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해방의 불꽃이 사그라들기까지

서울대 학생정치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다
▲6월 항쟁 당시 농성을 마치고 귀교하는 서울대 학생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어두운 굴종과 침묵의 나약한 지성 거부하고 민주주의 뜨거운 진실 온몸으로 노래하라 ―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열망이 관악을 뜨겁게 달구던 때가 있었다. 4.19 혁명과 5.18 광주항쟁(광주항쟁), 6월 민주화 항쟁(6월 항쟁)에서 불의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은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고 민주화와 진보를 앞당겼다.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때로는 생명까지 내놓으며 정치운동에 뛰어든 학생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제 이곳에 없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총학)를 상징하는 ‘민중해방의 불꽃’이라는 구호도, ‘사랑과 투쟁의 신새벽’으로 가자고 선동하는 총학생회가도 이제는 과거의 기억으로 남은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학생들의 정치가 수명을 다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화의 시대는 물론 그 이후에도 학생정치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시대에 따라 변모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지난 이들의 고민과 실천을 되돌아보며, 서울대 학생정치의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을 상상해 본다.

▲6월 항쟁 당시 농성을 마치고 귀교하는 서울대 학생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족·민주·민중의 선봉에서

학우여 이 땅의 민주주의가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파쇼 집단에 의해 무참히 난도질 당하고 대다수 국민 대중이 동물적인 생존을 강요당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이 나라를 진정한 민주국가로 이끌어 나가야 할 대학생으로서의 역사적 사명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광주항쟁 1주기에 서울대에 뿌려진 유인물

  1981년 5월, 김태훈 열사(경제 78)가 서울대 도서관 6층에서 “전두환 물러가라”를 세 번 외치고 몸을 던진다. 그날 행정관 뒤편 아크로폴리스에선 1년 전 광주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기리던 학생들이 경찰과 형사들에게 얻어맞으며 끌려가고 있었다. 경찰은 김 열사의 시신 주변으로 최루탄을 뿌렸지만, 분노한 학생들이 모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김 열사의 죽음은 서울대생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남았다. 이범연(역사교육 81) 씨는 김 열사의 죽음이 ‘나를 학생운동으로 강하게 끌어들인 결정적인 사건’이 됐다고 회고한다.

  80년대 학생운동에서 광주항쟁이 지닌 위상은 특별하다. 광주의 참상이 담긴 비디오를 돌려보며 진실에 눈뜬 수많은 학생들이 정권에 분노하며 학생운동에 동참했다. 1980년 5월 신군부를 막지 못하고 무력하게 철수한 서울의 학생들에게 광주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자 결사 투쟁에 나서게 하는 부채감이었다.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을 방조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우방국이 아닌 군부독재의 후원자로 이해됐고, 전두환 정권은 그에 부역하는 반민족적 존재이자 민중을 위협하는 반민중적 존재였다. 이제 학생운동의 목표는 형식상의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데에만 그칠 수 없었다. 학생운동 진영의 투쟁조직이었던 삼민투쟁위원회가 내건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이라는 목표는 당대 학생운동이 전 사회적인 혁명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이었음을 보여준다.

▲1984년 5월 광주학살을 규탄하는 교내 시위 현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저항의 진지를 구축하는 학생들의 노력은 학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서울대에서 발간된 정치신문 〈깃발〉은 학생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저항을 이끄는 선두에 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수많은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학력을 숨기고 공장에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야학을 운영했고, 매년 여름 농민과 연대하는 농촌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학생운동이 노동자·농민·빈민 등의 정치세력화에 깊게 관여한 것은 한편으로 이들이 아직 한국 사회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학생이 지닌 사회적 위상도 한몫 했다. 대학 진학률이 30%에 그치던 때였기에 대학생은 미래의 지도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요구받았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이 급진화되는 것을 막고자 유화책을 내놨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은 ‘학원자율화조치’를 발표하고 캠퍼스 내에 상주하던 사복경찰을 철수시켰다. 시국 문제로 제적된 서울대생 210명이 학교로 돌아왔다. 정권의 의도와 달리 학생운동은 이를 계기로 소규모 조직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대중적 기반을 다졌다. 그해 봄부터 5.17 군사정변으로 해체된 학생회를 재건하는 작업이 이뤄졌고 마침내 9월, 새로운 학생회가 출범한다. 정권과 학교 당국은 다시 태어난 학생회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학교 당국은 총학을 공식 기구로 인정하지 않고 자금줄을 막는 한편, 학생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아크로폴리스에 가시 돋친 장미를 심었다. 경찰이 투입한 끄나풀이 발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총학은 과 학생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학생사회의 자치기구이자 학생운동의 대중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투쟁에 대중을 동원하는 학생회의 힘은 1987년 박종철 열사(언어 84)의 죽음으로 시작된 6월 항쟁에서 빛을 발했다. 박 열사의 죽음이 경찰 고문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지자 총학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1월 20일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고, 2월 5일에는 궐기대회가 펼쳐졌다. 5월에는 동맹휴업을 결의하고 6월에는 매일 아크로폴리스에서 출정식이 열렸다. 출정식 뒤엔 저마다 도심으로 이동해 집회에 참여하고 밤에는 녹두거리에서 뒤풀이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실현됐다. 민주화의 전진과 함께 학생운동의 한 시대가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항의하는 졸업생들이 퇴장한 87년 졸업식 현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 이후 새로운 동력을 찾아

