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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 하나의 여유를 기대합니다
어떤 음모론

물음표 하나의 여유를 기대합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다른 활동에 비해 쉽고 재미난 일입니다.그것이 골치 아픈 형식을 갖춰야하는 글의 형태라면 또 모를까, 말을 내뱉을 때의 경쾌함은 다른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혹여 그 말이 듣는 이들의 마음이라도 동하게 할 모양이면, 그 재미는 더욱 커집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다른 활동에 비해 쉽고 재미난 일입니다. 그것이 골치 아픈 형식을 갖춰야하는 글의 형태라면 또 모를까, 말을 내뱉을 때의 경쾌함은 다른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혹여 그 말이 듣는 이들의 마음이라도 동하게 할 모양이면, 그 재미는 더욱 커집니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라는 옛 어르신네의 속담은, 분명 어느 정도 인간사의 진리를 담고 있다 할 것입니다.바로 그 인간사에는 ‘말’ 때문에 제 몸을 상한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많은 좌파가 즐겨 부르는 ‘인터내셔널’의 선동문구에는, 삐라를 뿌렸다는 죄목으로 붙잡힌 소녀 봉제공 엠마리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조선중앙일보의 유해붕 기자가 손기정 선수 가슴에 달린 일장기 하나를 지웠다가 봉변을 당한 일화도 떠오릅니다. 사실 MB정권의 언론탄압이 일상인 요즘 세상에, 이러한 옛날 예화들을 드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처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 역시 엄연히 사회적 활동이자 실천이기에, 말은 이렇듯 탄압받기도 합니다. ‘탄압’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듯, 말하기가 결코 쉽고 재미난 일만은 아닙니다. 특히 듣는 이가 적대적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95호에는 4대강 정비 사업에 반대해 일인시위를 한 기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황빠’라 불리는 사람들의 집회에 대한 기사도 실려 있습니다. 그 주제와 의도는 달랐을지언정, 그들이 말을 걸려고 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말의 대상은 한결같이 그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그러한 적개심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말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듣는 혹은 들을 사람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행위만큼 불편한 것이 또 있을까요. 게다가 그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방식으로 다가온다면 말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말의 방식과 형태를 제한하고 싶어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제한의 방법이나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해야 했는지,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말해야만 했는지 물음표를 찍는 것이야말로 중요합니다. 물음표의 여유를 갖지 못할 때, 우리는 영영 적대적인 타인일 뿐입니다. 굳이 용산 참사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들을 귀를 닫아버릴 때, 말하려는 이들은 궁지로 몰려 불가피한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특정한 사상 혹은 이념이 아니라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게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보일 것입니다. 말이 자유롭게 누군가의 귀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그리고 사람들의 ‘말을 들어줄’ 여유를 바라는 것은 과한 기대일까요. 바로 그 ‘여유’를 지향하고 있는 을 보며 작으나마 희망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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