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통일을 잊었을까

1990년대 후반까지 서울대학교를 수식하는 모토는 ‘자주관악’이었다.민족주의적 시각과 통일담론이 강하게 반영된 말이다.실제로 90년대 중반까지 학생사회와 통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민족’과 ‘민주’가 학생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이었기 때문이다.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자주관악이란 모토는 사라지고 잊혀졌다.학내의 통일담론이 쇠락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 후반까지 서울대학교를 수식하는 모토는 ‘자주관악’이었다. 민족주의적 시각과 통일담론이 강하게 반영된 말이다. 실제로 90년대 중반까지 학생사회와 통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민족’과 ‘민주’가 학생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자주관악이란 모토는 사라지고 잊혀졌다. 학내의 통일담론이 쇠락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평양의 대학생을 만나기 위해 휴전선을 넘는 학생도, “반미 반전 양키고홈”을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는 학생도 이제는 없다. 더 이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닌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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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까지 ‘통일’은 학생운동의 중요한 화두였다. 90년대 후반을 지나며 통일 담론이 엷어지기 시작했다.

학생사회에서 약해지고, 다양해진 통일 담론

과거에 비해 학생사회에서 통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었다는 말에는 대부분의 교수나 학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통일담론이 약화되면서 통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등장했다. 목찬수(법학 07) 씨는 “통일이 큰 의미를 갖는 건 맞지만,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할 가치는 아니다. 당위론적인 민족주의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재욱(정치 05) 씨는 통일이 학생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씨는 “학생운동을 묶어내는 담론으로는 ‘통일’보다 ‘노동’이 적절하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학생들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절박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박정현(사회 05) 씨도 작년 총학생회선거 기간에 “지배계급 위주의 통일을 경계해야 한다. 지금은 북한노동자들을 남한 자본이 착취하는 구조다. 이대로 통일이 된다면 북한 민중의 2등 국민화가 심각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통일에 무관심한 학생도 적지 않다. 이성환(식품영양 02) 씨는 “통일에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통일이 실질적인 이익이 되지 않다”는 게 이 씨의 생각이다.“통일 담론의 축소는 사회 발전의 부산물”통일 담론의 축소와 다양화에 대해 김병로 교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 전임연구교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주의보다 국가주의가 커졌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남북이 분단됐을 당시에는 하나의 한국(One Korea)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국가성이 공고해졌다”고 김 교수는 현 상황을 해석한다. 80년대 후반, 탈냉전 이후 한반도에 민족의식이 굉장히 강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가 지나고 91년 남북이 국제연합에 가입하면서 남한과 북한이 일정부분 독립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분단 1세대 가 아닌 국민은 여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결과적으로 민족이나 통일 담론은 엷어졌다. 국제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은 것은 90년 즈음이지만 학생운동의 열기는 95년까지 고조됐다. 김병로 교수는 “분단 후 반 세기 가량 ‘통일’은 당위적 명제였다. 이 당위적 통일론이 95년까지 한국사회에 잔류했기 때문에 학생운동의 열기가 지속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장 박명규 교수(사회학과)는 통일담론이 줄어든 것이 한국사회가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박 교수는 “예전에는 통일담론이 민주화와 산업화 등을 모두 아울렀다. 이를테면 ‘북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민주화의 척도였다는 의미다. 지금은 민주화가 진전됐고 사회가 다양하게 분화됐다. 통일을 이야기할 때 이제는 좀 더 세밀하고 정교한 논의가 필요하다. 학생운동의 관심사에서 통일이 밀려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통일은 중요하다”통일 담론의 입지가 좁아지는 현실에 대한 우려도 있다. 박명규 교수는 “항상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상적인 통일은 남과 북의 역량 차가 없어진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시점에 통일을 할 지 말지를 정해야 할 수도 있다”며 박 교수는 정치적인 상황이 급변하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1990년 독일 통일도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뤄졌다. 동구권이 맥없이 무너졌고, 동독의 통일의지에 대해 서독이 응답했기 때문에 독일 통일이 가능했다. 박 교수는 “언젠가 통일이 가시화됐을 때, 사회가 통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통일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통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통일의 ‘명분’보다는 ‘왜, 어떤 식으로, 무엇 때문에 통일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박 교수는 남한 사회 그리고 학생 사회에 통일 의지를 당부한다. “통일은 거대하고 전략적인 미래 비전이다.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를 형성해 통일에 대한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학생사회도 이에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박 교수는 말했다.학생사회에서 통일 담론이 변화하고 있지만 아직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서울대615연석회의, 민주노동당학생위원회, 일부 단과대를 중심으로 여전히 통일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작년 총학생회선거에는 ‘바로잡기’ 선거운동본부이 통일 담론을 전면에 내세우고 선거운동을 했다. 후보였던 김휘동(지구과학교육 05) 씨는 “남한 사회에서 통일담론은 아직까지 의미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한국 사회에 다양한 모순이 존재한다. 모순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것이 남북분단이다. 민주화로 인해 사회가 발전한 것 같지만 현실은 그대로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담론이 부재한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임대환(사회 03) 씨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통일이 중요한 문제임을 인식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임 씨는 역사적인 맥락을 강조했다. “분단은 우리가 원치 않았던 결과다. 근현대사에서 분단이 주는 아픔의 크기가 크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통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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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내에서 통일 운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매년 총학생회 선거에서도 통일에 대한 생각이 활발하게 교류된다.

