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청소년, 그들의 마음과 대화하다

Intro대한민국의 거리는 가출청소년으로 넘쳐난다.사회는 거리를 헤매는 그들을 ‘가출청소년’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규정짓는다.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이유와 생활방식을 가지고 가출생활을 한다.그리고 각기 다른 결말을 맺는다.은 실제로 만난 8명의 청소년에게 들은 실화와 자료를 바탕으로 가출청소년, 그들의 삶을 재구성해봤다.#1.K군의 이야기: “집 나오면 고생이에요.” 늦은 밤, 가출청소년이 자주 찾는 신림동에서 K군(19)을 만났다.

Intro대한민국의 거리는 가출청소년으로 넘쳐난다. 사회는 거리를 헤매는 그들을 ‘가출청소년’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규정짓는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이유와 생활방식을 가지고 가출생활을 한다. 그리고 각기 다른 결말을 맺는다. 은 실제로 만난 8명의 청소년에게 들은 실화와 자료를 바탕으로 가출청소년, 그들의 삶을 재구성해봤다.#1. K군의 이야기: “집 나오면 고생이에요.”늦은 밤, 가출청소년이 자주 찾는 신림동에서 K군(19)을 만났다. 일반 청소년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그는 사실 가출청소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출을 경험했던 청소년이다. 그에게도 한 때 사회가 붙여준 ‘문제아’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은 뒤 그에게 첫 가출에 대해서 물어봤다. 의외로 쉽게 답해줬다. “처음 가출을 하게 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통금시간을 가지고 부모님과 다투다 좀 일이 커져버렸죠. 전 자유롭게 놀고 싶었거든요. 그 길로 수중에 있는 돈 몇 만원을 들고 친구집으로 갔어요. 거기서 한 달간 먹고 자고 했죠.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 뒤 가출을 하지 않다가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시 가출을 하게 된다. “가정에서의 갈등문제도 있었고, 여자친구 문제도 있었어요. 여전히 집은 답답했죠”라며 그 때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는 여자친구, 다른 친구 1명과 같이 다녔다. 그들은 어렵사리 고시원에 방을 잡고 3명이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혼숙이었다. “그렇게들 많이 해요. 돈이 없거든요. 혼자 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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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푸드점은 가출청소년들의 일터이자 쉼터이기도 하다. 24시간 영업 간판이 환하게 켜져 있는 한 패스트푸드점.

집을 나온 그는 학교를 마친 뒤 친구들과 함께 PC방, 노래방 등을 다니며 마음껏 놀 수 있었다. 때로는 주민등록증 검사를 하지 않는 술집을 찾아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고시원에 가서 자기도 했지만, 종종 친구들과 놀며 밤을 새기도 했다. “자유로웠어요. 힘들기는 했지만. 통금이 있을 때는 늦게까지 놀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부모님과 다퉜거든요. 밖에 나오니까 그게 좋았어요”라며 K군은 부끄럽게 웃음을 보였다. 가지고 나온 돈은 금방 떨어질 수밖에 없는 법. 셋은 함께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었다. 그는 여자친구와 함께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했다. 때때로 돈이 없을 때는 친구들에게 빌리기도 했다. 그는 가출했을 때 돈이 가장 힘든 점이라고 털어놓았다. 가지고 나온 돈은 길어봤자 열흘이면 다 떨어진다. 그 뒤로는 어떻게든 스스로 생활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왜 쉼터에는 안 갔어요?”라고 물어보자, 그는 “답답하잖아요”라고 퉁명스레 응했다. 답답해서 집을 나왔는데, 온갖 규칙이 있는 쉼터 역시 답답하다는 것이다. 쉼터에 갈 바에야 차라리 집으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꽤나 긴 두번째 가출에서 돌아온 이후로도, 그는 종종 1~2주일씩 가출을 하곤 했다. 이른바 ‘전환형 가출’인 셈이다. “자주 가출을 했어요. 돈이 있으면 가출이 하고 싶어졌거든요.” 그렇지만 그에게 가출은 곧 고생이었다. “나올 때마다 잘 곳을 구하느라 고생했어요. 아침에 찜질방 입장료가 내려갈 때까지 기다려서 들어가기도 하고, 밤새 거리를 걷기도 하고,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서 그냥 죽치고 있기도 했어요. 특히 겨울에는 무조건 안에 있어야 되죠.(웃음) 먹는 것도 친구 집에서 먹거나 그래요”라고 그는 가출하면서 힘들었던 점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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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청소년도 꿈을 꾼다. 선생님, 디자이너, 요리사 등 각자의 꿈을 그린 엽서들.