세계가 변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대학도 변하고 있다고 합니다. 관악이 변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깔끔해져 가는 학우들의 옷차림 속에서, 100%의 출석률을 자랑하는 교양강좌에서, 호프집에서 시작해 노래방에서 끝나는 술자리에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숱한 유행어 속에서 우리는 유행처럼 왔다가 낙엽처럼 떨어져 뒹구는 ‘변화’들을 감지합니다. ― 1993년 제37대 총학 선거 자료집

  6월 항쟁의 승리 이후 100만 명이 모인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조남규(역사교육 86) 씨가 한 생각은 ‘이렇게 혁명이 되는 거구나’였다. 그러나 1987년은 혁명의 시작이 아닌 종결이었다. 학생운동 진영은 6월 항쟁의 승리를 딛고 민중혁명이 일어나리라 기대했지만 7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노동자 대투쟁은 기존의 정치·경제적 체제 내에서 노동권을 신장하는 데 그쳤다. 군부정권의 공백을 채우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학생운동은 김대중·김영삼의 보수 야당에 주도권을 내줘야 했다. 87년 체제는 학생들의 힘으로 만든 것이되 학생들의 것이 아닌 반쪽의 승리였다. 조 씨는 ‘다시 생각해 보면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모인 100만 군중은 그 자체로 전진하는 기세가 아니고, 마무리하는 분위기의 마지막 피날레였다’며 당시의 씁쓸함을 술회한다.

  학생운동이 맹위를 떨친 80년대에 뒤이은 90년대는 학생운동의 편이 아니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 체제가 종식되면서 80년대 학생운동의 사상적 근원이었던 사회주의 이념은 설득력을 잃었다. 경제·사회적 성장과 함께 시민사회가 성장했고 소비자 정체성을 내세운 시민단체가 기존의 운동세력을 대체했다. 사회와 함께 대학도 변했다. 1994년부터 서울대에서도 학과가 아닌 계열별 광역단위로 신입생을 모집하는 학부제가 실시됨에 따라 학과를 중심으로 자치활동을 펼치던 학생 공동체는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화 이후 90년대에 입학한 신세대는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문화에 익숙했고, 정치투쟁보다는 급성장한 대중문화에 이끌렸다. 이제 학생운동은 변화한 조건 속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 총학생회 선거 유세 ⓒ〈동아일보〉

  90년대 학생사회에는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는 학생정치조직이 등장한다. 기존의 폐쇄적인 이념서클과 달리 이들은 공개 활동을 지향했으며 전국적인 조직을 두고 학생회 선거에 대응했다. 학생회 수권을 두고 다투는 이들의 활동은 정당에 비견될 만했다. 1994년 제37대 총학 선거에서는 ‘21세기 진보학생연합(21세기 연합)’, ‘대장정 학생연합’, ‘학생연대’ 등이 후보를 내세웠는데, 승자는 학생식당 개선 공약을 내세운 21세기 연합이었다. 21세기 연합은 학생들이 마주하는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총학의 새로운 역할로 제시했다. 이들의 행보는 대중추수주의나 개량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일상의 문제를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는 생활정치를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21세기 연합 외의 조직들도 그동안 외면됐던 학생복지와 교육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매해 총학 선거에는 학부제 반대와 이수 학점 축소, 장학금 제도 개편 등이 공약으로 제출됐다. 이에 따라 90년대 후반에는 선거마다 5~6개 선본이 경쟁하는 것이 보편화됐지만 각 선본이 내세운 공약의 차별성은 찾기 힘들어졌다. 학생정치조직의 모든 활동과 자원이 학생회 사업에 투여돼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문제를 낳기도 했다.

