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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헉스리(Julian Huxley)의 『Religion without Revelation』
아직 못다한 이야기

줄리언 헉스리(Julian Huxley)의 『Religion without Revelation』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이미 특정의 종교를 믿어왔거나 동시에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나 또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곤혹스런 문제가 주어진다.종교의 가르침 가운데 과학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들이 포함되어있다는 점이다.이는 굳이 과학을 전공으로 택한 사람에게만 오는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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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이미 특정의 종교를 믿어왔거나 동시에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 또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곤혹스런 문제가 주어진다. 종교의 가르침 가운데 과학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들이 포함되어있다는 점이다. 이는 굳이 과학을 전공으로 택한 사람에게만 오는 문제는 아니다. 종교를 가지면서도 합리성이라는 잣대를 버릴 수 없는 현대의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같은 문제로 고민한다. 곧 지성과 신앙 사이의 괴리인데, 이는 많은 현대인에게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줄리언 헉스리의 『계시 없는 종교(Religion without Revelation)』(Harper & Row 1957)는 이 문제를 풀어나갈 적절한 안내자 구실을 한다. 나도 오랫동안 이 문제로 고심을 하다가 이 책을 읽고 비로소 머리 속에 밝은 빛이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일이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논의된 것도 아니고, 또 이에 대한 해답이 한 갈래로만 나와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한 쪽으로는 종교의 가르침 가운데 비합리적 요소를 과감히 도려내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며, 다른 한 쪽으로는 신앙에 관한 한 합리성이라는 잣대를 들여대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신앙 또는 지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크게 손상시킬 수 있는 이러한 주장들과는 달리 헉스리의 이 책은 신앙과 지성의 본령을 잘 짚어내면서도 이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나간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저자 줄리언 헉스리(Julian Huxley, 1887-1975)는 학문과 문필로 이름높은 영국의 전통가문 출신이다. 그는 뛰어난 생물학자임과 동시에 철학자, 과학사상가로서 많은 저작을 남겼고, 사회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2차 대전 이후에는 유네스코를 창립하고 그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지금 야생동물 보호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는 세계야생동물기금(World Wildlife Fund: WWF)도 그의 손을 거쳐 창설된 기구이다. 이러한 그의 배경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그의 책은 단순한 학문적 논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치밀한 논리와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자신의 논지를 설득력 있게 펴나가고 있다. 인간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그 무엇에 대한 경외감을 갖는데, 그는 여기서 종교 행위의 원초적 형태를 찾고 있다.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이런 대상들은 곧바로 인간의 운명이나 삶의 의미와 연관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인간은 이를 총체적으로 수용하게 되는데, 이 안에는 신성에 대한 감성적 측면 뿐 아니라 행위를 위한 도덕적 각성이 나타나고 또 이를 이해하려는 지적 충동이 함께 자리하게 된다. 종교적 행위에 결부되는 이 세 가지 양상, 즉 감성적, 도덕적, 지성적 양상은 각기 별도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긴밀한 연관을 갖게 된다. 도덕적 정당성이 지성적 타당성을 벗어나서도 안되며, 신성에 대한 감성적 수용으로 인해 지성과 도덕성이 배제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 모두를 아우르는 일이 그리 쉽지가 않다. 수많은 모순과 갈등이 제기되며, 개인적으로 그리고 범종교적으로 이를 해소하려는 피나는 내적 투쟁이 전개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밝은 이해에 도달한다. 그 어떤 외적 계기 혹은 내적 직관에 의해 우리가 흔히 ‘깨달음’이라 부르는 한 단계 높은 통합적 이해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해당 주체로서는 도저히 자기 안에서 나온 것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라운 것일 수가 있다. 이럴 경우 그는 흔히 이를 ‘신’ 혹은 그 어떤 우주적 실재가 자기에게 특별히 알려준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계시’인데, 일단 이러한 해석이 내려지고 나면 그 계시의 내용에 대한 자신의 신념은 더욱 굳어지며, 이를 손쉽게 절대 진리의 단계로까지 끌어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제도 종교와 연결될 때 그 안의 도그마로 작동하게 된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도그마의 정체를 파헤친다. 그 어떤 깨달음의 내용이 아무리 심오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를 초월적 존재에 의한 ‘계시’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모두는 인간의 심리학이나 신경생리학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며, 또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종교적 신념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서 오는 위험과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제도적 종교가 정치 사회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라크 전쟁의 사례를 보자.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의 인터뷰 내용 중에 이러한 문답이 나온다. “당신은 이라크 전쟁을 결심할 무렵 당신 아버지(부시 전 대통령)의 의견을 들은 일이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대통령은 육신의 아버지와 의논해서 정책을 결정하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의견을 물었고 그 뜻에 따라 결정했다”고 대답했다. 이는 아마 기독교도들이 들으면 환호할 만한 멋진 대답이 될 수 있겠지만, 이것이 만일 그의 진심에서 나온 말이라면 우려할 일이다. 자기의 결정이 신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 한 그는 추호의 과오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인류의 엄청난 불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더 많은 믿음, 더 확고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믿음 즉 믿음 그 자체가 어디에 바탕을 두는가 하는 점에 대한 ‘바른’ 믿음이다. 저자 줄리언 헉스리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아쉽게도 이 책은 아직 (서점가의 사정에 밝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 책이 바로 읽혀 독자들의 혜안을 여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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