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를 고시로 내 몰았나

3월 2일 제 40기 사법연수원생 입소식장.고시 합격의 기쁨도 잊고 또 다시 치열한 경쟁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올해 1월 초, 25년째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40대 고시생 류모 씨가 자신의 자취방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신림동고시촌에 살던 류 씨는 숨진 지 10일이 지난 후에야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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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제 40기 사법연수원생 입소식장. 고시 합격의 기쁨도 잊고 또 다시 치열한 경쟁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올해 1월 초, 25년째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40대 고시생 류모 씨가 자신의 자취방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신림동고시촌에 살던 류 씨는 숨진 지 10일이 지난 후에야 발견됐다. 작년 10월 서울 강남에서는 30대 무직자 정모(32) 씨가 ‘세상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거주하던 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불길을 피해 빠져나오는 투숙자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6명을 숨지게 한 사건도 있었다. 고시원의 구조가 폐쇄적이고 밀집돼 있기 때문에 발생한 참사였다. 고시원이 화재에 취약하다, 성범죄에 노출돼 있다는 지적은 매년 되풀이되지만 나아진 게 없는 현실이다. 언론은 심심찮게 고시촌의 열악함에 대해 보도한다. 지금도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고시촌’이란 키워드를 입력하면 핑크빛 미래보다는 사건 사고에 관한 기사를 접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사회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의 고시 준비는 증가하는 추세다. 실제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행정고시 응시자는 행정직과 기술직을 포괄해 1만384명에서 1만2386명으로 증가했고, 외무고시는 1천120명에서 1천393명, 사법고시는 1만5446명에서 1만7829명으로 증가해 5년간 국가고시 응시자는 2만6950명에서 3만1608명으로 총 4천658명 증가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정말 관료직에 뜻이 있어서 좁은 문으로 달려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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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부터 2008년까지 국가고시 응시자 수의 변화.

취업난, 고시폭풍을 몰아오다

최근 고시열풍의 원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경제위기로 인한 취업시장의 축소, 실업률 증가 등을 지적한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올해 전국 2월 말 실업자 수는 92만4000명으로 지난 해 같은 기간에 비해 10만6000명이 더 늘어났다. 청년실업률은 8.7%로 작년보다 1.4% 상승했다. 바야흐로 청년실업자 백만 명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최근 정부는 일자리 마련 대책으로 4조 9천억을 투입해 55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는 공공근로 또는 임시직 아르바이트가 대부분이어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경기 부양책인 잡 셰어링(Job sharing)은 임금삭감 또는 근로시간 단축 등을 통해 일자리를 유지하거나 창출하는 것으로, 고통을 분담해 일자리를 나눠 갖자는 개념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기업 근로자는 줄고 저임금 근로자만 늘리는 정책이라는 비판이 있다. 서이종 교수(사회학과)는 고용시장이 불안해지고 취업 문턱이 높아진 원인을 한국 기업이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한 기업이 성숙기에 접어들면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기존의 인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려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철강, 조선분야에서는 이미 성숙기를 지났기 때문에 기업의 인재 수요가 거의 없다. 정보통신산업도 성숙기에 접어들어서 삼성, LG등의 기업이 구직자에게 인기는 있지만 채용 인원은 대폭 감소한 상태다. 당분간 지금과 같은 금융위기가 지속되면 실업률 증가는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근식 교수(사회학과)는 “이러한 취업난 때문에 학생들이 고시 시장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과거에는 명문대를 졸업하면 기업에 들어가기 쉬웠지만 요즈음엔 고학력 실업자들이 수두룩해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 사기업의 고용인원이 감축되어 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고시에 합격하는 것만큼 어려워진 반면, 사법시험은 천여 명을 뽑기 때문에 옛날보다 많이 수월해진 편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같은 비용이 든다면 합격 후 고용 안정이 보장되는 고시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시만 합격하면 인기 만점 신랑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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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오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정적인 직종의 배우자가 인기임을 알 수 있다.

