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일본, 밟으면 꿈틀한다?!

지난 8월 30일 일본, 해가 서쪽에서 떴다.영원한 승자일 것만 같았던 자민당이 54년 만에 제 1여당의 자리를 민주당에게 내주는 역사적인 정권교체가 발생한 것이다.총선거 결과 민주당과 자민당이 차지한 의석수는 각각 308석과 118석.공고했던 ‘자민당 55년 체제’의 아성이 하루 만에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8월 30일 일본, 해가 서쪽에서 떴다. 영원한 승자일 것만 같았던 자민당이 54년 만에 제 1여당의 자리를 민주당에게 내주는 역사적인 정권교체가 발생한 것이다. 총선거 결과 민주당과 자민당이 차지한 의석수는 각각 308석과 118석. 공고했던 ‘자민당 55년 체제’의 아성이 하루 만에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폐허의 자리에서 일본은 새로운 일본으로 거듭날 도약을 준비 중이다.‘55년 체제’ 붕괴: 자민당에 대한 불만이 민주당에 대한 불신을 압도 이번 총선거에서 민주당의 압승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일본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자민당의 55년 체제는 1955년 일본의 보수 정당들이 자민당으로 합당돼 당시 개혁 진보 성향을 갖고 있던 사회당과 ‘보혁 대결구도’를 이루며 시작됐다. 자민당은 이후 한국전 특수로 인한 고도경제성장을 등에 업고, 1993년 예외적인 기간을 제외하고는 54년간 과반수의 의석을 유지해 왔다. 과반의석을 위해서는 정책적 정합성이 전혀 없는 정당과도 연합정권을 구성하는 자민당의 태도와 안정 지향적인 일본 국민들의 성향이 맞물려 빚어낸 결과였다. 이런 까닭에 과거 일본 정당제는 거대 여당과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야당의 대립 구도라며 ‘자민당 1.5당 지배 체제’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렇다면 이번 총선에서 54년 동안 장기집권에 성공해온 자민당이 민주당에 대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대학교 일본연구소의 최희식 교수는 “이제껏 국민들이 자민당에 대해 갖고 있던 여러 분야의 불만이 임계점을 넘었음이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적인 예로, <NHK>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민주당이 압승한 이유에 대해 조사 대상자 52%가 “자민당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반면 민주당의 메니페스토와 하토야마라는 새 총리에 대한 기대감은 각각 10%와 3%에 불과했다. 이를 두고 최희식 교수는 “민주당 자체에 대한 인기보다는, 자민당에 대한 불만이 민주당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정치 집단에 대한 불안감을 압도했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자민당에 대한 불만: 부정부패와 고이즈미의 개혁정책 일본인 유학생 미나(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 씨는 “정치 부패가 너무 심하다. 뇌물과 관련한 문제가 이전부터 많았다. 관료들은 지나치게 권력을 갖고 있고, 기업과의 유착도 심각한 수준”이라며 자민당에 대한 불만으로 부정부패를 꼽았다. 자민당과 관료들의 고질적인 부패문제에 대해서 최 교수는 “자민당 장기 집권 아래에서 나타났던 철의 삼각형이라고 불리는 정(政)관(官)업(業) 삼자 체제 아래에서 부정부패가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 구도 아래에서 자민당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서 선심성 정책을 펼치며, 경제적 이익을 자신들의 지지 기반이었던 농촌에 흘려주는 이익 유도 정치를 펼쳐왔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정부와 관료 시스템과 이익 유도 정치로 인해 일본은 세계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과 동시에 국가 재정 파탄에 직면하게 됐다. 자민당의 구조적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고이즈미 전 총리의 자민당과 개혁과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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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민주당 길거리 유세에 참여했던 하토야먀 대표

일본 학술 진흥회의 특별 연구원으로 프레시안에 칼럼을 연재 중인 김성민 씨는 고이즈미의 당시 인기에 대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개혁’으로 포장한 고이즈미의 전략과, 상업적인 미디어가 만들어낸 개인의 이미지가 어우러진 절묘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경제를 살리겠다는 고이즈미의 호언은 아무 것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실제 고이즈미는 파탄난 국가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증세 없는 재정 재건’이라는 슬로건 아래 복지 부문의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동시에 기업의 활동을 지원하여 고용을 촉진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노동 유연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전통적 지지 세력이자 복지 제도의 수혜자인 노년층이 자민당을 외면하고, 비정규직의 젊은 층들이 부동층이 되어 자민당에 대한 불만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일본이 자랑하던 복지제도와 종신고용제도가 사라지면서, 일본 노년층과 젊은층이 극도의 불안정한 상황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이 점에 주목한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남기정 교수는 “이번 선거에서 55년 체제에 대한 불만과 향수가 동시에 표출되는 역설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은 55년 체제가 가져온 부정부패, 정부의 비대화, 저성장에 대한 불만이 있다. 그와 동시에 현재 일본인들이 과거 자민당이 보장하던 안정적인 사회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남기정 교수는 “결과론적으로 고이즈미의 개혁은 55년 체제의 문제와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통적인 자민당 지지자들이 자민당을 외면하게 만든 자민당 몰락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며 자민당 집권 체제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붕괴될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했다.불안정한 고용 상황과 격차사회 속에서 신음하는 일본의 청년들 고이즈미의 노동 유연화 정책은 특히 젊은 층들의 고용환경을 크게 악화시켰다. 고이즈미는 파견노동법을 도입하여, 파견회사가 비정규직 사원을 회사에 중개시켜주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는 기업이 마음대로 고용과 해고가 가능한 비정규직의 양산에 일조했다. 실제 고이즈미가 집권했던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정규직이 190만 명이나 감소되고 비정규직은 무려 330만 명이 증가했다. 또한 15~30세의 고용구조를 조사한 후생성의 자료는, 2003년 같은 경우 2200만 명의 고용자 중에서 217만 명이 비정규직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희식 교수는 이 자료를 “후생성의 통계 조사는 내각 조사와 3배 정도 차이가 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로는 15~35세의 고용 인구 중에 30% 정도가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일본의 비정규직 문제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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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세의 고용인구 가운데 30%가 비정규직에 종사한다고 볼 수 있다”며 일본의 고용환경에 대해 이야기 중인 최희식 교수

