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당당한 사회를 꿈꾸다

3월, 대한장애인체육회 회장실에서 장애인권운동가 장향숙을 만났다.그녀는 장애인이다.어릴 적에 소아마비에 걸려 하반신과 오른쪽 상반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됐다.그녀는 여성장애인이기도 하다.여성과도, 장애인과도 다른 특수성이 그녀는 오십 인생에 묻어난다.또 그녀는 무학력자다.너무 당연시되는 공교육의 혜택을 그녀는 단 한번도 누려본 적이 없다.그러나 그녀는 삶이라는 길 위에 당당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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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대한장애인체육회 회장실에서 장애인권운동가 장향숙을 만났다.

그녀는 장애인이다. 어릴 적에 소아마비에 걸려 하반신과 오른쪽 상반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됐다. 그녀는 여성장애인이기도 하다. 여성과도, 장애인과도 다른 특수성이 그녀는 오십 인생에 묻어난다. 또 그녀는 무학력자다. 너무 당연시되는 공교육의 혜택을 그녀는 단 한번도 누려본 적이 없다.그러나 그녀는 삶이라는 길 위에 당당히 서 있다.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1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여성장애인 인권운동에 헌신했다. 17대 총선에서는 무학력자 여성장애인 최초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선출돼 장애인문제를 공론화시켰다. 현재 그녀는 대한장애인체육회 회장으로 재직하며 장애인 생활체육 보급에 노력하고 있다.불편하되 불평하지 않는, 만 권 이상의 책을 독파한, 무한한 긍정의 소유자, 바로 인간 장향숙이다.장애와 나는 불가분의 관계, 나는 장애인이다‘똑똑똑’ 문을 열고 들어간 그 곳에 자그마한 체구의 한 여성이 휠체어를 타고 앉아 있다. 장애인권운동에 자신의 삶을 바친 현 대한장애인체육회 회장, 장향숙이다. 그녀에게는 장애·여성·무학력이라는 세 가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생후 1년 반 만에 소아마비에 걸렸고, 그로 인해 지금도 몸의 대부분을 움직일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 돼버렸다. 또한, 그녀는 공교육 제도 아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전무하다. 한국전쟁 직후인 60년대, 몸이 불편한 아이가 학교에 갈 수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세 가지 마이너리티가 자신의 인생에서 갖는 의미를 물었다. “여성에, 장애인에, 무학력자. 그러다 보니 직업도 없고 돈도 없었어요.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계층들의 모습을 내 안에 모두 갖고 있었던 셈이죠.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에요. 그러나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도 아니었죠. 대한민국의 사회·역사적 환경과 내가 소외계층으로 사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였어요. 나는 그 자체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나 자체이고, 내 인생이에요”라고 스스로를 이야기하는 장 회장은 당당했다.차가운 눈빛과 찬란한 햇빛 사이에서몸이 불편했고 학교도 다니지 않아 집 안에서만 생활을 하던 장향숙은 22살이 되서야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바깥 세상으로 나간다. 그 일을 물어봤다. “그 때의 경험을 나는 주로 2개의 빛으로 표현하곤 해요. 하나는 나를 마치 원숭이를 보는 듯한 타인들의 낯선 ‘눈빛’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하늘의 너무나 찬란하고 눈부신 ‘햇빛’이었죠”라고 그 때의 감회를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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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향숙에게 마이너리티는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곧 그녀 자신이며, 그녀의 삶이다.

너무나도 다른 두 가지 빛은 그녀를 세상의 안과 밖의 경계선에서 머뭇거리게 했다. 한동안 고민을 하면서 집을 나가지 않던 그녀는 다시 문 밖으로 나섰다고 한다. “5, 6년을 계속해서 밖을 돌아다니고 나니,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면 인사했어요. 변한거죠.” 목욕탕을 처음 갔을 때도 똑같이 낯선 눈빛이었다. 그러나 목욕탕을 자주 오가다 보니 오히려 씻겨주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차츰 나타났다. 그녀는 낯설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마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들의 차갑고 낯선 시선은 일단 이겨내고 나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아요.”모든 경험 하나하나가 의식발전의 계기가 돼장애인에게 있어 자기 내면의 틀에서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이를 극복하고 나면 어렵지 않다.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뒤, 장 회장은 청소년 선교모임 ‘영라이프’를 만들고 청소년들과 직접 대화하는 모임을 가지면서 자신의 삶을 넓혀나갔다. “비록 답이 없을지라도 청소년들과 물질적·금전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끝없이 대화해 볼 수 있는 것이 좋았어요.” 그녀는 청소년들과의 대화와 관계맺음을 통해 굉장히 많은 자양분을 얻을 수 있었다. 직접 공장에서 일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실제로 공장의 상황을 지켜보고, 전국에서 온 수백명의 장애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 장향숙은 “그것이 내 자신의 의식을 끊임 없이 발전시켜나가는 계기가 됐고, 후일 인권운동의 밑거름이 됐다”며 그 경험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했다. 몸이 불편한 그녀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경험에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엄청난 양의 책을 독파함으로서 그 간극을 메울 수 있었다. “우연히도 글을 알게 된 것은 내게 정말 구원이었어요. 사람은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더 강한 욕구를 갖기 마련이죠. 저 역시 경험에 대한 갈구가 있었어요. 그것이 나를 독서로 이끌었죠.” 그녀는 지금까지 만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그래서 별명이 ‘만리장서(萬里長書)’다. “독서가 아니었다면 장향숙은 결코 지금의 장향숙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독서가 갖는 특별한 의미를 설명했다. 독서란 타인과의 대화이면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되새김질하는 자신과의 대화라고 말하는 그녀였다. 장애문제에 대해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사실 장애라는 것은 우연한 일에 불과해요. 그런데 우연 때문에 장애인들의 삶이 타인의 시선에 의해 규정지어지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죠.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 그 스스로, 그리고 사회가 다 함께 생각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장애인들을 보고 ‘쟤는 장애인이니까 아무것도 못할 거다, 연애·결혼도 못할 거다, 애도 못 낳을 거다, 학벌도 없을 것이다’라고 규정짓는 편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었다. 장향숙은 “장애문제에 대해 장애인들끼리는 물론, 사회가 다 함께 문제제기하고 얘기해볼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했고, 그런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며 장애인권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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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위의 장향숙. 그녀는 몸이 불편하기에 가장 낮은 곳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녀를 장애인권운동으로 이끌었다.

