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민족주의자의 길

세 번째로 소개할 인물인 장준하는 흔히 재야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다.그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한일회담과 월남파병에 반대하면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의 명성을 얻는다.그 후 그는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하다가 의문사를 당함으로써 신화화(化)됐다.그러나 이러한 신화를 걷어내고 장준하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었던 만큼 진보적이지는 않았던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세 번째로 소개할 인물인 장준하는 흔히 재야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한일회담과 월남파병에 반대하면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그 후 그는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하다가 의문사를 당함으로써 신화화(化)됐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를 걷어내고 장준하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었던 만큼 진보적이지는 않았던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번 기사에서는 장준하의 사상적 흐름을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신화 이면에 있는 장준하의 본모습을 찾아보고자 한다.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장석인은 1919년에 19세의 나이로 3.1 운동에 가담해 신의주 부청의 공무원 자리를 잃고 일본경찰에 쫓기게 된다. 그 후 1923년에 배일(排日)민족사상이 강한 선천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신성중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학한다. 1934년에는 신성중학교의 교목이 되면서 장로회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지만, 1938년 신사 참배를 반대한 일로 교사직에서 쫓겨났다. 그 후 장석인은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목회활동을 계속했다. 이러한 장석인의 민족주의적, 기독교적 사상은 장준하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장준하의 강한 기독교 정신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를 증오하게 만들었고, 그로 하여금 반공(反共)사상을 갖게 한다.‘장정’과 광복군 활동 시기에 심화된 반공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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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광복군 시절에 민족주의와 반공주의 사상을 형성했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으로 조선 민중을 전쟁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1938년 4월에 실시한 ‘육군 특별 지원병령’을 시작으로 1943년 10월에는 학도 지원병제를 실시했고, 장준하 역시 학도병으로 입대한다. 1944년 1월 20일 장준하는 훈련을 받기 위해 평양의 일본군 42부대로 입대한다. 그는 중국 땅에 가면 일본군을 탈출해 임시정부나 독립군으로 들어가 합류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은 후 장준하는 중국 서주 쓰가다 부대에 배속된다. 같은 해 7월 7일 장준하는 결국 일본 부대를 탈출하는 ‘장정(長征)’을 감행한다. 장정에 성공한 장준하는 8월에 한국광복군훈련반에 입소했고, 그 후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다. 한국광복군 활동은 장준하가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가 된다. 장정 및 광복군 활동을 통해 장준하는 반공사상을 심화시킨다. 장정과정에서 중국공산당계열인 신사군이 장준하 일행을 돌봐준 국부군(유격대)을 습격한 것이나, 임시정부의 좌파 계열인 김원봉 등이 자신들을 포섭하기 위해 공작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공산주의자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는 조선인 공산주의자에 대해 분열과 파당을 일삼는 음모적 집단으로 파악하기에 이른다. 특히 장준하는 김원봉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판에 박힌 공산분자로 생각했다.해방 후 친미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을 형성한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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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思想界」는 친미적, 자유민주주의적 색채가 강했다.

해방 후 장준하는 1952년 9월 전쟁 중에 피난수도 부산에서 월간지 「思想」을 창간한다. 「思想」은 국민사상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잡지다. 국민사상연구원은 본래 국민사상지도원으로 친미반공적 색채가 강한 백낙준 문교부 장관이 ‘전시에 혼란된 국민사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이 국민사상지도원의 기획과장이 바로 장준하였다. 그 후 장준하는 1953년 4월에 「思想」을 이은 「思想界」를 창간한다. 「思想界」의 초기 논조는 자유주의와 반공주의였다. 또한 ‘자유세계’를 지켜주는 미국에 대한 강한 신뢰가 깔려 있었다. 이처럼 해방 후 장준하의 행적과 사상은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친미주의와 자유주의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친미반공적인 색채를 띄고 있었던 장준하는 초기 이승만 정부에 대해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1957년이 되면서 이러한 장준하의 입장은 선회하게 된다. 그는 「思想界」 1957년 6월호 권두언(卷頭言)에 ‘우리는 특권계급의 밥이 아니다’라는, 이승만 정부를 비롯한 그 당시 특권계급의 부정과 부패를 통렬히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싣는다. 1957년을 기준으로 장준하의 반공주의적 의식이 조금씩 변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바로 함석헌과의 만남이다. 함석헌은 1958년 8월호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라는 글에서 기존의 친미반공의식을 뛰어넘는 주장을 한다. 우리가 미국과 소련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 영향을 받은 장준하는 같은 달 권두언에 이와 비슷한 내용의 ‘거족적 반성이 촉구된다’라는 글을 쓴다. 그러나 장준하가 친미반공의식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혁명을 지지했으나 「思想界」 1960년 11월호 권두언 ‘이데올로기적 혼돈의 극복을 위하여’라는 글을 통해 반(反)혁명적인 친미반공주의 입장을 드러낸다. 4.19 혁명 세력이 주장하던 ‘평화공존론’이나 ‘중립국진영론’을 ‘소련의 세계적화(赤化) 야욕’과 결부시켜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장준하의 친미반공의식은 심지어 5.16 쿠데타 지지로 나가게 된다. 그는 「思想界」 1960년 6월호 무기명 권두언 ‘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에서 5.16 쿠데타를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고 치켜세웠다. 그의 친미반공적인 민족주의 성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박정희와의 대립 – ‘진정한’ 민족주의자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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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박정희 최대의 사상적,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 시절 많은 옥고를 치른다.

5.16 쿠데타에 대한 장준하의 지지 입장은 「思想界」 1961년 7월호에 쓴 ‘긴급을 요하는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주정치에로의 복귀’라는 글에서 비판적으로 변한다.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장준하는 박정희 세력의 반자유적, 반민주적 성격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장준하는 박정희를 인간적으로 불신했고, 질이 나쁜 사람으로 생각했다. 특히 박정희의 만주군 경력은 광복군이었던 장준하가 그를 반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불신하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였다. 장준하는 1964년 한일회담을 둘러싸고 박정희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장준하는 한일회담을 일본제국주의 군인인 박정희가 침략자이자 전범자 집단인 자민당과 굴욕적인 매국협상을 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는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면서 점차 반공의식에서 벗어난 민족주의 사상을 형성하게 된다. 그가 반공의식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진정한 민족주의자로 거듭나게 된 계기는 바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었다. 그는 7.4 남북공동성명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씨알의 소리」 1972년 9월호에 ‘민족주의자의 길’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다. 이 글에서 장준하는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라며 좌우를 넘어선 민족주의자의 길을 제시한다. 장준하의 사상적 흐름은 친미반공주의부터 통일지상주의까지 매우 폭이 넓었다. 그러나 장준하의 사상적 ‘전향’을 부정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장준하의 사상적 흐름은 김구의 그것과 닮아있다. 김구 역시 극우주의자로서 반공적 색채를 짙게 띄고 있었다. 그러나 분단이 고착화되고 이념에 의해 조선 민중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김구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는 등 공산주의와의 연합 통한 통일을 추진했다. 국사학과 정용욱 교수는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사상적 흐름은 한국적 민족주의의 다이내믹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준하 역시 한국적 민족주의의 궤적을 따라간 한국의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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