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개관한 국내 최초의 독립영화전용상영관 인디스페이스는 계약이 만료되는 2009년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새로운 사업자 선정을 위해 공모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자, 그에 참여하지 않고 스스로 폐관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영진위가 선정한 독립영화전용상영관의 새로운 사업자는 한국다양성영화발전협의회(이하 한다협)이다. 한다협의 이사장을 맡은 최공재 감독은 독립영화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자신의 영화가 없다.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고 있다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알려진 것은 그가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라는 것뿐이다. 뒤이어 8년간 시민들을 위한 미디어교육과 독립영화 지원을 담당하던 ‘미디액트’가 아예 영상미디어센터 공모전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영진위의 공모제에 대한 논란은 더욱 고조됐다. 그런데도 영진위는 시네마테크전용상영관이 아닌 버젓이 운영 중인 ‘서울아트시네마’의 사업자 모집 공고를 강행하며 파국을 자초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들을 선정하고 소개하는 시네마테크 중 최초로 국내 비영리적 시네마테크 전용관으로 출범했었다.
| ###IMG_0### |
| 공모제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 인디스페이스는 ‘We will be back’ 을 남기고 스스로 폐관했다. |
독립영화계를 떠도는 ‘공모제’의 망령
영진위는 본래 김대중 정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설립된 기구로 600억 원대 규모의 예산을 집행하고 있다. 사업과 지원의 범위는 영화 전반에 걸쳐있지만, 그들의 지원이 독립영화계에 가지는 의미는 조금 더 남다르다.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의 활동가 허경 씨는 “상업적인 이익만을 생각해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전하는 독립영화들에는 산업 메커니즘만으로는 지켜질 수 없는 사회적 가치가 있다. 이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세금으로 독립영화를 지원하고 진흥하는 기관이 영진위”라며 “이제까지 영진위는 한국독립영화협회로 대표되는 독립영화진영과 파트너십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잘 해왔던 편이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현재의 영진위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하고 있지 못하다”고 선을 그었다. 비판의 핵심에는 영진위가 최근 강행하는 일련의 ‘공모제’가 있었다. 공모제를 통한 사업자 교체의 뜻을 비친 것은 강한섭 전 영진위원장이 시작이었다. 그는 독립영화전용관 사업자를 공모제를 통해 교체하려다 영화계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진성호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영진위에 특정 인물이 포진해서 특정 집단에 지원이 집중됐다”고 지적한 것에 유인촌 문화부장관이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강 전 위원장의 공모제 야욕에 힘을 실어줬다. 이 꿈은 현 조희문 영진위원장에 의해 이뤄졌다. 언급한 바와 같이 독립영화전용상영관, 영상미디어센터, 시네마테크전용상영관 등의 사업자 선정을 위한 공모제가 잇따라 실시됐기 때문이다. 영진위가 지원하는 사업의 사업자를 공모제를 통해 영진위가 직접 선정한다는 방침은 일견 타당하지만, 속내를 아는 관계자들은 “공모제가 도입될 근거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공모제를 영진위가 주체한다는 것 자체가 독립영화 사업 지원이 발생한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미숙한 행정이라는 것이다. 문화연대 오윤아 씨는 “현재 문화계의 많은 위탁사업들은 애초 정부가 육성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민간차원에서 활동한 단체들에 의해 축적된 컨텐츠의 중요성을 정부가 인식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하게 된 것”이라며 “영진위가 지원 여부를 결정할 수는 있어도 그 사업자의 주체를 바꾸는 권한은 있을 수 없다”며 공모제 자체에 정당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미디액트 소속 최은정 씨 역시 “우리가 제안한 공공서비스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 운영과정은 파행적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박힌 돌을 빼낸 굴러온 돌, 면면이 시원찮네이전까지 영상미디어센터사업을 8년간 담당했던 미디액트는 1년 간의 사업평가를 토대로 재계약을 맺는 형식으로 사업자 자격을 유지해왔다. 그들은 공모제로 선정 방식이 바뀌자 한독협과는 별개의 자격으로 공모제에 참여했지만 탈락했다. 공모 1차에서 영진위는 “적정 단체가 없어 재공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공모 2차에서 사업자에 선정된 단체는 ‘시민영상문화기구’라는 홈페이지조차 없는 신생 단체로, 소장을 맡고 있는 김종국 홍익대 겸임교수는 조희문 현 위원장이 설립한 문화미래포럼이라는 단체의 사무국장이었다. 조희문 현 위원장이 위원장이 되기 전, 문화미래포럼은 당시 영진위까지 ‘좌파’로 규정하고 영진위 역할을 축소할 것을 주장한 전력이 있던 단체다. 선정된 사업자와 위원장의 은밀한 관계에 대한 의심은 민주당 최문순 의원에 폭로로 확신으로 바뀌었다. 최 의원에 따르면 적정단체가 없었다던 1차 공모에서 4등을 차지한 문화미래포럼의 사업계획서가 2차 공모에서 사업자로 선정된 시민영상문화기구의 사업계획서와 4장을 제외하면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었다. 이는 사업계획서 심사의 공정성을 전혀 신뢰할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전국미디어네트워크운동의 허경 씨는 “똑같이 카피해 온 보고서의 내용도 한심하다. 퍼블릭 엑세스라는 단어가 단 한 차례도 사용되지 않은 보고서에서 퍼블릭 엑세스를 잘 구현할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심사위원단의 능력이 놀랍다”며 사업계획서 심사가 선정된 단체의 역량을 확인하지 못했음을 비꼬았다. 최문순 의원은 보도 자료를 통해 독립영화전용상영관의 공모과정에서 “사업자가 만장일치로 가결됐다고 쓰인 심사보고서 역시 조작된 것”이라며 사업자 선정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최 의원은 심사의원들이 항목별 점수 역시 명백히 실상과 동떨어진 채점결과라고 주장하며 조희문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사업에 참여한 당사자 미디액트 측은 “납득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결과”라는 입장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강한섭 위원장이 공모제를 주장하며 실시한 사업평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미디액트 측은 “공모제 도입 자체에 대한 논의나 합의절차가 부족했지만 공정한 과정을 거쳐 경쟁할 수 있다고 해서 참여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며 강하게 반발하며 현재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공모로 전환하겠다는 정책적 변경에 대한 근거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짧은 시간 내에 졸속으로 시행되는 공모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장기비전도 제시하지 않는 정책은 문화예술의 지속성 사업이라기보다는 요식행위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 허경 씨는 “공모제와 사업자에 대한 평가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이전 사업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한 단체가 오래 했다면 왜 오래했고 다른 단체는 왜 참여하지 않았는지를 명확히 밝히고 다시 정책을 만들어야하는데 이 과정이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미디액트 측은 영진위와의 면접심사 현장에서 “오래했으니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모제 전환의 이유가 단순히 ‘한 사업자가 오래 했기 때문’이라는 것뿐이라면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허 씨의 입장이다.
