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서 학기 초마다 급격히 증가하는 세 가지를 꼽으라면 무엇이 있을까. 과방에 상주하는 사람 수, 점심시간에 길게 늘어선 자하연의 줄, 그리고 게시판마다 촘촘히 붙여진 포스터들을 들 수 있지 않을까.새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회관(이하 학관)과 중앙도서관(이하 중도)을 비롯해 각 단과대학 게시판에는 신입 회원을 모집하는 각종 동아리 홍보 포스터가 화려함을 뽐내며 학생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별도의 규정 없이 각 동아리마다 경쟁적으로 포스터를 붙이면서, 오히려 포스터의 가독성이 떨어지고 재정 낭비와 미관상의 문제도 발생했다.학기 초는 포스터 전성시대, 학관에 부착된 것만 2000여 장에 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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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포스터로 가득 찬 중도 게시판. 똑같은 포스터들이 반복되며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영토전쟁을 방불케 한다. |
지난 3월 21일 중도 게시판에 붙여진 포스터는 모두 341장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시선을 끌기 위해 같은 포스터를 여러 장 중복해서 붙인 경우가 많았다. P 모 동아리에서는 A3 크기의 포스터를 한 곳에만 34장을 붙였고, F 모 동아리는 A2 크기의 포스터를 17장 붙였다. 그 밖에도 대부분의 단체에서 동일한 장소에 같은 포스터를 10장 이상 붙이고 있었다. ‘게시물 당 1매씩만 부착합시다’라고 게시판 상단부에 명시돼 있는 규정이 무색할 정도다. 이처럼 각자 넓은 영역을 차지하려는 경쟁으로 인해 붙인지 얼마 안 된 포스터가 다른 포스터로 덮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게시판 관리 방법을 묻자 중도 관계자는 “날짜가 지난 게시물은 모두 떼도록 돼 있고, 사무실에서 그때 그때 지시가 내려오면 게시물을 제거한다”고 대답했다.정해진 게시판에만 포스터를 부착해야 하는 중도에 비해, 학관은 지정된 공간이 아닌 곳에 포스터를 붙여도 관리자가 제거하지 않는다. 따라서 온갖 동아리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이곳은 벽면마다 수많은 포스터들로 뒤덮여 있다. 같은 날 학관에 부착된 포스터의 수는 무려 2036장이었다. 포스터의 평균 크기를 A2 크기라고 가정했을 때 507㎡, 즉 153평을 가득 메울 수 있는 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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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학관 내·외부 벽면은 포스터의 천국이다. |
과다한 포스터는 가독성 저하와 미관상 문제를 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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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온 다음 날의 자하연. 찢어진 포스터들이 자하연 주변 풀숲에서 발견된다. |
이처럼 각 단체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많은 수의 포스터를 붙이지만 그만큼 실효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학교에 갓 입학해 동아리에 관심이 많은 고동현(사회과학 07) 씨는 “게시판마다 포스터들이 겹쳐 있고 너무 많이 붙어있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게 된다”고 말했다. 또한 학교 전체에 난무하는 포스터들로 인해 생기는 미관상의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민마로한(언론 05) 씨는 “게시판에 포스터가 너무 많아서 지저분해 보이는데 겹치지 않게 붙였으면 좋겠다. 특히 날짜가 지난 것은 붙인 쪽에서 알아서 수거해 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게시판 이외의 공간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은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농생대식당은 청테이프로 뒤덮이고, 자하연 바닥에 붙여진 수십 장의 포스터들은 비 온 다음 날이면 휴지조각이 돼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실정이다.이같은 상황에 대해 포스터를 붙이는 동아리들에게만 책임을 묻기는 힘들다. 동아리들도 포스터 부착 경쟁으로 인해 많은 불편을 겪고 있다. 