  또 다른 변화는 이른바 ‘부문계열운동’의 역할이 대두된 것이었다. 80년대에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당면과제가 학생운동을 지배했다면 90년대에는 환경, 교육, 인권, 젠더, 의료·보건 등 다양한 의제가 학생들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서울대에서는 1993년 환경동아리 ‘씨알’이 만들어져 핵 폐기물 처리장 건설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캠퍼스 환경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이공계 학생들은 〈이공대저널〉을 발간하고 과학지식을 지역사회와 공유하는 ‘과학상점운동’을 펼쳤다. 새로운 운동들은 전통적인 학생운동의 한 부문 혹은 연장으로 이해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다. 서울대에는 80년대부터 여학생 자치기구인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총여)’가 있었지만, 학내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여성운동이 학생운동의 한 부문으로만 여겨지는 데 만족할 수 없었다. 총여 활동은 1993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됐고, 여성주의자들은 학생회 외부에서 동아리와 소모임을 운영하다 1996년 네트워크 협의체인 ‘관악여성주의자’를 구성했다. 2000년 서울대 학칙에 ‘서울대 성희롱·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이 만들어진 것은 이들이 주도한 ‘반성폭력 학칙제정운동’의 결실이었다. 1995년에는 학내 성소수자 단체 ‘마음001(현 ‘큐이즈’)’이 만들어졌다.

▲도림천 살리기 서울대 특별위원회의 현장 답사 ⓒ〈조선일보〉

  학내언론의 활동도 활발했다. 1990년 교지 〈관악〉이 만들어졌고, 1993년에는 〈이공대저널〉의 전신인 〈공대저널〉이 단과대학 신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980년대 내내 정부와 학교 본부의 보도 통제로 몸살을 앓던 〈대학신문〉은 민주화 이후 편집과 보도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힘썼다. 1992년 21세기 연합의 정치신문으로 출발한 〈자주관악〉은 1993년 해당 조직의 당선으로 총학 산하 기관지가 됐다가 1995년 〈우리세대〉로 제호를 변경한 뒤, 1997년에는 총학으로부터 편집권과 재정권이 독립된 자치언론으로 탈바꿈했다. 〈우리세대〉는 2001년 〈서울대저널〉로 다시 제호를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우리세대〉 창간호 ⓒ서울대학교 기록관

탈정치의 물결, 갈피를 잃고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청년들은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나고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짝짓기에 몰두했지.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러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 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 브로콜리너마저 「졸업」(2010)

  윤덕원(언론정보 01) 씨가 작사한 ‘브로콜리너마저’의 곡 「졸업」에는 저마다 살길을 찾아 ‘스펙’을 쌓고 ‘취준’을 해야만 했던 2000년대 학번들의 애환이 담겼다. 윤 씨가 활동하던 ‘메아리’가 민중가요 노래패에서 밴드 동아리로 방향을 틀었듯, 당시 대학가에는 탈(脫)정치의 물결이 일었다. 1990년대 들어 정치에 대한 관심이 줄고 개인주의가 확산되던 경향은 1997년 IMF 경제위기로 불황과 청년실업이 심화되며 가속화됐다. 대학생들은 생존경쟁에 시달렸고, 학생운동 참여는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생이 더 이상 진보적 계층이 아니라면, 출신 계층으로 보나 졸업 후에 기대되는 소득으로 보나 중산층 이상에 속하는 서울대생이 반드시 진보적일 이유는 더욱 없었다. 〈대학신문〉의 조사에서 스스로를 보수층이라 답한 서울대생은 2000년 13.2%, 2005년 27.6%, 2007년 40.5%까지 증가했다.