고시에 합격하면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 거라는 기대도 학생들을 고시생으로 만든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생은 “고시 합격생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도 고시를 준비하는 원인 중 하나다. 결혼을 잘 하려고 고시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시에 합격하면 더 좋은 조건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든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시에 합격한 후 공무원이 되면 많은 예비 배우자들의 선호대상이 된다. 결혼정보업체 듀오에서 2005년에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배우자 직업 선호 순위에서 공무원, 공사직 종사자는 신랑감으로는 1위, 신붓감으로는 2위를 차지했다. 결혼정보회사 ‘행복출발더원’의 오미경 홍보팀장은 “고시생은 결혼정보회사 회원가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고시에 합격한 후에는 인기 최고의 배우자감이 된다”고 말했다. 오 팀장은 “요즈음에는 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희소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법조인이나 행정 관료는 다른 직종과 비교해 봤을 때 인기가 많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최정본(법학 06) 씨는 결혼정보회사에서 법조인이 선호되는 현상에 대해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법조인이 되면 부와 권력, 명예를 모두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고시 합격생을 마치 장원급제한 사람처럼 바라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안정적인 관료제, 고시열풍에 한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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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종 교수는 “고시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지만 현재 한국의 경제위기를 고려하면 안정적인 직업을 찾는 학생들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관료에게 직업적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지만 한국 관료제는 지나치게 보수적이다”라고 서이종 교수는 말한다. 서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국민들에게 보다 투명하고 질 높은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공무원들이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에 따라서 공정하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공무원은 외압에 의해 법을 위반하는 자의적인 개입을 스스로 차단하고 규칙에 근거해서 행동하도록 안정성이 확보돼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국가든 사기업보다는 국가 공무원이 상대적으로 직업적 안정성이 더 높다. 그러나 한국은 사기업과 국가조직 종사자간의 안정성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게 문제다. 사기업 종사자의 직업적 안정성은 노조의 단결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노조의 감시가 있으면 근거 없는 해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노조가 발달한 유럽의 경우 사기업 직원과 공무원 사이의 직업적 안정성이 크게 차이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노조가 미약하기 때문에 사기업 종사자들이 불안하게 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무원을 선호하는 현상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서 교수는 “미래에는 한국 관료제가 보다 개방화된다. 따라서 과거에는 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과장에서 국장, 차관보까지 단계적으로 승진하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외부 인재도 고위 관료직에 채용할 수 있도록 공모제를 통해 관료를 뽑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러한 개방화는 행정 고위 관료가 되는 길을 다양하게 한다. 연구원이나 사기업 간부, 대학 교수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관료 공모에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이제 고시의 역할과 의미는 갈수록 축소될 것 ”이라고 말했다. 경제위기, 어쩔 수 없는 고시 선택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을 지나 이구백(이십대 90%가 백수)의 시대로 접어드는 요즈음, 취업시장 현장에 있는 학생들은 한국의 경제위기를 절실히 실감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하는 한 학생은 “취업시장에 섣불리 뛰어들기엔 지금 한국의 경제상황이 너무 불안하다. 그래서 차라리 준비가 조금 힘들지라도 붙고 난 후에는 안정적인 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상당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꿈보다도 안정적인 직업을 얻기 위해 고시를 준비한다. 그러나 서 교수는 “학생들이 고시를 준비하는 것이 당장은 안정적인 선택일지 몰라도 장기적인 미래를 고려해본다면 경쟁력 있는 선택은 아니다”고 말했다. 지금 고시생들은 한국 관료제의 변화양상을 인식하지 못하고 현직 선배만을 모델로 고시 준비를 해서 정확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서 교수의 설명이다. 서 교수는 “지금도 행정 부처 국장이 사기업 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고등 관료의 이직률이 높아지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현재 대학생들이 장년이 돼 한창 활동할 시기에는 더 활발해질 것이다. 그 때는 고시에 합격해서 관료로 일한 경험이 그다지 가치 있는 경력으로 인정받지는 못할 것이다. 행정 조직 내부에서는 관료 시절 쌓은 지식을 활용할 수 있지만 밖에서는 활용가치가 적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서 교수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고시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고시를 선택하는 이유는 당장 불황기 상황에서 상대적인 직업의 안정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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