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는 군대, 비로소 완성되는 민주주의

주체적인 군인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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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현역 장병 인터뷰 및 타 언론 보도, 다수의 정신의학 논문을 바탕으로 창작한 가상의 서사입니다.

  A씨는 육군 특전사다. 지난 12월 3일 늦은 저녁, A씨에게 군장을 챙겨 집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어디서 뭘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서둘러 헬기에 올랐다. 지휘관은 엄중한 상황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국회의사당이었다. “국회에 진입해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단 한 번도 훈련한 적 없는 초유의 임무였다. 몰려든 인파 탓에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어 창문을 깼다.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한데 모여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누군가 A씨의 총구를 부여잡았고, 곳곳에서 “부끄러운 줄 알라”거나 “당장 나가라”는 외침이 들렸다. 얼마 뒤 작전을 멈추고 복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사이 몇 배는 더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A씨는 터져 나오는 고함과 수십 대의 카메라를 뒤로 한 채, 쫓겨나듯 부대로 복귀했다.

  12월 3일의 경험은 A씨에게 트라우마를 안겼다. 그날 이후로도 인터넷 커뮤니티 곳곳에서 군인을 향한 비난이 이어졌다. A씨는 군대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군 외부에서 만난 심리 상담사는 A씨가 ‘도덕적 손상’을 입었다고 일러줬다. 권위자가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을 때, 피해를 입거나 행동을 막지 못한 사람이 겪는 부적응 증상이었다. 특전사 A씨는 군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을 모두 잃었다.

  통수권자의 터무니없는 명령이 말단 병사에게 가닿았다. 부당한 명령에 제동을 걸고자 고안된 온갖 법적·제도적 장치는 무용지물이었다. 12.3 내란의 주동자와 가담자들은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해 말을 바꾸거나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12.3 내란은 윤석열에 동조하거나 그의 명령에 따른 군인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내란을 둘러싼 숱한 쟁점 가운데 군대를 간과해선 안 될 이유다. 내란의 실현을 가능케 한 한국 군대의 유구한 병폐를 들여다보고, 그 너머를 그려봤다.

정치에 종속되는 군대, 권력에 충성하는 군대 

  1961년 5월 16일엔 박정희가, 1979년 12월 12일엔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이 무력을 남용해 정권을 찬탈한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대다수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이러한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 균형 잡힌 민군관계 유지에 힘쓰고 있다. 민군관계란 국가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정치 지도자와 군사 지휘자 사이에 형성되는 권력관계를 말한다. 지금껏 한국에서 바람직한 민군관계는 곧 정치 지도자가 군 최고위를 적절히 통제하는 것으로 이해됐다. 다른 말로 하면 문민통제다. 문민통제란 민간이 군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선출직 대통령과 민간인 국방부 장관이 군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것을 가리킨다.

  12.3 내란은 문민통제의 맹점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문민통제는 대통령이 민주주의 체제를 준수한다는 인식을 기본 전제로 한다. 즉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가치 아래에서 군의 무력을 관리하는 게 아닌, 군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친위 쿠데타*의 가능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친위 쿠데타: 이미 권력을 지닌 세력이 권력을 보존하거나 더 큰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벌이는 쿠데타

  12.3 내란은 친위 쿠데타가 성공 직전까지 간 사건이었다. 지난 1월 15일 열린 ‘12.3 계엄 내란 사태를 통해 드러난 한국 국방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 세미나에서 국방대 김병조 교수(안보정책학과)는 문민통제가 “군대의 정치력을 줄여 선출된 정권을 위협하지 않는 데에 초점을 둔 나머지, 군대가 정치화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즉 군대가 정권을 침탈했던 과거의 쿠데타와는 반대로, 군이 정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름으로써 국가에 위협이 될 가능성을 간과했다는 설명이다. 국가 폭력이나 병역 거부 사건을 주로 맡아온 임재성 변호사도 12.3 내란을 두고 “철저한 문민통제 속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했다. 문민통제에 내재된 한계가 12.3 내란을 가능케 한 원인 중 하나였다는 분석이다.