이제 K군은 더 이상 가출청소년이 아니다. 그는 이동쉼터에서의 상담 등을 통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과의 대화, 그리고 양보를 통해 가정갈등도 상당부분 해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차근차근 준비해나가고 있다. “가출을 했다고 하면 보통 문제아라고 말하잖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건 결코 아니에요”라는 말은 편견을 꼬집는 듯 했다. 현재 그는 고등학교를 계속 다니면서 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 “꼭 7성 호텔에 들어갈 거에요. 가게 되면 꼭 초대해드릴게요.”라며 농담 반 진담 반을 건내며 너털웃음을 짓는 K군이었다. #2. L양의 이야기: “가출청소년에겐 도움이 필요해요.” 수도권 소재의 한 중장기쉼터에서 스물한 살의 L양을 만났다. 그녀 역시 가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왕따’였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그냥 무시하고 안 껴주고 그런 거였어요. 그러다가 제 물건을 빼앗아 가거나 제게 시비를 걸더군요. 나중에는 많이 맞았어요. 돈도 뺏기고.” 그런 L양에게는 가정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그러나 혼자서 집안을 꾸려나가느라 바쁜 아버지에게 충분한 관심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하루하루 돈을 버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에 그녀에게 관심을 쏟을 심적인 여유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괴로웠죠. 하루하루 학교에 가는 게 끔찍했어요. 도움이 필요했지만 마땅한 길이 보이질 않았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헛된 기대였다. 같은 중학교 출신 아이들이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녀의 ‘왕따’ 경험은 학교에 소리 소문없이 퍼져버렸고, 그녀는 또다시 따돌림을 받게 됐다. “참아보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어느 날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집과 학교에서 모두 무시받는 현실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나 무작정 가출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가출 준비를 위해 인터넷에 ‘가출’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했다. 가출에서 필요한 것부터 시작해서, 가출했을 때 갈 수 있는 곳, 가출청소년들이 많이 모이는 곳, 돈을 벌 수 있는 방법까지 정보는 충분했다. 심지어 가출청소년들이 같이 가출할 친구(동행)를 구하는 카페도 있었다. 그녀는 그 곳에서 동갑인 여학생 C양을 동행으로 구했다. 고1 가을, 그녀는 집과 학교로부터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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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을 준비하는 청소년들은 인터넷 공간을 통해 가출 친구를 구하기도 한다.