▲취업 면접을 준비하는 학생들 ⓒ서울대학교 경력개발센터

  인식의 변화는 선거 결과로 드러났다. 90년대에도 총학의 정치 노선이 학생 다수와 유리됐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총학은 여전히 학생운동의 기구였고, 학생운동조직에서 총학을 배출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1999년 제43대 총학 선거에서 스스로 ‘비운동권’을 자처한 선거운동본부(선본) ‘광란의 10월’이 당선되며 이 명제는 깨졌다. 광란의 10월은 기존의 총학이 정치활동에 매몰됐다 비판하며 공동선본발족식과 공동유세 등의 공식 일정을 모두 건너뛰었다. 핵심 공약은 재미없기로 소문난 서울대 축제를 개선하겠다는 것이었다. 광란의 10월의 당선은 진보적인 학생운동에 공감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표를 몰아준 결과였다. 그 이후 총학 선거에서는 비운동권 선본이 운동권 선본과 경쟁하는 구도가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최기원(경제 04) 씨는 ‘학생회가 왜 특정한 정치적 성향을 갖고 사회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진 학생들이 비운동권이라는 이름으로 집단화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그러나 비운동권의 초점이 기존 운동권의 정치를 공격하는 데 놓이는 한, 이미 그 자체로 다분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2006년 제49대 총학 ‘Suprise(서프라이즈)’는 아크로폴리스에서 4.19 기념제를 여는 것을 금지했는데, 그 명분은 소음이 발생해 도서관을 이용하는 학생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었다. 이어 5월 10일 총학생회장 황라열(종교 00) 씨는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대 총학은 한국대학총학생회(한총련)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한총련은 1993년에 만들어진 학생회 연대체로, 보수 언론에서는 한총련 지도부의 대북관을 들먹이며 학생운동 전체를 비난하곤 했다. 서울대 총학은 이미 1998년부터 한총련과 교류하지 않았으므로 황 씨의 탈퇴 선언은 사실상 반(反)운동권 정서에 편승하는 보여주기식 정치공세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황 씨가 선거 과정에서 밝힌 ‘고려대 의예과 특례 입학’, ‘무에타이 프로선수 자격 획득’ 등의 이력이 허위임이 드러나며 서프라이즈는 놀랍게도 두 달 만에 임기를 종료했다.

▲한총련 탈퇴를 선언하는 제49대 총학생회장 ⓒ〈동아일보〉

  운동권이라는 용어는 본래 1980년대에 정권과 언론이 학생운동의 대중화를 저지할 목적으로 고안한 것이지만, 2000년대의 서울대 학생사회에서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별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양자는 단지 학생정치조직에 기반해 있는지에 따라 구별될 뿐, 생활복지와 정치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선이란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비운동권 총학도 이라크 파병 반대를 이끌거나 총투표를 거쳐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에 참여하는 등 사회참여를 도외시하지 않았다. 또 운동권 총학에서 주로 제기한 등록금 인하, 학부제 반대 등의 현안은 생활에 직결되는 문제인 동시에 대학의 기업화와 비민주성에 저항하는 정치적 요구기도 했다.

법인화가 댕긴 투쟁의 불씨

오늘 저녁 6시 45분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에서 시흥캠퍼스 추진에 반대하는 학생총회가 학생 1,670명의 참여로 성사됐다. 이날 총회에서는 행동방안을 묻는 의안에 대해 ‘본부점거 투쟁’이 1,853표 중 1,097표를 받아 통과됐다. 곧이어 본부 점거에 돌입한 학생들은 저녁 10시 30분경부터 본부에 진입해 현재 총장실에서 점거를 이어가고 있다. ― 〈서울대저널〉 “시흥캠퍼스 반대 학생총회 성사”(2016. 10. 10.)

▲2016년 시흥캠퍼스 반대 전체학생총회

  2010년대 동안 학생사회가 만성적인 침체에 놓여있었음에도 전체학생총회가 여러 차례 성사된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전체학생총회는 서울대 전체 학생의 1/10 이상을 정족수로 하는 총학의 최고 의결기구다. 약 1,600명 이상의 학생이 한날 한자리에 모여야 하므로 평시에는 전체학생대표자회의(전학대회)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특별히 학생 총의를 모을 필요가 있을 때 소집된다. 서울대 학생사회는 2011년, 2016년과 2017년, 2019년에 4차례의 전체학생총회를 개최했고, 2018년과 2019년에는 사회대와 인문대에서 단과대 학생총회가 열렸다. 2010년대의 학생총회는 각기 다른 요구를 내걸었지만, 공통의 배경에는 학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출발점에 서울대 법인화가 있다. 법인화는 국립대학을 기업 운영형태인 법인으로 전환해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서울대에서는 2008년부터 재정 확보를 위한 방안으로 논의가 본격화돼 2009년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법인화법)’ 시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이를 두고 서울대 학생사회에서는 법인화가 대학의 공공성을 해치고 기업화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리라는 우려가 일었다. 재정 확보를 위해 등록금을 인상하거나 기초학문 지원을 축소할 수 있는 탓이다. 법인화에 따라 총장직선제가 폐지되고 이사회가 총장 선출 권한을 갖게 돼 학내 민주주의가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됐다.