  12월 3일 우리가 목도한 건 정치권의 입김이 군의 향방을 좌우하고, 나아가 군의 무력을 오용한 현실이다. 군이 국가가 아닌 소수의 고위 정치인에게 충성하는 행태, 이른바 군의 정치 종속화다. 한미연합군사령부 안병석 전 부사령관은 〈중앙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정치학자 헌팅턴을 인용해 ‘문민 지도자가 군사 운영에 과도하게 개입하면 군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약화되고 정치적 목적에 휘둘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군의 정치 종속화는 진급과 출세를 국가 방위보다 우선으로 여기는 ‘정치군인’을 대거 양성한다. 국군방첩사령부(방첩사) 여인형 전 사령관이 대표적인 예다. 방첩사는 내란 당일 국회의사당과 선거관리위원회에 침투한 병력의 다수가 소속된 부대다. 여 전 사령관은 12월 3일 이전부터 내란 모의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다. 이 밖에도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 전 사령관이었던 노상원과 문상호 역시 수차례 사전 회동을 통해 내란을 공모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첩사 여인형 전 사령관(가운데)과 정보사 문상호 전 사령관(아래)은 국방부 김용현 전 장관(위)의 지시를 받아 내란을 공모했다. ⓒ국방부, 〈연합뉴스〉

불복종의 근원적 불가능성

  그러나 이들 몇몇 정치군인만으로 내란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12.3 내란이 실현될 수 있었던 건, 터무니없고 위헌적인 명령을 거역하지 못한 장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형법상 항명죄에 의하면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불복종한 사람은 처벌을 받는다. 달리 말해, 명령이 부당하다면 거부해도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단 얘기다.

  실제로 지난 1월 9일 중앙지역군사법원은 항명 혐의로 기소된 해병대 박정훈 대령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박 대령은 재작년 7월 19일 집중호우 지역 실종자 수색 작전 중 숨진 故 채 상병 사건을 조사했다. 군사법원법에 따르면 군인이 사망한 범죄의 경우, 군사법원이 아닌 일반법원이 재판권을 갖는다. 이때 군 수사관은 범죄에 대한 조사 결과를 경찰에게 넘겨야 한다. 하지만 해병대 김계환 전 사령관은 박 대령에게 수사 결과의 이첩을 보류하라고 지시했고, 박 대령은 이를 부당한 명령으로 판단해 따르지 않았다. 재판부는 명령의 존재 여부 자체도 불분명하며, 설령 있었더라도 박 대령이 해당 명령에 따라야 할 이유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박 대령의 행위를 정당한 항명으로 본 것이다.

항명 혐의로 기소된 해병대 박정훈 대령은 무죄를 선고 받았다. ⓒ〈뉴스1〉

  12.3 내란 당시 김용현 전 장관은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항명죄로 처벌한다”고 말했다. 여인형 전 사령관 역시 지난해 12월 7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취재진에게 “맞든 틀리든 군인은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발언했다. 명령의 정당성을 따지도록 한 군형법상 항명죄를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협박 도구로 사용한 셈이다.

  이미 존재하는 권위에 반기를 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임재성 변호사는 “명령을 따르는 건 제도화된 관행과 관습이지만, 따르지 않는 건 기존의 관계를 역전시키고 전복해야 하는 버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는 비단 군대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임 변호사는 일터를 예로 들어 “작업 지시자의 말에 따라 빠르게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선 이를 거부하기 어렵다”며,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산업재해는 위험한 작업에 대해 노동자가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렵기에 발생한다”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군대에선 하급자가 명령의 정당성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군대는 주어진 임무를 무조건 따르길 강요하는 조직이다. 공군에서 현역병으로 복무 중인 현지원(가명) 씨는 “군대에서는 흔히 ‘까라면 까야지’라는 말이 통용되곤 한다”며 “군대는 개인의 가치판단이 행위의 최종 결정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무언가 사유할 필요가 없어지는 곳”이라고 말했다. 육군에서 현역병으로 복무 중인 양재표 씨는 “군대에서는 남태령 시위도, 계엄령 선포도 그저 하나의 상황으로 치부된다”고 말했다. 사안의 본질이나 맥락이 지워진 채 그저 처리해야 하는 임무로 일반화된다는 얘기다. 양 씨는 “장병들은 결국 주체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일개 병정으로 취급된다”고 말했다.

