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구현은 핑계고

미디어상 사적 제재,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건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는 외침이 만화 밖 현실에도 울려퍼지고 있다. 다만 그 주체는 검찰도, 경찰도 아닌 개인이다. 국가 또는 공공의 권력이나 법률에 의하지 않고 개인이나 사적 단체가 범죄자에게 벌을 주는 일, 이른바 사적 제재 이야기다. 사법 기관에 대한 불신 탓에 가해자를 직접 찾아 나서는가 하면, 십수 년 전의 범죄자가 죗값을 충분히 치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늘날의 신상을 유포하기도 한다.

  다시,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는 주문을 살펴보자. 사적 제재로 구현되는 정의란 무엇일까. 또 용서의 주체와 객체는 누가 정하는 걸까. 목적도 대상도 모호한 사적 제재에 대중들은 왜 열광하는 걸까. 미디어의 발달로 누구나 손쉽게 ‘나락’에 가고 또 보내는 사회에서, 사적 제재의 양상과 해악을 짚어봤다.

사적 제재에 열광하는 대중들

  법치 국가에서 사적 제재는 불법이다. 공인된 형사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살해나 감금, 폭행은 부당한 폭력에 불과하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민감한 개인정보를 알아내 공개하는 ‘신상 털기’ 역시 마찬가지다. 형법 제307조는 공연히 사실이나 허위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면 처벌이 가능하다 명시하고 있다. 정보통신망법 제70조 또한 비방을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사실 또는 거짓을 드러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면 징역 또는 벌금에 처한다고 밝히고 있다.

  법적으로 엄격하게 금지된 반면 사적 제재에 대한 대중의 법감정은 다소 호의적이다. 이를 방증하듯 사적 제재를 소재로 한 미디어 콘텐츠는 활황이다. 학교폭력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담은 드라마 《더 글로리》(2022), 억울한 사람들의 복수를 대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모범택시》(2021), 그리고 범죄자를 직접 심판하길 자처하는 경찰대생이 나오는 드라마 《비질란테》(2023)까지. 김선영 평론가는 〈시사IN〉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와 같은 콘텐츠들에 대해 ‘주인공은 단지 억울한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보호와 구제를 받지 못한 약자의 대변자로 그려지고, 그의 복수는 정의의 대리 실현적 의미를 띤다’고 평했다. 사적 제재가 인기를 구가하는 배경엔 공적인 사법 체계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자리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사적 제재를 소재로 한 미디어 콘텐츠들. 위부터 차례대로 《더 글로리》(2022), 《모범택시》(2021), 《비질란테》(2023) ⓒ스튜디오드래곤, 스튜디오S, 스튜디오N
▲사적 제재를 소재로 한 미디어 콘텐츠들. 위부터 차례대로 《더 글로리》(2022), 《모범택시》(2021), 《비질란테》(2023) ⓒ스튜디오드래곤, 스튜디오S, 스튜디오N

  대중들이 사법 체계를 못 미더워하는 이유는 뭘까. 고려대 송효종 교수(사회학과)는 판결의 신속성과 형량이 대중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송 교수는 “기소부터 판결에 이르는 과정이 굉장히 긴 데다 판결 또한 1심에서 3심까지 거치다 보면 대중이 원하는 속도로 가해자에 대한 정의가 구현되진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형량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과거와 달라졌다며 성범죄를 예로 들었다. 송 교수는 “가볍게 치부되던 과거에 비해 성범죄에 대한 민감도가 달라졌다”며 “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법이 제대로 쫓아가지 못하면 사적 제재에 대한 열망이 생기기도 한다”고 짚었다.

  사적 제재에 호응하는 심리의 기저엔 개인이 해결자보다는 방관자에 머무르도록 종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리한다는 분석도 있다. 미디어상에서 누군가 제작한 사적 제재 콘텐츠에 ‘좋아요’와 공감을 표하는 것만으로도 가해자를 단죄하는 데 손쉽게 기여할 수 있다. 최소한의 품을 들여 정의의 편에 설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표창원 프로파일러는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나 교육은 학교폭력과 같은 범죄를 목격해도 “참아라,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하면 그때 도와주라”며 절대다수를 방관자로 성장하게 한다’며 ‘대다수의 사람이 마음 한쪽에 죄책감을 가진 상황에서 사이버 렉카들이 가해자를 처벌하겠다고 나서면 마치 내가 진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다.