  결국 2010년 12월 법인화법이 통과되며 서울대는 ‘국립서울대학교’에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가 됐다. 이듬해 3월 선거에서 당선된 제53대 총학 ‘Action! AGAIN’은 곧바로 투쟁 국면에 돌입해 5월 30일 비상총회를 소집했다. 비상총회에는 2천여 명이 모여 법인화 반대를 결의하고 본부점거에 돌입했다. 8년 만의 전체학생총회 성사였다. 학생들이 점거한 본부는 투쟁의 거점이자 학생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공부하고 토론하는 자치공간이 됐다. 6월 17일에는 본부점거를 응원하는 락페스티벌 ‘본부스탁’이 행정관 앞 잔디광장에서 열렸다. 학교는 이를 불법 행사로 규정하고 차벽까지 동원해 방해했지만, 이틀간 ‘브로콜리너마저’, ‘눈뜨고코베인’, ‘빈지노’ 등이 무대에 오르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후 법인화 반대운동의 방향이 대국회투쟁으로 전환되며 28일에 걸친 점거 투쟁은 막을 내렸다.

▲서울대 본부가 ‘본부스탁’ 개최를 막기 위해 설치한 차벽

  2011년 비상총회와 본부점거의 기억은 2016년 시흥캠퍼스(시흥캠) 투쟁에서 재현됐다. 학교 당국은 2009년부터 시흥캠 조성을 준비했고, 일부 단과대를 이전하거나 신입생 전원을 입주시켜 거주대학으로 활용하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다. 2013년 이 사실을 알게 된 학생사회는 관련 논의에 학생 의견을 반영할 것을 꾸준히 요구했으나 서울대는 2016년 8월 학생사회와의 협의 없이 ‘시흥캠퍼스 실시협약(실시협약)’을 체결했다. 분노한 학생들은 10월 10일 전체학생총회에 모여 실시협약 철회 투쟁을 결의하고 본부점거에 돌입했다. 본부점거는 이듬해 3월까지 153일간 지속됐으나 2017년 3월 11일 소화전 물대포를 동원한 본부의 진압으로 종결됐다. 투쟁이 장기화되자 지속 여부를 두고 학생사회의 의견도 균열했다. 4월 4일 다시 열린 전체학생총회에서는 실시협약 철회 기조를 유지하는 안이 통과됐지만 찬성률은 56.3%에 그쳤다. 그해 여름까지 이어진 시흥캠 투쟁은 실시협약 철회라는 애초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 거주대학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2011년 법인화법이 통과된 이후에 전개된 투쟁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듯, 이미 실시협약이 체결된 이후에 전개된 2016년 시흥캠 투쟁에서 학생과 본부 양측은 타협점을 찾기 어려웠다. 총학이 주도한 2011년 투쟁과 달리 2017년 투쟁을 선도한 이들은 총학이 아닌 일부 단과대 학생회 혹은 운동에 적극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본부점거본부’였다. 이들은 학생들을 설득하기에 앞서 투쟁에 소극적인 총학을 움직여야 했다. 긴 투쟁이 반쪽의 성과만을 남기고 마무리된 상황은 회의감을 낳았다. 시흥캠 투쟁이 일단락된 2017년 제60대 총학 선거는 학생사회의 화합을 강조한 선본 ‘파랑’이, 2018년 제61대 총학 선거는 ‘공깡(공대 간이식당)에 짬뽕국물’이라는 슬로건으로 생활복지를 강조한 선본 ‘내일’이 당선됐다.

▲학생들에게 물대포를 살수하는 교직원들 ⓒ〈대학신문〉

바이러스에 걸린 학생사회

총학생회 선거 정책 간담회 당시 명확하게 학외 사회 문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지 않겠다는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지 않겠다는 총학생회의 기조를 변경할 생각은 없습니다. ― 제63대 총학생회장 조재현(자유전공 20) 씨

  2020년 들이닥친 코로나19의 범유행은 학생사회에 치명적이었다. 총학과 단과대, 과·반 학생회가 무너지고, 선거는 번번이 무산됐다. 서울대라는 공간과 공동체가 비대면 수업과 온라인 커뮤니티로 대체되며 학생회 바깥의 자치공동체도 재생산의 위기를 겪었다. 짧은 주기로 구성원이 교체되는 학생사회에서 3년의 공백은 미약하게나마 이어지던 정치적 전통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2023년 제63대 총학 ‘정오’는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을 두고 ‘학외 문제이므로 답할 수 없다’고 답했다가 몰매를 맞고 사과문을 냈다. 정치는 이제 행동할 당위가 아닌 행동하지 않을 알리바이가 됐다. 지금의 학생사회는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을 전염병보다도 두려워하는 듯하다.

▲2023년 11월 제64대 총학생회 선거 기표소

  이제 무얼 할 수 있을까. 거대한 하나의 적은 없고, 산재한 문제들만이 있다. 학생은 더 이상 사회변화의 선봉대도, 고고한 지식인도 아닌 생존경쟁에 내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곳에서 학생으로서 정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누구와 무엇을 꿈꾸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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