  주어진 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 군대에서 행위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 내란 이후 청문회에 출석한 군인들의 태연한 거짓말과 말 바꾸기가 이를 방증한다. 군인권센터 김형남 사무국장은 “군인들은 위증이 조직을 지키기 위한 기만술이자 작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체로 이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행위의 정당성과 사회에 미칠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는 조직은 파시스트 권력자에게 다루기 쉬운 무기가 된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1989)에서 인간을 도구화하는 관료제가 유대인 학살을 낳은 조건이었다고 지적했다. 바우만은 행위의 옳고 그름 대신 효율성만을 좇는 관료제의 경향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비극을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김형남 사무국장 역시 “군에서는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논의하는 일이 드물다”고 비판했다. 조직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주체적인 가치 판단을 가로막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경향은 오늘날 한국의 군대에서도 엿볼 수 있는 문제점이다.

민주주의에 예외 지대는 없다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은 자기 결정권을 지니지만, 군대 내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시민이 아니라 명령에 따르는 도구가 되길 강요받는다. 이처럼 군인을 비롯해 학생이나 수감자 등 특정 목적에 따라 일정한 한도 내에서 기본권이 제한되는 관계를 특별권력관계라고 부른다. 임재성 변호사는 이들이 “기본권이 제한돼 주체가 아닌 도구로 전락한 대표적 예시”라며 “이들의 기본권을 어디까지 제한할지 그 범위와 명분이 활발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엔 특별권력관계에 놓인 이들도 자기 결정권이나 행복 추구권과 같은 근본적인 기본권을 결코 제한받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광화문 집회에서 행진 중인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무사귀환 부모연대’ ⓒ천세민 사진기자

  사실 징집된 대다수의 병사는 자신을 군이 아닌 시민사회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다. 양재표 씨는 비상계엄령 선포가 “군대와 나를 확실하게 분리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양 씨는 군의 행보를 보며 본인이 “군인이기 이전에 시민”임을 깨닫고 12.3 내란 이후 “군대에 대한 정신적인 동질감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고백했다. 육군에서 상황병으로 복무 중인 김재용(가명) 씨는 비상계엄령 선포 당일 부대에서 뉴스를 시청하며 “내가 여기 있을 게 아니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가서 계엄군을 막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어 김 씨는 “직업군인이 아니다 보니 내가 속한 조직이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처럼 병사들이 본인을 시민으로 인식하더라도, 군대가 민주주의의 예외 지대로 남아있는 이상 주체적으로 행동하긴 어렵다. 현역 공군 장병으로 복무 중인 이호연(가명) 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군대의 반민주적 분위기를 당연시하고, 그것을 군이 가진 하나의 정체성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군인 스스로가 본인을 사회와 분리하는 과정에서 군인의 정체성을 찾고, 그 과정에서 ‘민주적’인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어 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즉 군대가 외부와 철저히 분리될 때, 시민사회와 전혀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것이다.

  폭력 사용에 대해 둔감하게 반응하거나, 나아가 이를 효과적인 수단으로 합리화해 인식하는 군 문화가 대표적인 예다. 김형남 사무국장은 군대에서 “어떤 형태의 폭력은 유효한 소통의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걸 체화하게 된다”며 이번 내란 역시 “결국 계엄을 하나의 유효한 수단으로 모의하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군인들의 사고 체계 속에선 계엄이 그렇게 낯선 일이 아니라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사고 체계는 전체 사회로 확산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김형남 사무국장은 지난 1월 발생한 서부지방법원 폭동을 예로 들며, “법원에 가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테러를 하겠다며 협박하는 행동은 기존에는 감히 떠올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12.3 내란의 본질은 “폭력을 행사해 본인의 주장을 관철하는 게 버젓이 하나의 선택지처럼 쓰이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고 짚었다.

