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인류가 거인과 대항해 싸우는 만화인 ‘진격의 거인’이 인기다. 국내에서는 2004년 상영한 르네 랄두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판타스틱 플래닛’도 무력하게 거인에게 당하던 인간이 이에 맞서 들고 일어난다는 소재 면에서 ‘진격의 거인’과 유사하다. 하지만 영화는 만화와 달리 다소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와 느린 템포로 거인과 인간, 타자들 간의 갈등과 공존이라는 다른 주제를 풀어간다.
인간이 주인이 아닌 행성
‘판타스틱 플래닛’의 첫 장면은 헐벗은 여인이 아기를 안고 미지의 행성을 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인은 무엇으로부터 쫓기듯 뒤를 돌아보며 품의 아이와 함께 달아나지만 언덕을 오르던 중 거대한 푸른 손이 나타나 그녀를 언덕 아래로 굴려버린다. 다시 언덕을 오르다 굴러 떨어지기를 수차례, 푸른 손은 그녀를 멀리 튕겨버리고 달아나는 앞길을 바위로 막아 희롱한다. 결국 놀이에 질렸는지 손은 여인을 높이 들었다가 그대로 놓아버리고, 여인은 죽고 만다. 이 미지의 행성 ‘이얌’의 주인은 자신들을 ‘트라그’라 부르는, 인간보다 수십 배 크고 훨씬 긴 수명을 지닌 푸른 거인들이다. 그들이 ‘테라’라 부르는 행성에서 데려온 ‘옴’이라 부르는 인간은 돋보기를 든 아이 앞의 개미처럼 그들의 놀잇감에 불과하다.
홀로 남은 아기를 아버지와 함께 산책 중이던 트라그 소녀 ‘티바’가 발견한다. 연민을 느껴서인지 티바는 아버지에게 아기를 데려가 기르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트라그의 최대 지도자인 아버지는 “동물을 죽게 놔 둘 수는 없지”라며 허락한다.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기껏해야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 이것이옴에 대해 그들이 보이는 최대한의 호의다. 티바의 집에서 아기는 목줄(트라그들의 기술이 적용된 것으로, 실제 줄이 달리지는 않았으나 목걸이와 짝을 이루는 팔찌의 다이얼을 돌리면 모종의 힘으로 인해 팔찌가 있는 쪽으로 목걸이가 끌려온다)이 채워진 채 ‘테어’라는 이름으로 트라그소녀의 애완동물로 살아가게 된다. 그가 이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트라그 꼬마는 옴 여인을 장난감처럼 다룬다. 마치 개미나 잠자리와 같은 곤충을 가지고 노는 듯한 태도다.애완동물이자 유해동물테어를 집에 데려간 티바는 그를 무척 아끼며, 소중한 친구로 삼는다. 티바는 테어에게 옷을 입혀주고 인형 집과 놀잇감을 주며, 공부를 할 때, 잠을 잘 때, 트라그 특유의 풍습인 명상을 할 때에도 테어를곁에 둔다. 테어는 티바로부터 말을 배우고, 티바가 학습용 헤드폰으로 공부를 할 때 어께너머로 이얌의 지리와 생태, 환경 등을 배운다. 하지만 티바가 테어에 대해 보이는 우정은 동등한 인격을 지닌 친구로서의 존중만은 아닌, 흔히 아이들이 개나 고양이, 혹은 인형 등에 대해 보이는 그것이기도 하다. 테어가 달아나려 하면 티바는 목줄을 감아 그를 구속한다. 짓궂은 장난으로 테어를 괴롭히기도 하고, 친구들이 기르는 다른 ‘애완’ 옴들과 싸움을 붙이기도 한다.한편 티바의 아버지가 속한 의회에서는 ‘야생’ 옴들의 처분을 두고 논의가 벌어진다. 트라그들의 생산시설이 야생 옴들에 의해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한 지도자가 옴들이 높은 지능을 가졌다고 말하지만 과학자이자 최고 지도자인 티바의 아버지 싱에 의해 부정된다. 지도자들은 “그들이 지능을 가졌고 가지지 않았고는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생산시설에 피해를 준다는 것”이고 ‘길들여진’ 옴과 달리 피해를 입히는 ‘야생’ 옴을 현재 3주기에 한 번씩 박멸하는 것 외에 더 효과적인 구제방법이 없는지를 논의한다.이 영화에서 옴이란 지성을 가진 주체가 아닌, 행성의 지배자인 트라그의 입맛에 따라 애완 동물인 좋은 옴과 유해동물인 나쁜 옴으로 구분되는 존재다. 나쁜 옴은 제거돼야 한다. 옴이라는 명칭조차 그들이 지은 이름이다. 티바는 테어와 친구의 옴을 싸움 붙인다. 과거 유행하던 디지몬 베틀이 떠오른다.야생으로티바는 점차 나이를 먹자 더 이상 테어를 예전처럼 대하지 않는다. 