출발은 작은 지역장애인모임에서 시작했다. 1988년 장애인올림픽 전에는 장애인권에 대한 의식이 지금보다도 미비했다. 그냥 장애인들끼리 한 곳에 모임을 갖는 것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인권운동이 되는 시절이었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모임에서 대화도 하고, 글도 쓰고, 그 글로 문예집도 내곤 했다. 1997년도부터는 장애인권운동이라는 이름을 걸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창립을 주도하고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부산에서 지역장애인운동을 조직화하는데 노력했다. 물론 그 과정은 어느 하나 어렵지 않은 것이 없었다. “돈도 없고 학벌도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죠. 배고프면 빵 하나를 사서 나눠먹기도 했어요. 서로가 힘든 처지를 잘 알던 터라 각자 알아서 먹은 만큼 돈을 냈죠.” 그래도 그녀는 인권운동을 하면서 행복했다고 말한다. “처음으로 우리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스스로, 우리끼리 이야기해 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었죠. 많은 보람과 기쁨도 느꼈고요.”장애인권운동의 활발한 활동으로 장향숙은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후보 1번으로 선출, 여성장애인 최초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왜 정치권에 진출했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순수하게 인권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국회에 가게 된 것이에요. 국회의사당에 들어가게 되면서 결코 유명세에 신경 쓰지 않고, 정책과 법안에 집중하기로 했죠.” 그녀는 자신이 당선된 사실을 두 가지 차원에서 해석했다. 우선 그것이 단순히 개인 장향숙의 신분상승이 아니라 그녀 뒤에 장애 대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 사회가 이제 소외계층의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눈을 감고 모른 척 할 수 없게 된 현실에 대한 반증이라는 것. 당선된 후 5년간 장애인권 증진을 위해 발로 뛰어다니고, ‘장애인차별금지법’ 등 많은 법안을 제출한 그녀에게 쉴 틈은 없었다. 덕분에 의정활동 우수의원으로 뽑히기도 했다.여성장애인들의 특수성을 이해해야마지막 화제로 대한민국에서 여성장애인이 갖는 특수성을 꺼냈다. 그녀는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성장애인은 여성과도, 장애인과도 다른 특수성을 갖죠. 여기에는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가 가장 큰 문제로 작용해요. 가부장적 문화가 팽배한 사회이기에 여성장애인은 가정에서부터 버림받는 경우가 많아요. 여성의 가치를 생산·미모·노동으로 한정해 규정짓기 때문이에요.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되버리죠. 가정의 이런 분위기는 다시 사회로 환원되고, 다시 사회의 분위기는 가정으로 환원되요. 결국 여성장애인들은 절대소외의 처지에 놓이는 것이죠.” 말을 하다가 잠시 머뭇거리던 장향숙은 자신과 함께 여성장애인운동을 한 동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동료는 하반신 마비의 장애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그녀를 이웃 동네의 한 남자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냈다. 그 남자를 싫어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고, 아이를 낳고 살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그 남자는 자신을 무시한다고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절, 여성장애인인 그녀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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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만 불평하지 않아요.”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는 장향숙은 언제나 밝은 모습이다.

장향숙은 이에 대해 한국 사회가 닫혀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인간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이야기해 볼 수 있는 열린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똑똑한 여성 장애인이 중매를 부탁하면 항상 남자 장애인만 상대로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에게는 장애문제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열려 있는 태도가 필요한 거에요”라고 따끔한 한 마디를 날렸다. 그와 동시에 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봐줄 것을 부탁했다. 같이 어울리면서 자꾸 보게 되면 다를 것도, 낯설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냥 꼴대로 봐주세요. 너무 장애인이라는 의식을 가지지 말고요. 어차피 우리들 모두는 꼴대로 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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