통일 운동, 이제는 변해야 할 때

하지만 관성적인 통일 운동이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김병로 교수는 “과거 방식대로 통일을 부르짖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제는 남한 중심의, 실용적인 관점으로 통일을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통일의 의미와 통일 이후에 얻는 이익을 합리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분단체제로 인한 한국사회의 손실을 따져봐야 한다. 정치적 이유로 대륙과 지리적으로 단절된 지금, 앞으로 남한이 발전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지리적인 확장의 관점, 경제적 관점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야 통일에 대한 관심도 커질 것”이라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박명규 교수는 사회 각계의 역할과 더불어 수준 높은 연구를 강조한다. 박 교수는 “정서적 접근으로는 통일을 이룰 수 없다. 대학, 연구소, 젊은 지성인들이 한반도의 미래를 놓고 정교하게 통일을 설정해야 한다. 학생들이 예전에 보였던 집단적인 움직임보다 수준 높은 공부가 절실하다. 이제는 양보다 질로 접근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박 교수는 “공부 없이 학생운동만 했기 때문에 학생운동이 위기에 빠졌다. 각각의 전문분야에서 진지하게 통일을 생각할 것”을 당부했다. 통일을 위한 새로운 컨텐츠 개발이 시급 김휘동 씨는 “통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으로 힘들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통일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힘들다. 마음 맞는 사람조차 없는 상황에서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말했다. 학내에서 통일이나 대북관련 정보에 접근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북한학과가 없는 서울대학교에는 통일 관련 강좌가 ‘남북관계의 변화와 전망’ 하나밖에 없다. ‘남북관계의 변화와 전망’은 기초교육원이 주관하는 교양강좌다. 임대환 씨도 “‘통일’이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학생들끼리 세미나를 하고 공부를 하기에 통일은 너무 전문적인 영역이다. 2003년, 2004년엔 통일 관련 학술 모임이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공부를 주도할 학생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이에 대해 김병로 교수는 “북한에 대해 알 수 있는 통로가 적은 것이 사실이다. 통일교육원이 통일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고는 있지만 사실 제대로 안 되는 부분이 많다”며 학생들의 관심에 비해 통일교육의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인정했다. 김 교수는 “예전에는 교육부차원에서 국민윤리과목을 강제로 개설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학생들이 스스로 NGO활동 등에 참여하는 길 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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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규 교수는 “통일에 대한 관심과 수준 높은 연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정부가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젊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방식인 것도 문제다. 김 교수는 “많은 젊은 사람들이 통일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어도, ‘따분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남북관계나 통일정책은 변화를 거듭하는 반면 통일교육은 예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강의하는 입장에서 봐도 부족한 부분이 많다. 시대에 맞는 방법론을 재정립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박명규 교수도 새로운 컨텐츠의 개발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통일정책, 통일담론을 주도할 수 있는 컨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이는 연구자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의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문화 영역을 보면 좋은 컨텐츠 하나의 개발이 문화 산업 전체에 큰 영향을 준다. 이처럼 고급 컨텐츠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통일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훨씬 커질 것”이라는 게 박 교수의 생각이다.


통일에 관심 있다면, ‘통일아카데미’를 수강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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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아카데미’ 수업 장면. 수강생들의 활기차고 진지한 분위기가 눈에 띈다.

서울대학교통일평화연구소는 매학기 ‘통일아카데미’란 이름의 강좌를 진행한다. 통일아카데미는 이제 5기 수강생을 모집 중이다. 박명규 교수는 “학내에 통일, 북한 관련 강의가 너무 없다고 생각돼서 통일아카데미를 개설했다. 연구자들과 함께 학생들과 접촉점을 만들고자 했다”고 통일아카데미의 취지를 설명했다. 김병로 교수는 “처음에는 신청하는 학생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2년 째 통일아카데미가 이어지고 있으며, 학생들의 관심도 점점 커지고 있다. 30명가량 관심 있는 학생들이 꾸준히 등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통일아카데미는 학내에 있는 최고급의 통일 교육”이라고 자부한다.
통일아카데미는 매주 화요일 저녁에 문화관에 있는 통일평화연구소 세미나실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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