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교수 “내 권한을 침범하지 마!” vs
학생기자단 “대학신문이 주간교수의 것입니까!”
photo1지난 11월 15일 대학신문이 제호를 지운 채 발행되었다. 학생기자들과 주간교수 사이의 마찰이 ‘백지제호’라는 사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장한승씨(대학신문 편집장)는 “문제의 발단은 대학신문에 총동창회 광고를 싣느냐 마느냐를 두고 학생기자들과 주간교수의 의견 대립이었다”고 밝혔다. 총동창회보의 논설위원인 이창복 주간교수(지구환경과학부)는 9월 20일자 대학신문부터 매주 한 개의 총동창회 광고를 실을 것을 지시했다. 문제는 그 광고가 총동창회보의 글을 그대로 베껴온 것이라서 광고의 성격보다는 기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었다. 학생기자들은 자신들이 쓰지도 않은 기사를 마치 기사인마냥 실을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첫 번째 광고 이후 계속 들어온 두 번째와 세 번째 광고는 광고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논의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그러나 네 번째 광고의 경우 다시 기사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이에 대해 학생기자들이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결국 이 광고는 사진을 삭제하고 내용만 실렸다. 이 과정에서 주간교수와 학생기자들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었고 그 와중인 11월 12일 총동창회로부터 다섯 번째 광고가 들어왔다. 이 광고 역시 기사 형식의 광고였다. 장한승씨는 “당시 대학신문 광고면은 한 면만이 여유가 있었고 학생기자들은 대학문학상 광고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문학상 마감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응모작이 10편밖에 들어오지 않아서 이 광고를 실어야 했다”고 당시의 학생기자단의 입장을 말했다. 그러나 주간교수는 남은 한 면에 총동창회 광고를 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총동창회 광고는 광고면에 실리는 것이라 주간의 권한 하에 있기 때문에, 학생기자들의 판단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주간의 뜻에 따를 수 없다는 학생기자들에게 주간은 인쇄중지를 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학생기자들은 신문을 예정대로 제작했으며 14일 새벽 편집장과 사진부장, 간사가 신문을 인쇄하기 위해 출력소를 찾았다. 그러나 주간의 명에 의해 인쇄가 중단되어 신문을 인쇄할 수 없었다. 결국 학생기자단은 자비로 신문을 인쇄했다. 주간교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으므로 제호를 쓸 수 없었고, 발행에 임박한 시간이라 기고 필자에게도 동의를 구하지 못해 외부기고를 싣지 않았다. 이 ‘백지제호’ 대학신문은 11월 15일, 학생기자단에 의해 배포되었다.대학신문의 위계적, 보수적 구조가 불씨photo2이런 사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대학신문사의 구조를 살펴보자. 대학신문은 총장을 발행인으로 두고 있으며 주간과 부주간 각각 한 명씩을 포함하여 7명의 교수들로 이루어진 본부 교수단이 있다. 본부 교수단은 자문조언과 신문사의 공동운영을 맡고 있으며 임기는 주간이 2년, 다른 교수들은 1년이다. 대학원생들로 구성되어 있는 간사단은 임기가 2년이며 자문과 조언을 담당한다. 발행인은 총장이므로 모든 임명권과 운영권은 총장에게 있다. 그리고 총장이 그 권한을 주간교수에게 위임함으로써 사실상 거의 모든 권한은 주간교수에게 있다. 학생편집장과 학생기자들은 다만 아이템을 뽑아 기사를 쓸 뿐이다. 이러한 지금의 구조가 형성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처음 학보사 형태의 신문사가 생겼을 때에는 기자단에 의해 편집장이 선출되는 구조가 아니었다. 단과대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을 추천받아 편집장으로 임명한 적도 있었고 외부에서 전문 편집자를 위촉했던 적도 있었다. 대학원생이나 교수를 편집장으로 앉히는 등 지금 학보사의 형태로는 보기 어려운 여러 형태가 있었다. 그러던 중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면서 대학 내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학보사들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대부분의 학보사들은 대학 본부 측에 학생 편집권을 요구했고 전(全)대학적인 투쟁의 영향으로 대학신문에서는 1988년에 최초 학생편집장을 선출했다. 학생편집장을 선출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학생편집권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주간교수가 신문사의 모든 업무를 통할하며 편집장은 관련 업무를 전담한다’는 사칙은 여전히 존재했고 이에 따라 모든 권한은 총장과 그에게 위임받은 주간에게 있었다.