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구에 뿌리내려 살아가는 한 김씨 집안. 장남 ‘태근’과 며느리 ‘수희’가 부모인 ‘승필’과 ‘말녀’를 모시고 사는 집으로 3대 대가족이 모인다. 서울에 사는 장손 ‘성진’은 물론이고, 출가해 대구에 사는 성진의 누나 ‘미화’와 매형 ‘재호’, 첫째 고모 ‘혜숙’, 곧 베트남으로 이민을 가는 둘째 고모 ‘옥자’네 부부까지. 이들이 일제히 대구의 본가를 찾은 이유는 하나다.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장손》은 반년 여에 걸친 시간 동안 이 가족에게 벌어진 일을 담은 영화다. 그러나 관객에게 허용된 시간은 3대에 걸친 가족들이 본가에 모인 단 며칠이다. 온 가족을 대구로 모은 것은 다름 아닌 제사와 장례식, 49재라는 가족의 의례들이다. 가족을 가족으로 만드는 의례들은 무엇보다 성진을 장손의 위치로 소환한다. 영화는 여름과 가을, 겨울까지 세 계절의 풍경 위에서 펼쳐지는 가족 의례를 통해 변화하는 가족의 모습을 그려낸다.

여름, 가부장제의 풍경
명절이면 반복되는 익숙한 풍경이 있다. 할머니 말녀부터 손녀 미화까지 3대에 걸친 여자들이 부엌에서 쉴 틈 없이 나물을 다듬고 전을 부친다. 말녀는 한여름 찜통더위에 땀 흘리며 일하면서도 에어컨 좀 틀자는 미화의 말을 못 들은 척한다. 그러나 곧이어 성진이 도착하자, 그 즉시 “우리 성진이 왔다”며 더운데 먼 길 온 손자를 위해 에어컨을 가동한다. “일은 안 하고 먹을 줄만 아는” 남자들과 그들에게 먹일 것을 준비한 여자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옛날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는다.
제사는 꼭 12시에 지내야 한다는 승필을 성진과 미화가 설득해 가족들은 조금 이른 시각에 제사상을 올린다. 3대 독자이자 장손인 승필, 태근, 성진이 한복을 입고 술을 따르고, 그 뒤로는 양복을 입은 사위들이, 제사상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는 여성들이 선다. 다 같이 절을 하는 엄숙한 순간, 속닥이는 목소리로 이어가는 시답잖은 대화 중에 참지 못한 웃음이 터진다.
영화는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관습이 너무나 매끄러운 질서로 작동하는 가족의 풍경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장손인 성진에게도 이 집안이 편히 쉴 수 있는 곳만은 아니다. 가업인 두부 공장을 승계하라는 압력은 몇십 년의 시차를 두고 태근에게서 성진으로 전해진다. 태근은 일견 성진에게 가업을 강요하는 듯 보이지만, 만취한 상태로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고래고래 내지르는 그의 말 속에서 관객은 태근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갔고, 학생운동을 하다 다리를 다쳐 귀향했고, 사진관을 여는 꿈을 가졌으나 본인의 의지와는 달리 두부 공장을 운영하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술에 취한 태근을 처리하는 가족들의 익숙한 대응은 태근의 주취 폭력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님을 짐작하게 만든다. 승필과 말녀는 인사불성이 돼 부인, 아들과 몸싸움하다 마루에 엎어진 채로 곯아떨어진 태근을 한심하게 보면서도, 편히 자라고 베개를 꽂고 선풍기를 틀어준다. 이것을 가족애라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랑이 누구에게 어떤 형태로 향하는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두부 공장을 이어받지 않을 거란 성진의 말에 화가 난 태근이 집 밖으로 나가버리다 재호의 바지에 뜨거운 국을 쏟았을 때, 3대 남자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화상 입은 재호를 둘러싼 가족들의 왁자지껄한 모습으로 해소되는 듯 진행된다. 영화는 “재호 불알 익었나 확인해 봐라”라는 말녀의 농담 섞인 말로 관객들의 긴장까지 일순간 누그러뜨린다. 다만 화상을 입은 것이 재호가 아닌 성진이었다면 말녀의 반응은 다르지 않았을까, 지울 수 없는 의문이 남는다.
