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1중, 고등학교 시절 권장도서에 들어가는 대표적인 연애 소설인 는 사춘기의 소년 소녀들에게 아릿한 감정을 선사한 황순원의 작품이다. 모두 알다시피 소녀는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묻어주세요’라는 ‘잔망스런’ 말을 남기고 죽었고, 소년이 그 소식을 듣는 부분에서 소설은 끝난다. 소설은 쌉쌀하고 아릿한 감정만을 남긴 채 끝나버리고, 독자는 소녀의 정확한 병명이 무엇이었는지, 소년은 그 이후 어떻게 살아갔을지 전혀 알 수 없다. 아니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소녀의 죽음 이후의 소년이 궁금했던 한 감독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엉뚱한 상상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웃게 하는 다소 특이한 젊은이다. 그는 이번에도 그 축복받은 상상력으로 이후 소년의 삶을 재구성해냈다. 그는 첫사랑을 잃고 남겨진 소년을 통해서 ‘상처’가 무엇인지, ‘성장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담담히 읊조린다. 철이 든다는 것, 혹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미친 짓’을 하지 않는 것이며, ‘감성’보다는 ‘이성’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며,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스킬은 바로 ‘감정 조절’. 가슴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복잡한 감정의 덩어리들을 이성의 테두리로 꽁꽁 묶어서 삼켜 내어 ‘불안정한’ 상태를 피해나가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 조절을 연습하는 과정이 바로 사랑이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이 끔찍한 감정의 파도를 경험함으로써 감정을 조절하고 숨기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것이다.소년은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겪게 된다. 사랑의 시작은 소녀가 건넨 조약돌만큼이나 자그마하고 소소했지만 그 사랑은 소년에게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감정을 안겨준다. 하지만 소년을 진정 ‘어른’으로 만든 것은 소녀와의 사랑이 아닌 이별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손도 쓸 수 없이 무력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은 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시련이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떠나가는 것을 잡을 수 없다는 무력감은 곧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자 굴복이기 때문이다. 유한성은 인간을 가장 괴롭히는, 인간이 평생 해결할 수 없는 과제다. 한 유명한 철학자는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죽을 것을 아는 비극적인 존재’라고 하지 않았나. 소년은 소녀의 죽음을 통해서 너무 빨리 인간의 비극성에 눈을 떴고, 이것은 그에게 충격과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유한성’이란 개념은 어린 소년에게 너무 버거웠기에 소년은 처음에 도저히 이를 인정할 수가 없다. 소녀의 무덤 앞에서 하루종일 비를 흠뻑 맞아도 무덤을 떠나지 않는다. 심지어 소녀의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울고 소리쳐 봐도 소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빗속에서 돌아오지 않는 소녀를 기다리다가 열병을 앓게 된 소년은 그제야 소녀의 부재(不在)를 인정한다. 그리고 소녀를 잃은 또 다른 소녀의 친구에게 소녀의 죽음을 (본의 아니게) 알리고 함께 슬픔을 나눈다. 소년은 이렇게 인간이 일시적으로나마 유한성의 슬픔을 극복하는 일반적인 방식, ‘위로와 공감’ 을 배운다. 이렇게 해서 소년은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 즉 상실과 인정, 그리고 극복의 과정을 마치게 된다.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더 이상 소녀의 무덤 앞에서 울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년이 서울에서 전학 온 또 다른 소녀의 접근을 거부하며 조약돌을 ‘던져버린’ 것이다. 유한성을 인식한 소년은 더 이상 상실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소년이 아무리 상처를 꽁꽁 싸매고 숨긴다 해도 슬픔은 어느 비 오는 날 불현듯 소년을 습격해서 그를 펑펑 울릴지도 모른다. 이렇게 인간은 영원히 철이 들 수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소나기는 그치지 않았다. 마음속에 상처를 숨기고 겉으로 성장한 체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소년은 결코 아무렇지 않은게 아니다. 소나기는 끊임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 소년의, 또 우리의 곪은 상처를 후벼 팔 것이다. photo2
<소나기>, 그 이후
photo1중, 고등학교 시절 권장도서에 들어가는 대표적인 연애 소설인 는 사춘기의 소년 소녀들에게 아릿한 감정을 선사한 황순원의 작품이다.모두 알다시피 소녀는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묻어주세요’라는 ‘잔망스런’ 말을 남기고 죽었고, 소년이 그 소식을 듣는 부분에서 소설은 끝난다.소설은 쌉쌀하고 아릿한 감정만을 남긴 채 끝나버리고, 독자는 소녀의 정확한 병명이 무엇이었는지, 소년은 그 이후 어떻게 살아갔을지 전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