| ###IMG_1### |
| ‘돌아와, 미디액트’ 회원들이 2월 1일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오는 조희문 위원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
누구를 위하여 영진위는 ‘삽질’을 하나?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은, 영진위가 왜 공모제 전환을 통해 기존 사업자들을 쫓아내려 하는가다. 단순히 영진위원장이 속한 단체를 사업자로 선정하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납득이 어려운 부분이 많다. 미디액트 김명준 소장 역시 영진위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사업자를 교체하는 이유에 대해 “독립영화 죽이기라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알지만 잘 모르겠다”는 입장이었다. 미디액트의 최은정 씨는 “인건비를 지원받는 사업이 아니라, 사업비를 지원받는 것으로 사업 진행상 생기는 수익금으로 월급을 해결하긴 하지만 이조차도 높은 액수가 아니고, 수익도 많이 나지 않는다”며 “헌신적인 활동이 필요한 사업인데 왜 여기에 문화미래포럼 출신의 인사들이 욕심을 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제적 이득이 없는 사업에 편법도 동원하면서까지 사업을 몰아주며 ‘사서 욕을 먹는’ 것에 대해 ‘정치적 코드’가 있거나 단순히 오래 살기 위해서라는 시덥잖은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화연대 오윤아 씨는 “국정감사 당시 예산을 몰아주지 몰라는 한나라당 의원의 지적과 유인촌 장관의 수긍을 현 영진위의 행보와 완전히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운을 뗀 뒤 “무리수와 편법으로 점철된 공모를 강행하는 것 자체가 정권의 외압에 따르겠다는 제스쳐로 보이고, 이는 문화예술에 대한 기본적인 자신들의 논리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과 같다”고 평가하며 영진위의 지나친 정치적 행보를 비판했다. 영진위의 현 행보를 비판하는 이유가 영진위의 정치색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정권이 바뀜에 따라 한 사회의 국가권력과 행정권력의 정책지향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책지향이 변화하더라도 사업 추진의 일관성, 합리성, 그리고 민주성은 지켜져야 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 허경 씨는 “정치적·비정치적 대결구도를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충분히 논쟁이 가능한 일이다.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이 합리적인지, 이것이 독립영화의 가치와 문화의 다양성을 유지하는데 적절한 정책인지를 토론하는 민주적인 과정이 부재하고 사업주체의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문화연대 오 씨 역시 “과도한 정치적 논리에 의해 자율성이 침해받고, 문화의 다양성이 훼손될 경우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영화계 종사자가 아니라 영화를 즐기는 관객”이라며 허 씨와 뜻을 같이 했다. 영진위를 비판하는 프레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영화 사업주체들의 자율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셈이다.
| ###IMG_2### |
| ‘시네마테크는 관객인 우리가 공모한다.’ 서울아트시네마를 지키기 위한 모금이 시작했다. |
노인 교육생이었던 조경자 씨는 팔십이 넘은 나이에 미디액트의 교육덕에 2008년에는 라는 영화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크고 작은 영화제들도 가게 됐다. 조 씨는 “이 과정에서 진짜 제 2의 인생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며 그 때를 회상했다. 이어 조 씨는 “‘내 인생이 이렇게 바뀔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너무 서글프고 가슴이 아프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재충전할 수 있게 해준 이 사람들과, 무엇보다 노인들의 정서를 살려주는 사람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다”며 미디액트의 사업자 선정 탈락을 안타까워했다. 조경자 씨가 영화감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사람이 미디어를 이용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퍼블릭 엑세스라는 개념을 확산시키기 위한 미디액트 측의 활동 덕이었다. 사업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운영 주체는 무리하게 바꾸는 영진위는 이용 주체에 대한 배려에는 철저히 ‘아돈케어’로 일관 중이다. 그들에게 외면 받은 시민들은 ‘돌아와 미디액트’라는 조직을 조성하거나 제 손으로 시네마테크를 공모하겠다며 5000만원이 넘는 돈을 모급하는 등 대역전활극을 준비 중이다. “저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어준 미디액트를 잃고 싶지 않아요 끝까지 싸울 겁니다.” (이게 미디액트측이 메일로 준 인터뷰내용인데, 직접 전화걸어서 따는 게 나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