이러한 위계적 구조질서 때문에 주간교수와 학생기자들 사이의 마찰도 많았다. 과거 PD계열 학생들이 위세를 떨치던 때만 해도 학생운동에 관련된 기사를 놓고 그 기사의 타이틀을 어떻게 딸 것인가, 그 기사를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밤새 싸우기도 했었다.photo32003년도 2학기 대학신문 편집장이었던 정석우씨는 기자생활 중 주간교수와 학생기자들 간의 마찰이 가장 컸던 사례로, 구정모 전 학생회장이 총장실을 점거했을 당시를 언급했다. 2002년 1학기, 45대 총학생회에서 교육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다가 총학생회장이 총장실을 점거했다. 이 사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대학신문에서는 사설을 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에 대해 주간교수와 학생기자들의 주장이 엇갈렸다. 논쟁은 이틀 밤낮 계속되었고 결국 ‘투쟁의 목적은 정당했지만 수단은 적절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의 뜨뜻미지근한 사설을 내고, 맥박에 학생기자들의 입장을 쓰는 것으로 합의했다. 암묵적인 관행의 붕괴는 ‘휘발유’이렇듯 양측의 마찰이 여러 번 있었음에도 대학신문이 지금까지 잘 유지되어 왔던 것은, 양측 모두 사칙과 현실의 괴리감을 인정하고 합의를 통해 이 괴리감을 좁혀왔기 때문이다. 사칙에는 주간에게 모든 권한이 위임돼 있고 학생편집권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학생기자들이 직접 취재하고 거의 모든 기사를 쓰기 때문에, 신문제작에 있어 주간교수의 역할은 사실상 크지 않다. 학생기자들과 주간교수는 이러한 사칙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서로 간의 합의를 통해 갈등을 조율해 왔다. 공식적으로 학생편집권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지만 암묵적으로, 그리고 관행적으로 학생편집권이 존중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관성이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였다. 2003년도 1학기 대학신문 수습기자를 선발하는 데에 있어서 당시 주간이었던 이창복 교수와 기자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겼다. 관행적으로 수습기자를 선발하는 과정에는 주간과 학생기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주간교수는 사칙 상의 주간 임명권을 언급하며, 학생기자들이 수습 면접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어 후보자들의 합격 여부에도 학생기자들의 ‘참여 불가’를 주장했다. 이에 대한 마찰과 논쟁이 길어져 당시 수습기자 합격자 발표는 일주일 연기되었다. 이번 사태 또한 작년의 수습기자 선발권 논란의 일직선 상에 있다. 대학신문 전 편집장 정석우씨는 이번 사태에 대해 “사칙과 현실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구성원들이 갈등을 잘 해결해왔는데, 이런 시스템이 ‘누군가’에 의해 깨진 것 같다”며, 그 ‘누군가’가 주간교수임을 시사했다. 그렇다면 대학신문 내부에서는 ‘사칙 개정’에 대한 움직임이 없었는가? 지금까지는 관행적으로 사칙과 현실을 따로 생각했기 때문에, 학생기자들 사이에서도 구체적인 사칙개정 논의는 없었다고 한다. 다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학신문 퇴임기자단에서 사칙개정논의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구체적인 논의는 올해 신문 발행이 마무리되는 12월 초에 시작될 예정이다. 그러나 본부 측과 신문사 측이 사칙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개정논의가 시작되더라도 실제로 사칙이 어떻게 얼마나 개정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이다. 결국 각각 다른 곳을 바라보며 줄다리기하던 ‘사칙’과 ‘현실’은 이번 사건을 기점으로 줄이 끊어진 셈이다. 비공식적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던 학생편집권 또한 그 불안정한 외줄타기에서 떨어졌다. 근본적으로 학생기자들의 권한을 배제했던 사칙에도 문제가 있지만, 비공식적인 관행에만 의존하여 자신들의 권한을 확실히 찾지 않고 이번 사태에까지 이르게 한 학생기자들에게도 책임은 있다.photo4학생편집권 최대한 보장해주는 중대신문사중앙대학교 학보사인 중대신문사는 민주적인 학생편집권 보장이 되어있다. 중대신문사 역시 발행인은 총장이다. 그러나 타 학보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전직 기자 출신인 대학원생들로 이루어진 ‘국장단’이 있다는 것. 국장단은 대학신문의 간사와 그 역할이 유사하지만 전직 기자 출신들로 구성된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중대신문사도 80년대 중반까지는 총장과 주간의 막대한 권한 아래 학생편집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87년 당시 학생기자들의 투쟁을 통해 편집자율권이 보장된 이후로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또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임명권에 대한 부분이다. 