현재 일본에 거주 중인 김성민 연구원 또한 이번 선거를 “못 살겠다, 갈아보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는 “11년 연속 자살자 3만 명 이상이라는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사회에 대한 불안과 불만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고용불안이 장기간 지속돼 왔고, 파견사원 문제로 대표되는 비정규직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일본의 고질적인 병폐였기 때문이다. 김 연구원은 “유명 외국계 기업에 다니던 지인이 3월 말로 해고된 후 작은 출판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그 5개월간 슈퍼마켓 창구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유지해야했다”며 작년 말 ‘리먼사태’ 당시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아키하바라 사건’ 도 언급했다. 한 20대 남성이 차를 몰아 아키하바라 거리에 돌진했다. 사람을 치고 미리 준비한 전투용 칼로 사람들을 마구 찔러 무려 7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것이 아키하바라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본 젊은이들의 극단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회적 자살’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김 연구원은 범인이 파견사원을 전전하던 사람이었다며 “당시 사건에 대한 분노와 별개로,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상태로 몰고 갔는지 이해가 된다는 당시 젊은 사람들의 반응에 놀랐다”고 말했다.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어느 정도 이상의 생활수준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일본 사회의 건전한 믿음은 이미 깨졌다. 아무리 일해도 가난한 ‘워킹 푸어’족이 등장하고, 한 번 비정규직으로 취직하면 언제 정규직이 될지 까마득하다. 쫓겨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갈 곳을 잃고 ‘넷카페 난민’이라고 불리면서 PC방과 같은 넷카페에서 생활한다. 더욱 젊은이들을 좌절하게 하는 것은 이 불안정하고 가난한 상태에서 벗어날 패자부활전이 존재하지 않는 ‘격차사회’의 구조다. 우리나라의 양극화는 일본에서 격차사회라는 단어를 통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남기정 교수는 격차사회에 대해서 “격차의 고정화가 진행되고 있다. 일본은 격차 사회가 아니라 계급사회”라고 주장한 한 일본 사회학자의 말을 소개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 추구해온 일본의 무계급 사회가 격차사회의 물결 속에서 점점 계급화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였다. 남 교수는 “예전에는 비정규직이 된 것은 자신의 선택일 뿐 노력하면 언제든 정규직도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제도적으로 비정규직이 정규직 사회로 진입하는 기회가 거의 없다”며 격차가 심화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즉 고이즈미 식의 개혁 정책은 젊은 층의 노동 생활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쳤지만, 이들을 위한 사회 안전망은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이런 일본의 급격한 사회 안정성 저하가 본래 어느 당도 지지하지 않던 젊은 층을 민주당 지지로 몰아갔다고 전문가들이 추측하고 있는 이유이다.이번 선거에서 일본 젊은이들이 가지는 의미 그러나 본래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일본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처지가 불안해졌다는 이유로 이번 선거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권의 교체를 이뤘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여기에 대해 최희식 교수는 “고이즈미 개혁이 가져온 고용불안성이나 격차사회로 불리우는 사회적 분열의 강화, 사회적 안정성의 저하 등의 불만족스러운 사회 구조를 재건축하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이런 현상이 얼마만큼 조직화 돼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미칠 것인지 아직은 미지수”라고 점쳤다. 젊은이들의 정치 참여 루트가 아직 제도화 되지도 않았고, 우리나라처럼 인터넷 정치나 여론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성민 연구원 역시 실제 투표율의 변화가 미미했음을 근거로 “질적인 고용불안, 비정규직 문제 등으로 인한 젊은층의 불만이 팽배해져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번 선거 결과가 젊은 층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는 답변을 해왔다. 55년이나 이어진 체제가 젊은층의 폭발적인 정치 참여만으로 무너질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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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일본 젊은 층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 같아요” 라고 말한 유학생 미나씨.

그러나 이번 선거가 도리어 앞으로의 젊은이들에게 정치에 참여하도록 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는 많은 이가 동의한다. 일본인 유학생 미나 씨는 요즈음 정치 이야기에 전혀 관심이 없던 친구들도 자신에게 정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며 “드라마틱한 정치 상황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고 요즘 젊은이들의 분위기를 전했다. 김성민 연구원은 “이번 선거 결과가 많은 젊은이들에게 여러 자극이 돼 정치에 대한 일본 젊은이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오히려 앞으로가 될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최희식 교수는 “일본 국민들은 이제 민주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자민당을 뽑을 수 있다. 이제야 일본에서도 국민들의 요구가 정치에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정권 교체가 가능한 진정한 의미의 양당제가 형성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라며 국민들이 변화를 선택했다는 점 자체를 가장 중요하게 꼽았다.이번 일본 총선거 결과는 과거 자민당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국민들의 피로를 누적시키는 이명박 정부에게도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보수적이고 안정 지향적인 지렁이들도 계속 밟으면 꿈틀한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불만과 우려의 목소리에 정권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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