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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공사인 한진중공업의 재개발 현장 앞에 마련한 세입자들의 ‘집’이다. |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광명 6동에 도착했다. 용산참사 재판에 다녀온다는 광명 6동 세입자들을 기다리면서 사무실을 찾기 시작했다. 철거대책위 위원장의 설명대로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동안, 상상도 못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길바닥 위에 덕지덕지 얹어놓은 나무판자들 위에는 세입자들의 구호가 난삽하게 덧입혀져 있었다. 비바람을 맞아 색이 바랜 그 구호들은 더러는 자신들을 생활 터전에서 쫓아낸 시공사를 비판하기도 했고, 더러는 용산참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잠깐 사진을 찍기에도 뙤약볕이 내리쬐어 숨 막히는 더위가 엄습하는 그 곳에서, 그들을 만났다. 아무 대책도 없이, 그냥 “나가라” 2006년 6월 30일, 광명 6동에는 아파트 1200여 세대의 건축 사업 인가가 났다. 이어 관리처분 계획이 나던 10월 24일을 세입자들은 이렇게 기억했다. “결정이 나자마자 플랜카드가 바로 걸렸어요. 우리 같은 세입자들은 플랜카드가 걸리고 나서야 이 동네가 재개발된다는 걸 알았죠.” 10여 년 전부터 광명 6동에 재개발이라는 바람이 불었다고 했다. 재개발이 된다, 안 된다 말이 많았고 그래서 이 재개발 소식은 세입자들에게 더욱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정말 이상한 건요, 다른 지역에는 재개발하면 시에서 시찰 나와서 감정평가 그런 것도 받고 하잖아요. 근데 여긴 아무 것도 없었어요. 보상은커녕 보증금도 못 받은 사람이 태반이었어요. 하다못해 이사비용도 주지 않고는 그냥 나가라고만 했어요.”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는 세입자의 말을 철거대책위원회 김순애 위원장이 이어받았다. “전 주거세입자였어요. 집주인이 언제까지 집을 비우라고 하니까, 보증금으로 갈 수 있는 데를 알아봐도 정말 그 돈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이 없는 거에요. 못 나가겠다고, 이사비용을 대주든지, 대책을 세워달라고 했더니 집주인이 용역을 데리고 와서는 협박을 하더라고요.” 이 세입자의 말처럼 광명 6동의 세입자들에게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이주대책도, 영업 손실액 보상도, 임대 아파트도 이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이대로 쫓겨나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런 투쟁의 결과는 철거였고, 조합원이나 집주인들은 그 비용을 고스란히 그들의 피같은 보증금에서 제했다. “애초에 세입자 보상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이런 사람들한테 대책도 검토 않고 개발 허가를 내준 광명시장도 잘못한거지요.” 이곳에서 카센터를 하던 박도철 상공위원장은 감춰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놨다. “10년 쯤 전엔가…그때 다들 어려웠잖아요, 나도 사업에 실패하고 집도 잃고 했지요. 그때 친구들이 흰 봉투에 3천만 원을 담아서 주더라고. 그 돈으로 땅만 있던 이 자리에 건물을 짓고 시설을 들여서 카센터를 하게 됐어요. 보증금이 2천에 시설 들이는 데는 7천만 원 돈이 들었지. 그 뒤로 4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가라는 거야. 땅 주인이 또 교묘한 게, 임대한 사람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무조건 나가야 되잖아요. 그걸 이용해서 시간을 끌더니 계약이 만료되자마자 법원에 명도신청을 한거야. 이렇게 나같이 가진 것 다 잃게 되면 누구나 투쟁할 수밖에 없는 거지.” 용역 깡패 비호하는, 거꾸로 돌아간 세상 박 위원장과 같이 삶의 터전을 잃고 투쟁에 뛰어든 세입자들에게 철거 용역에 대해 물으니 그래도 인터뷰 내내 곧잘 웃던 세입자들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자신들의 집을 부수고 주먹을 휘두른 아들 뻘 되는 사내들에게 그들은 굴복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잊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서러웠던 것은 그런 용역들을 국가가 비호했다는 점이었다고 세입자들은 입을 모았다. 2008년 2월, 광명 6동에 있던 무허가 판자촌에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5분 거리에 있던 소방서에서 소방차가 나오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고, 그 소방대원들은 판잣집들이 타는 것을 멀찌감치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강제집행(철거) 때 세입자들을 쫓아내는 데에 물을 다 써버려서 그런가보다”라며 세입자들은 허탈하게 웃었다. 