대다수 한국 관객이 짙은 기시감과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지극히 한국적인 가족의 모습 속, 보편적인 공감을 사는 또 하나의 지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면은 더없이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같이 있어서 즐거운 정다운 가족의 순간들은 고루한 가부장제의 단면과 깨끗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가장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을 것 같은 가족을 사랑하기도 한다는 것. 그들의 존재가 나의 의미기도 하다는 것. 말 그대로 지긋지긋한 애증이다. 애증의 감정을 부분적으로 취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가족이란 운명에 싸움을 걸기란 그래서 더욱 어려울지 모른다. 단절하거나 순응하거나, 두 가지의 극단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쪽도 기꺼이 선택하지 못하고 나름의 균형을 찾으려 애쓰며 살아간다.
가을, 죽음 이후의 불안
여름의 조각을 이루는 모든 화기애애한 장면의 중심에는 말녀가 있었다. 모든 구성원에게 적당한 인력을 발휘하며 가족을 둥그렇게 모으는 구심점이었던 말녀는 이해 가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가족들은 다시금 대구에 모여 장례를 치르지만, 말녀가 없는 상황에서 가족은 더욱 불안해진다.
장례를 치른 직후부터 돈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시작된다. 곗돈에 관해 물으러 방문하는 친척들이 있고, 말녀에게 돈을 맡겼었다 주장하는 혜숙이 있고, 그들을 두고 도리도 없다고 말하는 태근과 수희가 있다. 갈등이 심화되며 가족들은 묻어뒀던 과거의 사건들을 꺼내기에 이른다. 다른 여느 가족처럼 이 가족에게도 누구도 입에 담지 않는 트라우마가 있고, 해결되지 못한 상처는 세대를 건너 가족을 떠돈다.
말녀의 매장 과정에서 이들은 승필의 부모 무덤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는 뜻밖의 사실을 마주한다. 무덤이 왜 비어 있느냐고 아무리 물어도 승필은 등 돌리고 침묵하기를 택한다. 가족의 위기와 허약성을 암시하는 듯한 장면이다. 승필의 부모가 한국전쟁 중 마을 사람들 대다수와 함께 학살될 때 승필만이 그 현장에서 도망쳐 나와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는 전사는, 나중에야 승필이 잠결에 꺼내는 이야기를 통해 밝혀진다. 여름날의 풀샷(Full Shot)에서 얼핏 지나가는, 온 마을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장면에는 그러한 배경이 있었다.

집안의 어른 승필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반공주의를 모두 거친 세대다. 영화는 한국의 현대사가 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남긴 신체적·심리적 외상 안에서,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회피로 대응하는 집안의 어른을 그려낸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이고 강퍅한 노년인 승필은 전쟁을 경험한 윗세대가 과거의 상처 속에서 자신의 과거와도, 자신과도 화해하지 못하며 소통 불가능한 존재가 됨을 보여준다.
승필이 보이는 이러한 모습은 한국 가족이 허약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읽힌다. 이는 승필이라는 한 개인의 선택이나 성격이라기보다도 그가 놓인 사회적 운명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일면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한 행동은 가족의 갈등을 회피하는 말녀의 모습에서도 되풀이된다. 태근이 주취 폭력을 휘두르던 밤, 영화는 마치 그것이 들리지 않는 듯 방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한글 연습을 하는 말녀를 유심히 지켜본다. 하나뿐인 아들이 하나뿐인 손자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침묵 외에 말녀에게 허용된 것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노년 세대의 문제는 아니다. 억압을 객관화·언어화할 자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이들이 관습적인 질서를 그저 받아들이며 살아야만 했을 때, 이는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는 또 하나의 축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유일하게 고등 교육을 받은 인물로 그려지는 태근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불만을 언제나 큰 목소리로 쏟아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겨울, 단절과 대물림
가족의 가업인 두부 공장은 대사뿐 아니라 화면상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흩어지고 뭉치며 두부가 제조되는 이미지가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이다. 콩이 풀어졌다 단단하게 모이며 두부로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가족이 언제든 해체될 수 있는 연약한 조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동시에 이 가족과 가족을 지탱하는 가부장적 질서가 끊임없이 재생산됨을 보여준다.
전문적인 노동으로 매일같이 완성되는 네모반듯한 두부는 서로 다른 개인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압착하는 사회의 모습을 상징한다. 두부 공장의 상호인 ‘대명(大命)’은 그렇기에 가족이라는 운명을 가리키는 말로도 읽힌다. 이 영화의 포스터 두 종류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와 ‘뭉치면 살벌하고 흩어지면 살만하다’는 문구가 짝을 이루고 있다. 가족에 대한 상이한 두 관점의 대립이 엿보인다.

