멈춘다.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요인은 무엇인가. 하나의 생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하나의 죽음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삶과 죽음은 과연 구분될 수 있는 상태인가. 무엇 하나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숲만을 목도한다. 우거진 가지들 틈 속에서 쏟아지는 그 웅성거림은, 역시 무엇 하나 알 수가 없다. 불확실함만이 확실히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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