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해, 차별과 혐오의 시대를 탄핵하라

광장에 울려 퍼진 페미니스트·성소수자·청소년·장애인의 목소리

  윤석열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12월 3일로부터 꼬박 열흘이 지났다. 수백만 명의 시민이 즉각 탄핵을 요구하며 광장에 모인 가운데, 내일 국회에선 두 번째 탄핵소추안 표결이 예정돼 있다. 윤석열은 마침내 촛불의 심판을 받을 수 있을까. 윤석열이 탄핵되고 정권이 교체되면 모두가 열망하던 민주주의가 실현될까.

  그렇지 않다고,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계엄 이전에도 차별과 혐오 속에서 계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아온 존재들이 있다고, 소수자의 권리를 억압하는 정치가 윤석열 당선과 12.3 내란을 가능케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윤석열 이후의 민주주의는 전과 달라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스트·성소수자·장애인·청소년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윤석열을 파면한다

  지난 7일,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열린 집회에서 페미당당 심미섭 활동가는 “광장에서 안전하게 윤석열 퇴진을 외칠 권리를 요구한다”고 외쳤다. 심 활동가는 2016년 촛불투쟁 당시 더불어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앞으로 100년 안에 여성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라’고 발언한 것을 언급하며, 여성 개인의 잘못을 여성 전체의 책임으로 치환하는 여성혐오를 지적했다. 남성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며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혐오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심 활동가의 발언은 청중의 야유에 직면해야 했다. 윤석열 정부의 3년이 그랬듯, 윤석열 탄핵을 외치는 광장도 어떤 여성들에게는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윤석열은 바로 그러한 여성혐오에 힘입어 권력을 얻었다. 윤석열은 선거운동 당시 ‘구조적 성폭력은 없다’고 발언하고, 여성가족부(여가부) 폐지를 공약하는 등 혐오와 차별을 앞세워 당선됐다. 한국여성의전화 박예림 활동가는 “윤석열이 재임한 3년 동안 성평등 정책이 크게 후퇴했다”고 짚었다. 2023년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최소 138명의 여성이 파트너·가족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당했다. 언론에 보도된 것만 따진 것이니 실제로는 그보다 많을 것이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매년 수많은 여성이 목숨을 잃었지만, 윤석열 정권은 여가부 폐지를 추진하고 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을 삭감했다.

  여성의 삶을 위협한 윤석열이 탄핵되면 한국 사회의 성평등이 실현될까. 정말 그것으로 충분할까. 박예림 활동가는 “탄핵 이후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성평등을 중요한 의제로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 정부에서 여성을 향한 차별과 억압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달라질 것은 없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페미니스트들은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퀴어-네트워크’를 구성해 공동대응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광장에서 여성혐오로부터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는 한편, 윤석열 퇴진 이후 성평등한 민주주의가 도래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탄핵은 성평등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윤석열이 되풀이될 뿐이다.

▲4일 광화문 광장에서 윤석열 퇴진을 요구한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퀴어-네트워크’ ⓒ한국여성의전화

지금 당장성소수자 차별 없는 민주주의로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둔 7일, 여의도 밤하늘엔 수십 개의 무지개 깃발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성소수자들이 무지개 깃발 아래 모인 이유는 무엇일까. ‘HIV/AIDS인권행동 알’은 “윤석열 퇴진 투쟁은 불평등과 낙인을 뒤엎는 싸움”이라고 말한다. 윤석열의 3년은 성소수자의 권리와 존엄이 완전히 부정당하는 시간이었다. 윤석열이 임명한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은  ‘동성애는 공산주의 혁명 수단’이라거나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에이즈가 확산된다’는 발언을 일삼으며 차별을 부추겼다. 서울과 충남에서는 국민의힘과 보수 기독교 세력의 주도로 성소수자 인권 보호를 명시한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됐고, 공공도서관에서는 관련 도서가 사라졌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박한희 집행위원은 성소수자 인권의 후퇴가 윤석열 정부의 인권의식 부재와 맞닿아 있다며, “윤석열 탄핵은 성소수자 인권을 다시 이야기하는 과정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짚었다.

  차별과 낙인에 맞서는 성소수자들에게, 탄핵은 투쟁의 끝이 아닌 시작이다. 박한희 집행위원은 “촛불항쟁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성소수자는 언제나 나중으로 밀려났다”고 말했다. 성소수자 권리가 민주주의의 핵심 의제가 되지 않는 한,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성소수자의 삶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박 집행위원은 “윤석열만 탄핵되면 잘못된 사회가 바로잡히고, 민주당이 집권하면 세상이 좋아진다는 이분법적 프레임은 또다시 인권의 위기를 가져올 뿐”이라고 말했다. 광장에 모인 성소수자들이 나중이 아닌 지금 당장 차별 없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유다.

  현재 성소수자 단체들은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이란 이름 아래 무지개 깃발을 들고 연일 탄핵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광장에 모인 이들 모두에게 성소수자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윤석열 이후의 민주주의에 성소수자 차별의 자리는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다. 오늘 10시 단체 216곳과 개인 4,286명의 이름으로 성소수자 시국선언이 발표됐다. 이들은 “성소수자 시민들은 차별과 혐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내 자신을 받아들이는 힘을 길렀다”면서, “그렇기에 우리는 시민들을 모욕하고 인권을 짓밟는 이들에 대한 치가 떨리는 분노에도, 춤추고 노래하며 광장으로 나선다”고 외쳤다.