태근도 성진도 두부 공장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괴로워했지만, 실은 누구도 이들이 두부 공장에서 일하기를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았다. 두부 공장은 가업이라기보단 자산이다. 그러니까 성진이 서울에서 하는 영화 일을 정리하고 대구로 내려와서 두부 공장을 물려받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장손에게 승계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두부 공장의 명의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이며 곧 권력이다.
소유권과 이윤이 장손에게 대물림될 때, 실제의 노동은 여성과 그들의 (김씨가 아닌) 남편들 몫으로 돌아간다. 다시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면, 두부 공장에서 땀 흘리며 노동하는 것은 수희와 재호다. 성진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기꺼이 성진 대신 맡는 것은 미화와 재호다. 이는 태근의 세대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것은 말녀와 혜숙 부부였을 것이며, 이 부부는 태근은 원하지 않는 두부 공장을 물려받기를 은근히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두부 공장의 명의는 결국 태근에게로 돌아가고, 혜숙의 남편 ‘병구’는 성진에게 삼촌 노릇을 하다 사고를 당한다. 장손은 큰물에서 성공해야 하니까, 누가 해도 그만인 두부 공장 일은 집안의 여자들과 사위에게 맡기지만, 승필은 처음부터 “김씨도 아닌 사람에게” 공장을 물려줄 생각은 없었다고 말한다.
혜숙은 병구를 보살필 자금으로 말녀에게 맡겨놨던 돈을 끝내 찾지 못한다. 말녀의 명의로 된 어느 통장에도 혜숙이 말하는 돈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혜숙은 가족을 떠난다. 태근이 두부 공장의 명의를 물려받을 때 혜숙의 몫으로 돌아간 허름한 집도 스스로 불태운다. 자신이 돌아갈 곳을 완전히 없애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혜숙을 소외시킨 권력은 가족의 비밀이란 형태로 성진에게 계승된다.
성진은 혜숙과 병구를 위해 카네이션을 사서 병원을 찾지만, 이내 그가 병구의 꽃 알레르기도 몰랐다는 점이 드러난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의 삐거덕거리는 대화 끝에 성진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다. 고모 내외를 부모처럼 생각하며 따랐다던 성진이 이렇게 그들로부터 도망치게 될 때까지의 변화는, 영화 전체에서 드러나는 성진의 변화와 평행을 이룬다.
성진은 이 집안에서 분명히 껄끄러움을 느끼지만, 점차 집안의 다른 장손들과 유착하며 장손의 계보를 잇게 된다. 여름날의 성진은 분명 이 가족의 외부자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관객은 성진이 어쨌거나 ‘장손’이라는 점을, 즉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비밀스러운 수혜를 받는 자라는 점을 알게 된다.
승필과 태근의 절뚝이는 걸음걸이는 그들이 겪어낸 현대사의 곡절을 짐작케 하지만, 겨울의 끝 무렵 성진이 발을 다치는 순간 이들의 걸음걸이에는 다른 의미가 더해진다. 발바닥에 상처를 입어 다리를 절뚝이며 걷는 성진의 모습은 그가 가부장제하에서 권력을 부여받은 남성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암시한다. 자신은 할아버지와도 아버지와도 다르다고 생각했을 성진은, 그렇게 그토록 거부하고 싶었던 장손이 된다.
봄을 기다리며
영화의 마지막에서 승필은 눈이 오는 산으로 걸어가고, 미화는 아이를 낳는다. 윗세대는 퇴장하고, 새로운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혜숙이 지어줬다는 그 아이의 이름은 ‘늘봄’이다. 미화는 “늘 봄처럼 활기차라고 큰고모가 지어줬다”고 말한다. 장손의 손위 누이이자 장녀로서 미화와 혜숙의 연결은 혜숙과 성진의 망가진 관계와 명백한 대비를 이룬다.
“아버지, 어머니만 돌아가시면 제사 그만 지내자”는 아주 익숙한 말은 영화에선 혜숙의 대사로 등장한다. 제사는 한국 가족 의례의 핵심으로 여겨지고, 흔히 우리는 고집을 부리는 윗세대만 사라지면 이 괴로운 굴레도 떨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가부장제가 대물림하는 남성 권력은 그리 간단히 과거의 문제로 봉인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제는 가족 또는 과거와 단절과 회피가 아닌 관계를 모색해야 할 때일지 모른다.
윗세대가 퇴장한 후, 다음 세대의 가족은 어떤 모습일 것인가. 세 계절의 풍광을 너무나 아름다운 촬영으로 담아낸 이 영화가 미처 제시하지 못하는 봄의 풍경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영화는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서 마무리되지만, 우리는 봄이 올 때까지 봄을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