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 이태원 참사 2주기, 유가족과 함께하는 서울대학교 간담회 개최

또 다른 희생 막기 위해 싸운 2년… 특별법 제정 이후의 과제는
▲간담회에 참석한 패널과 학생들

  11월 13일 저녁, ‘10·29 이태원 참사 2주기 유가족과 함께하는 서울대학교 간담회(간담회)’가 개최됐다. 간담회는 ‘서울대 이태원 참사 유가족 간담회 기획단’과 ‘기본소득당 청년·대학생위원회’가 공동주최했다. 기획단에 참여한 조성윤(사회복지 21) 씨는 “학내에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마음들이 많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다”며 “학내 구성원들의 마음을 모으고 가시화하기 위해 간담회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패널로 참석한 문성철 씨는 희생자 故 문효균 씨의 아버지, 정미라 씨는 故 이지현 씨의 어머니다. 문성철 씨는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전북지부장으로 전주에 있는 시민분향소를 대표하고 있다. 전북 김제에서 온 정미라 씨는 “안전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길거리 엄마 투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두 사람은 가족을 잃은 뒤 거리의 투사로 살아온 지난 2년의 기억을 술회하며 안전사회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했다. 이하는 간담회에서 오간 발언 내용.

▲발언하는 문성철 씨

  2년 전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그날을 우리 모두가 기억한다. 우리 또래의 희생자들이 막을 수 있던 참사에 휘말렸다는 소식에 모두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태원 참사 당일에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문성철 씨(문): 참사 당일엔 일찍 잠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8시 우리 아버님이 갑자기 집으로 찾아오셔서는, 효균이한테 전화했는데 용산경찰서에서 전화를 받는다고 하시는 거다. 덜덜 떨면서 서울에 있는 둘째에게 용산경찰서로 가보라 했다. 경찰들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동사무소에 가서 실종신고를 하라고만 했다. 동사무소에선 효균이가 이대 목동병원에 있다고 했다. 부상을 입어 입원한 줄로만 알고 병간호하러 올라갈 채비를 했다. 그러다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 효균이가 사망했다고.

  서울 장례식장에 도착해 아이를 데려가려 하니 사망진단서를 요구했다. 진단서를 어디서 떼야 하는지 물었지만 병원도 경찰도 공무원도 모른다고만 했다. 결국 그날 밤까지 아이를 데려오지 못하고 숙소에 있는데, 새벽 2시쯤 전화가 울렸다. 자기가 검사인데, 부검을 해야겠단다. 화가 나서 왜 부검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라고 따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유가족들 중에 검사라는 직위에 위협감을 느꼈는지 부검에 동의하신 분들이 있다. 그분들은 지금 가슴이 찢어진다.

 정미라 씨(정): 29일 밤 10시에 이태원 관련 속보를 봤다. ‘큰일이다’ 생각하면서도 내 딸이 거기 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못 했다. 내 아이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몇 개월을 살았다. ‘나 진짜 엄마 맞나’, ‘왜 그날 우리 애기한테 전화를 안 했을까’ 하는 생각.

  지현이는 그해 12월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부였다. 참사 이틀 전 집에 내려와 웨딩 촬영을 하고 가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참사 현장에는 지현이와 결혼할 사람, 친구 세 명까지 다섯이 있었다.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올라가다가 인파에 휩쓸렸다고 한다. ‘그때 지하철이 이태원역을 무정차로 지나갔다면’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구조 인력이 없는 상황에서 일반 시민들이 사람들을 하나씩 뽑아서 구출했고, 지현이도 그렇게 끌어올려졌다. 시민들이 지현이에게 응급조치를 해줘서 체온이 올라오고 의식을 조금 되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11시 넘어서 소방, 경찰 인력이 온 뒤로는 옆에서 돕던 시민들을 가드라인 밖으로 쫓아내고 의식 잃은 사람들을 길거리에 눕혀둔 채로 방치했다. 차라리 소방 인력이 오지 않았으면 지현이가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30일 아침 9시에 지현이 신랑에게 전화가 왔다. 어쩐지 전화를 받기 싫은 직감이 지나갔다. 전화를 받았더니 지현이 신랑이 막 우는 거다. 그걸 듣고 정신을 잃었다.