  최근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이 다시금 조명되고 있다. 2004년 경남 밀양시에서 고등학생 44명이 중학생 1명을 대상으로 1년 동안 집단 성폭행을 가한 참극이다. 가해자 중 단 7명만 구속됐으며, 단 한 사람도 실제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고등학생이라 아직 미성숙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을 수 있다는 게 재판부의 참작 사유였다.

  이후 20년이 흘러 지난 6월, 유튜버 나락 보관소가 가해자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영상을 게시했다. 턱없이 불충분한 형량과 더불어 가해자들의 지극히 평온한 일상이 알려졌다. 사적 제재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재점화됐다. 그 중심엔 누구보다 재빠르게 사건·사고를 퍼나르는 이들, 사이버 렉카 유튜버가 자리한다.

사적 제재를 견인한다, 사이버 렉카

  사이버 렉카는 사건·사고가 일어나면 쏜살같이 달려들어 미디어 콘텐츠를 만든다. 교통사고 발생 시 사후 처리를 위해 앞다퉈 출동하는 견인차(Wrecker), 일명 렉카차와 행태가 유사해 사이버 렉카라 명명됐다. 중앙대 이신행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는 2022년 논문에서 사이버 렉카를 ‘다양한 영역에서 이슈 혹은 논란이 된 각종 사건·사고들에 대해 관련 정보를 재구성해 전달하거나 비판하는 영상 콘텐츠를 제공해 유튜브 사용자의 시청과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상업적 이득을 취하는 크리에이터와 커뮤니티 사용자들을 일컫는 멸칭’이라 정의했다.

  사이버 렉카도 주요 콘텐츠에 따라 분류해 볼 수 있다. 먼저 일상적인 말이나 행동을 과장하거나 확대 해석해 논란거리를 만들고 편견을 씌우는 이들이 있다. 재작년 초 배구선수 故 김인혁 씨와 인터넷 방송인 故 잼미가 잇따라 사망했다. 고인들은 생전 사이버 렉카 콘텐츠가 촉발한 악성 댓글과 루머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유명인의 자살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사이버 렉카의 근거 없는 의혹 제기가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답한 비율이 59.3%에 달하기도 했다.

  반면 인물의 신상정보를 털어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이버 렉카 유튜버도 있다. 이는 오늘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사적 제재의 유형이기도 하다. 송효종 교수는 “사건과 관계없는 제3자가 온라인을 통해 가해자의 신상정보를 유포하는 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사적 제재의 의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때 핵심은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제3자에 의해 신상 유포 등 일련의 제재가 행해진다는 것이다. 피해자에 의한 사적 제재는 형법상 정당방위나 민법상 자력구제에 해당할 수 있다. 법적인 처벌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남은 셈이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김대근 연구위원은 〈중앙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피해자 본인이 방어를 위한 행위로서 사적 제재를 했다면 형법상 정당방위나 정당행위가 성립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3자에 의한 사적 제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표창원 프로파일러는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제3자에 의한 사적 제재는 어떤 국가든 선처나 감경을 하지 않는다’며 ‘윤리적·법적 정당성 측면에서 모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법에 저촉될 위험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이버 렉카들이 나날이 활개를 치는 배경엔 그들의 수익 구조가 있다. 사이버 렉카 콘텐츠를 활용한 돈벌이는 초기 자본이 거의 들지 않는 장사에 가깝다. 구독자 약 95만 명의 사이버 렉카 유튜버 성제준은 재작년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장사를 하면 건물 임대부터 시작해서 현물적인 게 많이 들어가고 기간도 오래 걸리지만, 유튜브는 아예 그런 게 존재하지 않아 빠르게 수익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유튜브에선 무엇보다도 이용자들의 호응과 관심을 끄는 게 중요하다. 이는 조회 수와 댓글량 등의 지표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곧 광고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콘텐츠가 더 많이, 더 널리 공유되고 시청될수록 수익도 늘어나므로 사이버 렉카 유튜브는 흥미롭고 자극적인 문구와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실제로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사이버 렉카 콘텐츠를 보는 이유에 대해 응답자의 59.2%가 ‘제목·썸네일이 눈길을 끌어서’라고 답했다.