제복 입은 시민을 기다리며

  군 전반의 개혁은 군인들 스스로가 ‘제복 입은 시민’임을 자각할 때 가능해진다. 국방정신전력원 정책담당 정상근 전문군무경력관은 논문 「독일 연방군 ‘내적 지휘’ 철학의 한국적 적용」(2019)에서, 제복 입은 시민이란 ‘자유로운 인격체, 책임 의식을 지닌 시민, 전투준비태세가 완비된 군인’을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정 경력관은 해당 개념에 대해 ‘군대에서 군인이라는 용어보다 인간과 시민을 먼저 나열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짚는다. ‘군대의 구성을 인간과 시민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며, 군을 지휘하는 철학적 근원을 인간과 시민에서 찾고 있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김형남 사무국장 역시 “군이 시민들과 접촉면이 있단 걸 인지시키고 군이 시민들의 통제를 받는 시스템이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군인들이 시민을 타자로 인식하는 순간 무력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진다”며 “군대가 사회와 분리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는 것들이 무력 남용에 대한 일종의 안전장치로 기능한다”고 설명했다.

  이미 군은 인권업무 훈령을 통해 인권교육의 목표가 ‘제복 입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인식하게 하는 데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해당 조항이 공허한 울림에 그치지 않도록, 사회 곳곳에서 숱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군인복무기본법) 제25조는 군인이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명시할 뿐, 부당한 명령에 대해 거부할 권리를 직접적으로 명시하고 있진 않다. 12.3 내란을 계기로 이를 골자로 한 군인복무기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다수 발의됐다.

군 인권업무 훈령 제12조는 인권교육의 목표로 ‘제복 입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인식하게 하는 데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군인권센터 또한 불법 명령 거부권을 명시하는 군인복무기본법 개정을 국회에 청원했다. 불법적인 명령을 내려서도, 따라서도 안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법에 명시하는 건 어떤 의미를 지닐까. 김형남 사무국장은 “불법 명령을 거부하지 않으면 처벌하자는 게 핵심이 아니라, 명문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합의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당한 명령의 판단과 대응에 대해 참조점을 만들자는 얘기다. 김 사무국장은 12.3 내란 당일 위법적인 명령의 이행 여부를 두고 다양한 가치들이 충돌했다고 말했다. 예컨대 “어떤 지휘관은 국회의 유리창을 깨라고 지시한 반면, 어떤 장병들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소극적으로 항명”했다. 이런 분열은 지금이 명확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며, 법의 존재는 이에 유효한 단초로 기능할 수 있다.

  한편 군 장병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 조항은 그 자체로 군인의 올바른 선택을 돕는 힘이 되기도 한다. 김재용 씨는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처벌되고, 피해를 입은 사람은 보호받는다는 걸 명시적으로 알려주는 게 큰 용기가 된다”고 말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군인들 스스로 권리를 성찰하고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장치가 보장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형남 사무국장은 “군대도 내부적인 자정 능력을 갖춰야 된다”며 “군인권센터와 같은 외부 단체의 존재도 중요하지만 언제까지나 외부의 비판을 듣고 사후약방문식으로 문제를 개선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일례로 노동조합이나 직장협의회, 혹은 유사한 형태의 조직을 꾸리는 방안이 있다. 김형남 사무국장은 “5년 전 경찰에 직장협의회가 생겼고, 최근엔 소방공무원 노동조합도 생겼다”며 “이는 조직 내부의 문제에 대해 건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창구로 기능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독일과 벨기에를 예로 들어 “군인들이 노조를 꾸리기도 한다”며 “중요한 건 조직 내 당사자들의 인식을 어떻게 바꾸고, 이를 어떻게 조직의 형태로 구체화해 나갈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군대가 민주주의의 예외 지대로 남지 않기 위해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군대에 속한 개개인의 인식 변화도 병행돼야 한다는 얘기다.

  군인도 시민이다. 이는 지극히 자명하고 타당한 명제다. 동시에 오랜 시간 군 안팎의 많은 이들이 힘을 합쳐 세워낸 선언이기도 하다.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부당한 명령을 내리거나 따랐던 자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았고, 어려움 속에서도 정의를 따른 이들은 살아남아 현재의 우리를 구한다.

  12월 3일 밤, 부당한 명령을 앞에 둔 채 주저하고 머뭇거렸던 장병들 역시 마찬가지다. 수십 년에 걸쳐 성숙한 시민사회가 이들을 기어코 붙잡았고, 이들 역시 훗날의 누군가를 구할 테다. 군대가 12.3 내란의 주축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럼에도 옳고 그름을 사유하는 군인에게서 우리는 희망을 엿본다. 군대가 사유할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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