▲7일 탄핵 집회에 참가한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청소년의 ‘지금’을 유예하지 않는 사회로

  지난 10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과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지음)’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를 막는 청소년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이 애초에 목표한 인원은 1천 명이었지만, 최종적으로 청소년 4만 9,052명이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렸다. 윤석열에 대한 청소년들의 분노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었다. 이들은 퇴진 집회에 참여한 청소년 단체가 표적 수사를 당하고 고등학생이 그린 풍자만화 ‘윤석열차’가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주최한 공모전에서 정치적인 주제를 다뤘다”는 이유로 문화체육관광부의 경고를 받았다며, 윤석열 정권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자행한 탄압을 비판했다. 윤석열 정권에서 청소년은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

  청소년의 이름으로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청소년의 발언권을 부정하는 사회에 대한 정면승부다. 지음의 빈둥 활동가는 “청소년이 정치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 지금의 정치에 분노하며 함께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퇴진 집회에 동참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중적이다. 이들이 자신과 같은 입장일 때는 기특하다고 칭찬하지만, 반대 입장일 때는  ‘아직 철이 덜 들었기에 선동당하기 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빈둥 활동가는 “이런 식의 구분짓기가 어린이·청소년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 대다수에게 가해진다”고 지적하면서, “청소년의 실질적인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와 기회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청소년은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특한’ 존재가 되길 거부하고, 더 많은 사회 참여 기회를 요구한다. 빈둥 활동가는 “비청소년만이 정치적 문제에 관여할 수 있다고 간주되는 한, 청소년은 자신의 입장을 알리기 위한 자리에 접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청소년이 자기 목소리를 두려움 없이 낼 수 있고, 자신의 삶에서 통제권을 가져야 청소년이 해방되는 사회가 가능하다”며 청소년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위치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7일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청소년들 ⓒ지음 

장애인도 시민으로 함께하는 광장은 어디에

  지난 4일, 국회에선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가 있었다. 곧이어 더불어민주당 주최의 ‘윤석열 대통령 사퇴 촉구 탄핵 비상시국대회’가 열리자, 참가자들은 장애인 활동가들에게 피켓을 내리라며 야유했다. ‘윤석열 탄핵’이란 대의 아래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를 요구하는 장애인의 목소리는 당연하다는 듯 묵살됐다.

  2시간의 비상계엄은 장애인들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비상계엄 선포 당시 수어로 동시통역을 제공한 방송사는 단 한 곳뿐이었다. 이에 코다코리아는 “계엄이라는 엄중한 사태를 둘러싸고 수어·문자통역 등의 장애인 정보접근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은 장애인의 시민권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고스란히 비춘다”며, “음성언어 중심 사회에서 농인과 같은 언어적 소수자가 정보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으며 그들의 알 권리가 보장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청인들이 계엄 이후 무엇을 할지 논의하는 지금조차 농인들은 작금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뜻이다. 비장애중심사회가 만드는 장애인 배제는 계엄 이전에도, 이후에도 똑같이 장애인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계엄이 선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국회의원들은 정문이 폐쇄되자 담을 넘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인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은 위험하다는 주위의 만류에 담장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었다. 이에 김 의원은 지난 4일 페이스북에  ‘늘 배리어 프리(barrier free)의 중요성을 외쳤던 제가 물리적 ‘배리어’를 느끼는 암담하고 절박한 순간이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담을 넘어 표결에 참여한 국회의원들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위험을 불사한 영웅들이 됐다. 그러나 누군가 담을 넘고 싶었어도 그러지 못했다면 그 이유를 묻는 태도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 각자가 느끼는 계엄의 무게가 다르다면 그 차이를 만든 원인을 끝끝내 따져야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전장연은 지난 7일 발표한 성명에서 “윤석열 탄핵은 시급한 공동의 과제이나 전장연이 2001년부터 외쳤던  ‘장애인도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감옥같은 시설이 아닌 지역에서 함께 살아갈 권리’는 윤석열 탄핵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며,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새로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장애인의 이동권과 노동권을 비롯한 각종 권리는 윤석열이 탄핵된다고 해서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4일 국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진행한 전장연 ⓒ전장연

  광장은 모두의 목소리를 담는 것 같고, 우리는 그곳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시 만난 세계’를 목청껏 부르는 그곳에서 누군가는 수어통역사 없는 무대를 망연히 바라보고, 누군가는 탄핵이란 대의 아래 시민권을 보장하라는 피켓을 내리길 강요당했다. 원치 않는 접촉을 두려워하는 이와 무지개색 깃발 아래서만 안심할 수 있는 이가 있다. 기특하다는 말을 기쁘게 들을 수 없는 이가 있고 누군가 담을 넘어 국회 표결에 참여한 영웅이 될 때 초조하게 담장 주위를 거닐던 이가 있다. 광장이 외치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금껏 누가 누릴 수 있었는지, 그곳이 시민이란 이름으로 끌어안거나 배제한 이가 누구인지 성찰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차별과 혐오에 기대 ‘다음 윤석열’이 탄생하는 것을 막고,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총학생회 산하 윤석열 퇴진 투쟁 특별위원회 설치안 가결...오는 8일 위원 모집 시작

Next Post

동덕여대 공학 전환 반대 투쟁이 남긴 물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