▲발언하는 정미라 씨

  진실을 밝히라는 유가족과 국민들의 요구에 경찰의 특수수사본부 수사와 국회의 국정조사가 이뤄졌다. 경찰 특수본 조사로 23명이 기소의견 송치, 6명이 구속 송치됐으나 정작 윗선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오세훈 서울시장, 윤희근 경찰청장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국정조사 또한 자료 제출 거부와 위증이 이어지며 참사의 진실을 채 밝히지 못하고 종료됐다. 경찰 수사와 국정조사를 지켜보시면서 어땠는지, 답답했던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 특별수사본부에서는 유가족협의회를 완전히 배제한 상태로 수사 방향을 정했다. 우리가 피해자임에도, 수사 대상자에 관한 우리 의견은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 국정조사에서는 우리를 정치적 반대자로 몰고 조직적으로 2차 가해를 했다. 국정조사 반절이 정치 싸움이었고, 증인들이 나와서는 이상한 소리를 하거나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 사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줬다면 유가족들이 이렇게 답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수사본부가 유가족을 배제하고, 국정조사가 오히려 유가족들의 마음을 헤집는 걸 보면서 특별법을 통해 독립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찾기 위해 유가족과 국민들은 특별법 제정을 향해 함께 싸워왔다. 여당의 방해와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도 마침내 지난 5월 21일,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공포됐다. 특별법이 통과되는 과정을 어떻게 봤는지, 특별법을 통해 어떤 것들이 더 밝혀지고 어떤 과제들이 수행돼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에 5만 명이 동의했을 때는 이제 야당이 알아서 다 해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야당 국회의원이 우리에게 와서 말하더라. 국민들이 볼 수 있도록 이슈를 만들고 행동하라고. 그때부터 단식을 하고 삼보일배를 하니까, 국회의원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된 뒤 유가족들이 제출한 1호 진정서에는 9개의 과제*가 담겼다. 의문에 대한 답을 조사위원회를 통해 찾을 수 있으리라 희망을 걸고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안전한 사회에서 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①희생자 159명이 가족들에게 인계되기까지의 행적 ②2022년 핼러윈데이 인파 밀집에 대한 예견 및 대책 현황과 문제점 ③대통령실 이전이 참사 대응 관련 각 기관에 미친 영향 ④참사 전날 및 당일의 위험 신고에 대한 대응 및 전파의 적절성 ⑤참사 당일 현장에 배치된 경찰 운용의 문제점 ⑥참사 당일 구급활동 및 대응의 문제점 ⑦참사 당일 현장에 배치된 각 기관별 인원 및 역할의 적절성 ⑧피해자지원 체계 및 내용의 문제점 ⑨이태원 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모욕, 명예훼손, 혐오, 2차 가해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삼보일배 투쟁 ⓒ1029이태원참사시민대책위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그거 알아?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은 유가족이 만든 거야.” 사회적 참사가 반복되는 가운데, 유독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말이다. 유가족분들께서 걷고 계신 길이 우리 사회의 안전을 향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 지현이 동생이 셋 있다. 참사 이후로는 아이들이 잠깐 전화를 안 받기라도 하면 심장이 막 뛴다. 우리 유가족은 매일 그렇게 산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 불안감을 갖고 살면 안 되지 않나. 우리는 왜 이렇게 불안하게 살고 있을까. 불안하지 않게 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나라는 너무 안전하지 않은 나라다.

  지난 10월엔 정말 바빴다. 10월이 우리 유가족에겐 가장 힘든 달이기 때문에 일부러 일을 만들고 시민들을 만나러 다니기도 했다. 여러 지역 추모제에서 함께하는 시민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받았다. 우리 아이들이 억울하게 희생됐지만 우리를 응원해 주는 시민들이 많구나. 우리가 앞서 나가서 이 시민들을 위해 조금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우리 유가족이 싸우는 이유는 딱 하나다.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갔지만 여러분 같은 청춘들이 길거리에서 어이없이 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것, 그게 곧 삶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아이들이 없지 않나. 여기 있는 여러분이 우리 아이들과 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됐다.

  전북 전주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 전주합동분향소’가 차려져 있다. 전주에서 분향소의 설치와 유지가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 분향소를 차리고 운영하는 과정은 어떠했나. 분향소는 유가족에게 어떤 의미를 갖나.

 : 전주 풍남문에 분향소 문을 열었을 때 전주시에서 분향소를 없애라는 압력을 계속 넣었다. 어느 날은 경찰이 100명 가까이 왔다. 그때 우리 쪽은 유가족과 활동가 합쳐서 이삼십 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왜 경찰은 이런 때만 나서고, (참사 당일) 필요할 땐 없었나 생각하게 된다.

  분향소는 유가족들에게 생명의 공간이다. 분향소가 생기기 전까지 어디서도 죽은 아이에 대해 얘기할 수 없었지만 분향소에서는 아이들 얘기를 하루 종일 한다. 울다가도 갑자기 아이들 어릴 때 얘기를 하며 막 웃는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며 눈빛이 살아난다. 사람이 살아난다. 그러면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태원 참사와 참사 희생자들을 함께 기억하려는 시민들이 어떻게 힘을 보탤 수 있을까.

 : 많이 받는 질문인데, 답은 정말 쉽다. 추운 날 서울 분향소에 있을 때, 롱패딩을 입은 젊은 연인이 간식과 핫팩을 가족들에게 가져다준 적이 있다. 정말 따뜻했다. 우리는 오랜 시간 2차 가해를 들어왔기 때문에, 행진할 때 손 흔들어주는 것, 한번 웃어주는 것으로도 큰 힘이 된다. ‘아, 우리 편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 아마 정부에서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정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세월호 세대인 여러분이다. 특별조사위원회가 독립적인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여론을 만들고, 필요할 때는 우리 옆에 있어 달라. 이태원 참사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유가족들이 하는 얘기를 보여주길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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