친구와 애완동물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테어를 기르지만 더 이상 명상을 하거나 공부를 할 때 테어를 곁에 두지 않는다. 배움에 대한 갈증을 느낀 테어는 티바의 학습용 헤드폰을 가지고 집을 나온다. 테어가 없어진 것을 뒤늦게 안 티바는 팔찌를 이용해 테어의 목걸이를 당기지만 때마침 나타난 야생 옴 소녀가 테어의 목걸이를 끊어 그를 구해준다. 테어는 ‘큰나무 옴’이라 불리는 소녀의 부족에게 받아들여지고, 티바가 입힌 애완 옴의 옷을 벗고 그들의 옷을 입게 된다. 큰나무 옴들은 ‘판타스틱 플래닛(이얌의 위성)’을 숭배하는 주술사와 지도자가 지배하는 샤머니즘적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테어가 가져온 헤드폰을 통해 큰나무 옴들은 점차 트라그들의 지식을 배운다. 공원에 있는 큰 나무에서 사는 큰나무 옴들은 트라그들의 물자를 훔쳐서 살아가며, 구멍덩굴에 사는 옴들과는 적대관계다. 트라그들의 글과 지식을 배우게 된 그들은 훔쳐온 물건을 종류별로 구분 짓게 되었으며, 배운 지식 덕분인지 큰나무를 습격한 거대한 괴조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지식에 대한 열망으로 테어는 자신의 몸보다 큰 헤드폰을 끌고 집을 나온다.박멸이라는 이름의 홀로코스트큰나무 부족의 한 옴이 공원의 벽마다 트라그 말로 ‘옴 박멸’이라 쓰인 것을 발견한다. 한 노인이 과거에 공원의 옴들을 제거하는 것을 봤다고 증언한다. 큰나무 옴들은 불안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초를 배치하면 큰나무 안은 안전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테어는 부족 간 적대관계를 넘어선 동포애를 느꼈는지 밤에 몰래 큰나무를 빠져나가 구멍덩굴로 간다. 테어는 구멍덩굴 옴들에게 사로잡혔고, 자신을 심문하는 그들의 지도자인 노파에게 머지않아 있을 ‘박멸’에 대해 알린다. 노파는 이를 믿지 않으며, 그를 구속한 채 가둬둔다.그러나 이튿날 새벽, 옴 박멸이 시작되자 노파는 테어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그를 풀어주고 함께 달아난다. 트라그들은 옴들을 추적하기 위해 훈련시킨 옴들을 이끌고, 옴 제거용 살상가스를 발사하는 기계들을 이용해 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3주기에 한 번 실시한다는 ‘박멸’이 시작된 것이다. 오직 산업적 필요와 효율성에 의거한 기계적 학살이 벌어진다. 살아남은 옴들은 큰나무 옴과 구멍덩굴 옴 할 것 없이 공원 담벼락의 틈을 통해 공원을 빠져나간다. 산책을 하며 야생 옴이 비위생적이며 빨리 번식한다며 옴 박멸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던 트라그 두 명이 그들을 발견하며 개미를 밟아죽이듯 그들을 학살한다.동료들의 죽음에 분노한 옴들은 트라그를 공격해 한 명을 쓰러뜨리고 유례없는 옴들의 저항에 놀란 다른 옴은 달아난다. 이 항쟁에서 큰나무 옴들의 지도자가 죽자, 구멍덩굴 노파의 지도하에 살아남은 옴들은 트라그들의 버려진 로켓 처리장으로 피신한다. 로켓 공장에서 그들은 도시를 만들고, 그들에게 합류한 다른 옴들과 함께 헤드폰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트라그들이 지배하는 이얌을 벗어나 판타스틱 플래닛으로 가기 위한 로켓을 건조한다. 화면 중앙의 ‘옴 제거기‘가 원반 모양의 가스탄을 발사해 옴들을 학살한다.옴이 쏘아올린 작은 로켓한편 트라그들의 의회에서는 비상 대책 회의가 열린다. 옴이 트라그들을 공격해 사망자가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박멸 횟수를 한 주기에 2회로 늘리자, 기르는 옴들의 사육과 매매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만들자, 최신예 ‘옴 제거기’를 사용해 야생 옴들을 전부 없애버리자는 의견들이 나온다. 하지만 싱은 옴들이 약탈한 물자들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종류별로 분리된 점 등에 의아해하며 “우리가 그동안 옴들을 해로운 동물로 잘못 알아왔으며 그들을 없애는 것은 큰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라며 의문을 표한다. 싱은상대가 그저 처리의 대상인 해충이 아니라 대화와 소통이 가능한 지성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로켓 처리장의 옴들은 로켓 건조를 마치고 시험대기에 들어선다. 