실제로 2007년 10월 10일 명도집행 과정에서 수백명의 경찰과 용역이 투쟁하는 세입자들을 겨냥한 물대포로 소방차를 활용했었다고 세입자들은 전했다. 경찰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강제집행이 있으면 세입자들을 쫓아내고 철거 용역을 들여보내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용역이 폭력을 휘두르는 순간에도 경찰은 그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한 세입자는 “경찰들은 우리가 맞는 걸 보면서도, 맞아서 다쳤으면 진단서를 끊어 와서 고발하라고 했다”며 울분을 토했다. 다른 세입자도 덧붙였다 “우리나라가 이런 곳 인줄 정말 몰랐어요. 다른 데서는 안 되는 일이, 재개발 그 안으로만 들어오면 다 용납되고 눈감아주는 거야.” 이런 상식 밖의 상황은 지난 2년간 세입자들에게 매일같이 되풀이됐다.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용역들이 공가를 포크레인으로 부수는데 하마터면 사람이 죽을 뻔 했었어요. 근데 그 다음 날에 용역이랑 조합원들이 와서, 잘 부쉈다고 박수치고 깔깔거리면서 좋아하더라니깐.” 한 세입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직돼있던 다른 세입자들의 표정이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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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생과 재수생인 두 자녀를 포함한 네 식구가 산다는 김명숙 씨의 집이다. 학생인 자녀들이 공부하기엔 너무 어둡고, 네 식구가 눕기에는 너무 비좁다. |
마지막 강제 철거 이후, 세입자들을 괴롭히던 용역은 떠나갔지만 악재는 멈추지 않고 날아들었다. 인도 위에 임시 거처를 짓고 살다 보니 주소가 없다는 이유로 주민등록을 말소당한 것이다. 주민등록이 말소되면서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기초생활보장 수급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신용회복지원센터에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대출도 놓쳤다. 그런데 세입자들만 몰랐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들이 느끼는 배신감은 배가됐다. “구청 공무원 말이, 조합장이 시장에게 왜 우리들의 주민등록을 빨리 말소시키지 않느냐고 항의했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더 놀란 게 뭐냐면, 내가 알아보니까 주민등록이 말소됐더라도 실거주지에 산다는 걸 구청장이나 시장이 확인만 해주면, 임시로 수급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거에요. 구청 직원이 딱 잡아떼던 걸 생각하면 속았다는 기분도 들고 분했죠.” 집과 가게, 우리가 바라는 전부 인명을 구한다는 소방대원들, 시민을 보호한다는 경찰, 국민을 위한다는 공무원. 이들 중 아무도 철거민을 사람 대접해준 사람은 없었다. 이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한 세입자의 말을 빌리자면, “다들 귀막고 입막고 눈 딱 감고 있다.” 세입자들은 ‘평행이동’을 원한다고 했다. 예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집을 잃은 사람에게는 살 곳을, 상가를 잃은 사람에게는 장사할 곳을 되돌려주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재건축이 완료되면, 또다시 용역이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김순애 위원장은 담담하게 답했다. “우리는 주거권과 생존권을 보장받을 때까지 여기서 끝까지 버틸 거에요. 언제 끝난다는 답도, 언제까지 투쟁하겠다는 말도 할 수 없어요. 정말 갈 곳이 없어서 여기 남은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