집을 나온 L양은 C양과 함께 천호동 주변에서 생활했다. 천호동은 신림, 동대문 지역과 함께 가출청소년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그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고, 찜질방·PC방 등에서 밤을 새웠다. “찜질방에 들어가면 3,4일 동안 안 나오는 일도 많았어요. 조용히 아줌마 눈에만 안띄면 괜찮거든요”라며 그녀는 그 당시의 생활을 털어놓았다. “돈이 없을때는 정말 난감했죠. 그러다 어느 날, C양과 함께 지나가는 중학생 여학생들을 불러세워서 돈을 뺏었어요. 가출 전에는 피해자였던 제가 가출 후에는 가해자가 된 셈이죠.” 가출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그녀는 소위 ‘삥’을 뜯기도 하고, 편의점에서 라면이나 과자를 훔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차를 털기도 했다. 덕분에 경찰서도 몇 번 들락날락했고, 그러던 와중 단기 쉼터에 들어가게 됐다.“단기 쉼터에 들어간 건 큰 변화였어요”라고 그녀는 운을 뗐다. 이전과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규율받는 생활을 하게 됐고, 그것은 그녀에게 꽤나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주변 친구들은 답답함을 못 이겨 도로 이전 생활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정기적인 상담을 통해 따돌림을 당해서 생긴 불안감과 가출을 하며 생긴 공격성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게 됐다. 또한 스스로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됐다.그런 그녀에게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장기 쉼터에 머물고 있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단기 쉼터에서 6개월을 살면 보통 떠나야 해요. 저도 그 기간이 다 찰 때쯤 많이 고민했죠. 하지만 다시 학교와 집으로 돌아가기는 싫었어요. 다시 따돌림과 무관심의 대상이 될까 두려웠거든요.” 그래서 그녀는 단기 쉼터에서 연결해 준 중장기 쉼터로 왔다. 작년에 검정고시를 준비해서 합격한 그녀는 지금은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진로까지는 못 정했어요. 하지만 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3. P양의 이야기: “집을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으니까요” 올해 18살인 P양은 1년차 가출청소년이다. 부모님은 그녀가 어릴 적에 이혼을 했고, 아버지가 그녀를 키우게 됐다. “제가 10살 때 아빠가 재혼을 하게 됐어요. 다시 새롭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데 제가 부담이 됐는지 저는 친할머니 댁으로 보내졌죠. 그때부터 친할머니와 삼촌 밑에서 자랐죠”라며 그녀의 가슴 아픈 가족력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어머니한테 가지 그랬냐고 묻자, “아, 어머니는 유흥업소 일을 하시다가, 연락이 이미 두절된 상태였어요”라며 내심 덤덤한 척 대답했다. 그나마 맡겨진 친가에서의 생활마저 생각처럼 순탄하지 못했다. 친할머니는 지병으로 인해 거동이 힘드신 상태였고, 그나마 있는 삼촌은 알코올 중독의 일용직 근로자였다. 그녀를 양육해 줄 사람이 마땅히 없는 셈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혼자 집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마땅한 친구조차 없었다. 어릴 적 상처가 사회성 부족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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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거리를 헤매는 가출청소년. 그들에게 우리 사회는 충분히 안전한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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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은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항상 그녀를 때리곤 했다. “무서웠어요. 정말로. 밖에서 삼촌의 술 취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면 이불 속에 들어가 숨기도 했어요. 소용없었죠. 그 때 안 맞아본 곳이 없어요. 맞고 나서 오래 울지도 못했어요. 그러다간 또 맞았거든요.” 그녀의 안색이 흐려지는 것이 아직도 그 때의 어두운 기억이 남아있는 듯 했다. “거의 매일 삼촌에게 맞으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사실 어디에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부터 막막하거든요. 가끔 TV에서 저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다시 들죠.” 무관심 속에 방치된 채 구타로 삶이 얼룩진 그녀는 17살이 되던 해에 집을 나왔다. 삼촌의 구타 수위가 점점 높아졌기 때문이다. 삼촌은 심지어 그녀를 성희롱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L양이 택할 수 있었던 길은 가출뿐이었다. “가출은 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죠”라며 그녀는 설명했다. 집을 나와서는 갖고 있던 약간의 돈으로 고시원에 방을 잡았다. 어차피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참 알아본 끝에서야 겨우 고깃집 서빙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었다. 일이 여자가 하기에는 매우 고되고, 술에 취한 아저씨들이 치근거릴 때마다 삼촌이 떠올라 끔찍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참고 성실히 일하는 도리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기다리던 월급날이 왔다. 그런데 주인아저씨는 월급을 주지 않았다. “제 처지가 그 곳 아니면 딱히 돈을 벌 곳이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뭐라고 따지지도 못하고 그냥 기다렸어요. 그렇게 두 달이 넘었는데도 ‘알바비’를 줄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달라고 요구했죠.” 그러나 주인아저씨는 오히려 그녀에게 가출청소년인 것을 빌미삼아 위협과 윽박을 서슴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무서웠던 그녀는 결국 돈을 받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돈이 아깝지 않았냐고 묻자, “어쩔 수 없었어요. 나이 어린 가출 여학생에게 세상은 너무 무서운 곳이었거든요. 지금이야 사회에 좀 적응을 했죠. 그래서 사실 아까워요 그 돈. 그냥 그만 둔 게 후회도 되죠”라며 솔직하게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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