▲흥미롭고 자극적인 문구와 이미지를 활용한 사이버 렉카 유튜브 썸네일 ⓒ빈채현

  댓글 창에서 어떤 논의와 담론이 형성되는지, 혐오 표현은 없는지 등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신행 교수는 2023년 저술한 논문에서 ‘익명의 사이버 렉카에겐 댓글 게시판의 건전성 규범을 유지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얻어지는 이득보다 댓글 생산량 증가 자체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을 때 경제적으로 얻어지는 이득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해당 논문에서 사이버 렉카 콘텐츠의 소재가 사회적 혐오의 대상에 속할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악성 댓글의 양이 더 증가함을 밝혀내기도 했다. 가령 여성 연예인의 언행을 근거로 페미니스트라 낙인을 찍고 대중의 여성 혐오 정서를 자극해 사회적 멸시와 배제를 부추기는 식이다. 사회에 만연한 혐오 정서가 댓글 창을 필두로 증폭되고, 사이버 렉카는 이를 악용한 콘텐츠로 수익을 거두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우리가 사적 제재에서 눈을 감는 건

  사안에 대한 윤리적 성찰 없이 오로지 사익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할 때, 한 사람의 존엄이 무참히 짓밟히기도 한다. 지난 7월 유명 유튜버 쯔양의 과거사가 공개됐다. 앞서 사이버 렉카 유튜버 가로세로연구소는 또 다른 사이버 렉카 유튜버 구제역과 주작감별사가 주고받은 통화 녹취록을 공개했다. 해당 통화엔 구제역과 주작감별사가 쯔양의 과거를 폭로하지 않는 조건으로 쯔양에게서 금품을 갈취했단 정황이 담겨있었다. 이에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 쯔양 본인이 직접 전 애인에게 착취와 폭행을 당한 과거를 밝혔다.

  천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쯔양의 파급력만큼이나 사건의 파문도 컸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수익 창출과 영리 목적으로 혐오를 조장해 유명인과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극심한 명예훼손과 모욕을 가하는 사이버 렉카의 범행에 엄정하게 대응하고 범죄수익을 박탈하라”고 주문했다. 국회에서는 타인을 비방하는 영상을 제작한 사이버 렉카를 가중 처벌하거나 이들의 수익을 원천 몰수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우후죽순으로 발의됐다.

  쯔양은 교제 폭력을 당했단 사실 자체를 밝히기 꺼렸다. 쯔양의 전 애인은 금품 착취와 더불어 동의 없이 촬영한 불법 영상을 구실로 협박을 일삼기도 했다. 내밀한 과거사 폭로를 빌미로 협박을 일삼는 행위가 악질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이버 렉카의 협박과 착취가 성립할 수 있었던 건 피해자에 공감하기에 앞서 불법 영상을 흥미 위주로 소비하는 여성 혐오적 분위기에 그 책임이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이한 활동가는 〈여성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쯔양은 애초 협박으로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당하며 착취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숨기고자 했고, 강압에 못 이겨 한 일에도 연신 사과했다’며 이는 ‘우리 사회가 여성의 성을 대상화하고, 여성에게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사건의 공론화부터 형사 절차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피해자의 동의 없이 시작됐다는 점도 문제적이다. 가로세로연구소의 폭로는 쯔양과 상의 없이 이뤄진 일이었다. 쯔양의 법률 대리인 김태연 변호사는 〈YTN〉 라디오 방송에서 “사전 협의 없이 유튜버 구제역 등의 녹음 파일이 공개되면서 본의 아니게 쯔양 쪽 입장이 반영되지 않았다”며 “사실관계 확인과 예고가 없어 의견을 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익 추구에만 골몰한 나머지 피해자의 목소리가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또다시, 제3자에 의한 사적 제재가 야기하는 해악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건

  누구나 공분할 만한 사건이 불거졌을 때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만 혈안이 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진정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심리에서 기원한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송효종 교수는 가해자를 비난하는 행위가 “자신의 정상성, 즉 ‘나는 그래도 모범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릇된 일이 실질적으로 바로잡히길 기대하기보다는, 가해자를 악마화하고 배제함으로써 안정감을 얻는다는 설명이다.