대학신문에서는 모든 임명권이 총장에게 있다. 주간교수의 추천에서 선발, 임명까지 총장이 관할한다. 그러나 중대신문은 학생기자들이 주간교수를 추천하는 시스템이다. 학생기자단에서 적임자라고 판단한 교수 3명을 추천하면 총장은 그 중 1명을 주간교수로 임명한다. 수습기자 임명권도 학생기자들에게 주어져 있다. 주간교수가 수습기자 면접과 선발, 임명에까지 관여하는 대학신문과 달리 중대신문 주간교수는 수습기자 면접장에 들어가지 않는다. 중대신문사에서의 주간교수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맡고 있다. 일주일에 4번 있는 편집회의 중 주간교수는 단 한번 참여할 뿐이다. 87년 투쟁으로 개정한 사칙에 이 모든 것이 규정돼 있다. 주간교수는 일주일에 한 번 회의에 참석하지만 학생기자들의 아이템 선정에는 개입할 수 없다. 주간교수는 교수사회의 소식을 전해주고 학술적인 기사에 대한 조언과 설명을 해줄 뿐이다. 신문의 사설도 기자단의 부장들이 돌아가며 쓰기 때문에 주간교수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이 대학의 신문이라는 학보사의 기능을 저하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거의 모든 과정이 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배분율이 학생사회에만 치우치지 않을까. 이러한 우려에 대해 최은주씨(중대신문사 편집장)는 “중대신문은 학생신문이 아니라 대학의 신문이다. 중대신문사 학생기자단은 학생사회의 기사만을 싣는 것은 옳지 못하며 학생사회와 교수사회의 기사 배분율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며, “공정한 비율로 취재처를 정해서 돌기 때문에 사실상 기사가 한쪽에만 치우치는 문제점은 없다”고 답했다.균형유지 깨진 대학신문,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photo5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학보사의 궁극적인 개혁을 바라는 시각이 있다.전 대학신문 편집장(2000년 2학기)이면서 현 시사저널 기자인 신호철씨는 “이번 사건이 대학신문의 개혁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서울대의 특성상, 대학신문의 구조 안에는 교수의 입김이 상당히 많이 들어간다. 교수의 그러한 비중 자체가 학생기자들에게는 상당한 억압이다”라고 학보사 구조에 대해 비판했다. 덧붙여 “학보사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학생, 학부모, 교수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신호철씨는 궁극적으로는 학보사의 독립도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반면 학보사는 대학사회 내의 교수사회와 학생사회의 연결고리로서 계속 기능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최은주씨(중대신문사 편집장)는 “학보사는 학생사회와 교수사회를 아우르는 매개체이다. 그것이 학보의 역할이고 그러므로 학보의 기사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되고 양쪽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장한승씨 또한 “대학신문이 학교의 신문인 이상, 주간교수와 학생들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며 합의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백지제호 대학신문’이 발행된 후에도 학생기자단과 주간교수의 의견합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2주 연속 대학신문이 ‘백지제호’로 발행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12월 중으로 학생기자단과 운영회가 함께 회의자리를 갖는 것을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져 ‘백지제호’ 발행은 한 번으로 끝났다. 주간교수와 편집장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주간교수의 사표는 아직 수리되지 않은 상태이고, 편집장의 사표는 정상적인 신문발행을 위해 마지막 신문이 나온 후 수리될 예정이다. 장한승 편집장은 “12월에 있을 회의자리에서 학생편집권에 대한 논의가 다시 전개될 것”이라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대학신문 학생기자단은 일주일의 투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학보사의 위상과 학생편집권 보장에 대한 재논의가 불가피해진 것은 사실이다. 주간교수가 사임을 표명한 것도 하나의 성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편집장을 포함하여 데스크진이 대거 사퇴할 2005년도에 얼마나 연계성 있게 이 논의를 이끌어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