보통 4월 이후에는 포스터를 붙일 때 기한이 지난 것 위에 붙이는 등 단체끼리 어느 정도의 에티켓은 지키는 편이지만, 학기 초에는 자리가 부족해 다른 포스터 위에 붙일 수밖에 없다고 동아리들은 호소한다. 게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포스터가 며칠 만에 또 다른 포스터로 덮이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관악몸짓패 골패의 엄태연(경제 06) 씨는 “포스터를 과도하게 붙이는 것에 대해 탓하기보다 왜 그렇게 붙이는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우선 정보전달의 수단이 포스터뿐임에도 불구하고,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며 포스터를 여러 장 겹쳐 붙일 수밖에 없는 동아리의 상황을 설명했다. 중앙기독교동아리 SFC는 “게시물을 붙이려는 학생들은 많은 반면, 공간이 부족하다. 하지만 공간을 조금 늘린다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성적인 교통정체가 벌어지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 도로를 몇 개 더 낸다고 교통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라며 게시판을 늘리는 대안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동아리들끼리 기본적인 에티켓을 지키도록 하는 확실한 규정이 수립되지 않는 이상, 포스터 과다 부착으로 인한 문제는 해결되기 힘들다.유명무실한 게시물 규정, 올바른 실행 방안 마련돼야현재 포스터 부착에 대한 규정이 있기는 하다. 학내 게시판에 게시물을 부착하려면 두레문예관에서 승인을 받고, 게시를 허락하는 도장이 찍힌 포스터만 부착할 수 있다. 특정 단대 건물 안의 게시판은 각 단대의 권한을 존중하는 편이지만, 나머지 게시판에 도장이 없는 포스터가 게시되면 자동적으로 수거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런 규정을 모르고 있으며 두레문예관도 이 문제를 학생의 자율에 맡기고 있다. 관계자는 “외부 기업의 홍보 포스터는 수거하지만 동아리 등 교내 구성원의 포스터는 가급적 떼지 않고 있다”고 포스터 관리에 대해 설명한다. 한편, 법대 내부의 게시판은 비교적 상황이 나은 편이다. 법대 행정실은 게시판에 검인을 받은 게시물만을 부착하도록 하고 있으며, 그 수는 법대 건물 전체에 3매 이내로 한정하는 등 규정을 정해 운영하고 있다. 사실 이 규정은 그리 엄격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법대 행정실은 제한된 양보다 많은 포스터에 검인을 날인하고 있으며, 검인이 없는 포스터에 대해 강한 제재를 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본래 게시판의 수요가 많지 않은 편이라 과도한 포스터 부착으로 인한 문제점은 별로 없다는 것이 법대 내 동아리들의 설명이다. 법대신문사는 “행정실에서 규정보다 많이 직인을 찍어 줘서 법대 근처에 포스터 20장가량을 붙였는데, 게시판 공간 부족에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하지만 전체적인 학내 상황을 보면, 중앙 동아리마다 적게는 150장부터 많게는 500장이 넘게 포스터를 붙이므로 총 게시판 수요는 현존하는 게시판의 전체 면적을 초과할 수밖에 없다. 우후죽순으로 게시판을 확충할 수도 없는 실정이므로 기본적인 규정이 마련되지 않는 이상 포스터 과잉 문제는 고질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동아리들은 엄격한 제도의 정착에 동의한다는 반응과 거부감이 느껴진다는 반응을 동시에 보이고 있으면서도, 동아리 자치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도가 올바로 실행된다면 대체로 수용하겠다는 분위기다. 화현회 회장 유리나(국악 05) 씨는 “확실한 제도가 마련되면 포스터를 과도하게 붙여서 생기는 문제는 없어질 듯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학외 단체의 포스터가 학내 구성원들을 위한 게시판 영역을 빼앗는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제재를 가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사문화된 규정만이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포스터들은 성가신 폐기물이 되어 가고, 자리다툼으로 인해 현수막이 분실되는 일들도 발생하고 있다.게시판은 학내의 다양한 정보가 교류되는 소통의 장이다. 그러나 게시판에 난무하는 다량의 포스터들은 오히려 학생들의 자유로운 소통을 저해하고 있다. 각종 단체에서 심혈을 기울여 부착하는 포스터 중 대부분은, 일반 학생들에게 전달되기보다 다른 게시물들 틈에 끼어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실효성 있는 제도 정착과 동아리들 스스로의 자정 노력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