하지만 때마침 트라그들의 대규모 박멸 작전이 시작되고, 그들은 이전보다 더 잔인한 살상무기를 가지고 옴들을 학살한다. 많은 옴들이 죽지만, 테어를 비롯한 일부 옴들이 두 대의 로켓을 타고 탈출에 성공한다. 쇠약해져 그들과 함께 떠나지 못한 노파는 그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판타스틱 플래닛에 옴들만의 행복한 세계를 세우라는 유지를 남기고 임종을 맞는다. 테르와 살아남은 옴들이 탄 로켓이 대학살이 일어나는 로켓 처리장을 빠져나간다.판타스틱 플래닛판타스틱 플레닛에 도착한 테르와 옴들은 그곳에서 거대한 조각상들을 발견한다. 곧 그들은 그 거상들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트라그들은 명상을 통해 이 조각상들과 결합하고 그 상태로 번식과 생명에너지를 얻었던 것이다. 거상들이 짝을 이뤄 춤을 추기 시작하자 그들의 로켓이 밟혀 해를 입을까 두려워진 옴들은 로켓의 무기로 거상들을 파괴한다. 거상이 파괴되자 거상과 연결돼있던 트라그들은 이성을 잃고 혼란에 빠져 트라그들의 사회에 비상이 걸린다.그들은 긴급 의회를 소집해 문명 자체가 위협받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음을 선포하고 옴들이 과학지식을 얻었음을 인정한다. 트라그들은 옴들에게 “파괴를 통해서는 우리 모두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니 평화를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한다”고 제의한다. 페이드아웃 이후 어린 트라그 한 명이 헤드폰을 통해, “지도자 싱의 시대 이후로 트라그 문명은 옴과의 공존을 통해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얌에는 두 개의 위성이 있는데 하나는 원래 있던 판타스틱 플래닛으로 트라그의 명상을 위한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만들어진 것으로 테르라 불리며 옴의 것이다”고 배우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옴들은 자신들의 우주선이 파괴될 것이라는 걱정으로 거상들을 파괴한다.옴과 트라그, 갈등없는 공존이 가능하다면영화가 냉전 시대에 제작되고 상영됐다는 점으로 인해 종종 이 영화는 두 집단과 그 지도자들이 진정 공존하기를 원한다면 화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히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생각나게 했다. 지식과 힘을 쥔 트라그에 의해 인간들은 옴이라는 이름의 타자로 명명되고, 구분당하며, ‘관리’된다. 의회에서 옴들의 지성이 부정당하는 대목은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돼야 한다’라는 마르크스의 발언을 떠올리게끔 했다.이런 맥락에서 옴들이 테르가 가져온 트라그의 지식을 통해 일종의 ‘계몽’을 겪는 내용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인간을 소수자로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감으로 인해 소수자의 관점에서 소수자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트라그라는 다수자가 옴을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생산과 효율의 논리로 ‘박멸’을 정당화하는 장면을 옴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은 섬뜩한 경각심을 줬다.72분의 짧은 영화라는 것을 감안해도 결말부분은 상당히 갑작스러웠다. 옴들이 트라그의 비밀을 밝혀내고 거상을 파괴한 장면부터 호혜적 공존을 이뤘다는 결말까지는 씬이 몇 개 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는 두 집단이 비극적 갈등을 겪고 너무나도 간단하게 화해함을 보여줌으로써 타자와의 화해는 항상 분쟁이라는 대가를 치루고 얻어진다는 메시지를 역설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아닌가 한다. 우리 사회에도 여러 소수자 문제가 만연한 만큼, 억압과 몰이해가 극단적 갈등을 낳기 전에 소통과 공존이 가능하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