  다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더불어 적절한 교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화여대 권태상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누구나 심정적으로는 가해자를 사회에서 격리하고 싶고, 그가 자기 집에서 멀리 떨어진 데 살길 바랄 것’이나, 이는 100% 가능하지 않다고 짚었다. 또한 권 교수는 가해자들이 ‘이런 식으로 몰리다 보면 화풀이 범죄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송효종 교수 역시 “가해자를 단순히 비난하기만 하면 사건을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효과가 있다”며 “가해자가 다시 사회로 돌아왔을 때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논의하는 게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고 짚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피해자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를 지원해 온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소장은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만이 정의 구현은 아니라며 ‘피해자가 우리 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역시 정의를 바로 잡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건이 재조명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고통 받을 수 있기에 ‘피해자가 “내 뜻이 아니다”라고 하면 존중하고 반영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가해자 신상 공개에 앞서 피해자 가족 측의 동의를 얻었다는 유튜버 나락 보관소의 말이 거짓임을 밝혔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보도자료

  사적 제재를 둘러싸고 경계해야 할 지점은 사실 검증이 어렵단 점이다.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의미 없게 만들어 모든 논의를 사실상 무화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다. 대중의 공분이 향하던 가해자가 사실상 무고한 시민일 수 있다. 충분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은 공론화 초기,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건 폭로자의 목소리뿐이다.

  지난 1월 대법원은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의 신상을 제보받아 공개하는 ‘배드파더스’ 홈페이지의 운영자에게 명예훼손죄로 인한 벌금형을 선고했다.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사실 검증 가능 여부였다. 대법원 판결문엔 ‘신상정보 공개 글 게시 여부는 사실관계에 대한 쌍방의 확인 내지 검증 없이 양육비채권자의 일방적 제보 및 자료 제공에 따라 결정’됐고 이에 ‘일부 피해자(양육비 미지급 부모)의 경우 개별적 사정이 반영되지 않은 채 신상정보가 공개됐다’고 명시됐다. 진위 파악 장치가 부재한 상태에서 개인의 신상정보를 공개해 수치심을 안겼기 때문에 공익보다는 비방의 목적이 더 크다는 취지였다. 비방성 유무는 명예훼손죄의 핵심 성립 요건이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의 신상을 제보받아 게시하는 ‘배드파더스’ 홈페이지 ⓒ’배드파더스’ 홈페이지 캡처

  사실 검증의 불가능성에서 기인하는 위험은 사이버 렉카에 의한 신상 공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경찰대 한민경 교수(행정학과)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튜버가 검증받지 않은 날것의 정보를 알리면서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마구잡이로 유통되고 있다’며 ‘잘못된 정보가 확산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거나 피해 당사자의 정보가 유출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전통적으로 사실 검증과 주요 의제 설정의 역할을 수행해온 기성 언론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민주언론시민연합 신미희 사무처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튜버들의 일방적 폭로와 다르게 사실 확인과 검증이라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언론의 책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누구나 정의로운 세상을 꿈꾼다. 잘못을 저지르면 마땅한 벌을 받고, 약자에겐 언제고 비빌 언덕이 있는 세계. 하지만 막상 들여다본 저마다의 이상향은 모양도 크기도 다르다. 마땅한 벌의 크기부터 단죄와 구제의 우선순위, 그리고 형벌을 가할 권위의 소유자까지. 단일한 정답도, 명쾌한 해법도 없다. 무엇이 가장 알맞고 올바른지 찾아가는 과정은 지난하기만 하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나의 정의만 옳다는 고집으로 타인의 외침에 귀를 닫으면 지금껏 쌓아온 논의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 힘에 부친 나머지 숙의와 성찰을 포기할 때 남는 건 특정인을 악마화해 ‘나락’으로 보내는 선택지다. 손쉽고 간단하지만 잔혹하고 비가역적인 그 길을,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가장 나중으로 미뤄야 하지 않을까.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취소한 것은 취소할 수 없다

Next Post

1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