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6일, 서울 원표공원에서 슬럿워크 운동이 진행됐다. 슬럿워크는 캐나다의 한 경찰이 ‘여성이 성범죄를 당하지 않으려면 노출이 심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전 세계적 시위다. 한국에서도 트위터 등을 통해 슬럿워크가 확산됐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은 자신들에게서 성범죄의 원인을 찾으려는 사회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행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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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력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는 사회적 시선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있다. ⓒAFP |
여성가족부가 2010년 서울시 경찰 17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성폭력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7.8%가 “성폭력 피해여성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성폭력의 책임이 피해자에게도 있다는 인식이 한국 사회에도 만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09년 한국에서는 16156건의 성폭력 범죄가 발생했다. 그러나 10%를 밑도는 신고율을 고려하면 실제로 발생한 성폭력은 훨씬 많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강간죄, 아직 ‘정조에 관한 법’ 못 벗어나 형법 제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형사법상 간음은 ‘남성 성기가 여성 성기에 삽입되는 형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간음을 제외한 성추행은 비교적 형량이 낮은 강제추행죄로 처벌받게 된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차혜령 변호사는 “형법에 강간죄가 먼저 규정되는 것은 성기 삽입 형태의 성폭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1950년대 당시 입법자들의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국성폭력상담소 허복옥 씨는 “과거의 정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1995년까지만 해도 법률에서 성폭력은 ‘정조에 관한 법’이라는 항목으로 다뤄졌다. 이후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뀌었지만 허 씨는 “여전히 우리사회가 여성의 순결을 가장 중시함으로써 성폭력 범죄를 정조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의 문숙영 씨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순결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자신이 더러워졌다는 수치심이나 자신에게도 원인이 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자해를 하기도 한다”고 한탄했다.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폭행 또는 협박이 수반됐다는 강제성이 입증돼야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을 했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허 씨는 “성적 자기결정권에 따라 본인이 원해서 결정하지 않았다면 강제성과 폭력성을 지닌 것”이라며 “피해자의 저항 정도를 기준으로 강간을 규정하는 것은 여전히 남성 중심적 시각이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특정 상황에 처했을 때 저항할 수 있는 정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처사며, 법은 바뀌었지만 정조에 관한 기존의 의식이 사회에 만연하다는 것이다. 매우 낮은 성범죄 기소율, “친고죄 폐지해야” 성범죄는 기본적으로 친고죄로, 피해자 본인이 직접 고소를 해야 수사가 시작될 수 있다. 현재 성폭행 범죄의 고소율은 7%, 기소율은 4% 대에 머물러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허복옥 씨는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신고를 한 후에도 주변에서 알게 될까 굉장히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과 가해자에 의한 보복성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열림터의 문숙영 씨는 “당시 피해자의 사생활을 중요시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친고죄로 인해 오히려 피해자가 더 큰 고통을 겪는 폐해가 많다”고 설명했다. 허복옥 씨는 “현재는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친고죄를 적용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도 정조 이데올로기가 숨겨져 있다”며 “성폭행으로 인해 순결을 잃었기 때문에 주변에 알려지면 피해자에게 좋지 않다는 논리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친고죄가 폐지되면 피해자들도 쉽게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힐 수 있고, 주변 사람들이 보다 쉽게 신고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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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차혜령 변호사는 “친고죄를 폐기해야한다”고 지적했다. |
한편 피해자가 신고를 하면 가해자가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가서 고소를 취하하도록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친고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를 보면 수사가 종료되기 때문이다. 피해자 부모는 성폭력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피해자가 사건을 신고하고 가해자가 찾아온 뒤에야 정황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해자가 피해자, 혹은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합의를 요구하는 것 자체를 처벌할 수는 없다. 허복옥 씨는 “성폭력 범죄가 일어나도 합의를 보면 해결된다는 인식으로 인해 성범죄가 개인적인 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는 우려를 내비쳤다. 성범죄의 원인이 특정 개인에게 돌아감으로써 사건이 점점 개별화되고 결국 피해자가 겪게 되는 고통은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폐해를 막기 위해 많은 여성단체들은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 규정을 폐지해야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여성단체만이 이러한 입장을 지닌 것은 아니다. 여성가족부가 2010년에 무작위 표본추출한 2200명의 전국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72.1%의 응답자가 “성폭행 범죄에 친고죄가 폐지돼야한다”고 답했다.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수차례 친고죄 폐지를 권유한 바 있다. 차혜령 변호사도 “고소기간이 1년으로 제한돼 있는 것은 친고죄 전제하에 문제가 되는 것이므로 친고죄가 폐지되면 해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피해자의 성폭력 입증 자체가 어려워 성폭력 피해자는 임신, 불임, 자궁 및 질 손상, 성병 감염, 섭식장애 등의 증상을 보일 수 있다. 정신적으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우울증, 대인기피증, 과대망상, 불면증 등이 나타날 수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허복옥 씨는 이러한 증상으로 인해 피해자들은 외출에 대한 불안감, 남성에 대한 혐오, 대인관계 기피 등으로 사회생활이 힘들어지거나 심한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성범죄는 이처럼 피해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성폭력 가해자는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해도 증거가 불충분해 불기소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가 상해를 입지 않은 경우에는 폭력이나 협박을 증명하기 어렵고, 상해를 입었더라도 시간이 지나 그 흔적이 없을 경우 입증이 힘들기 때문이다. 고소장이 접수된 사건 중 절반 정도만이 기소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러한 난점을 보여준다.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당시 상황들을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신빙성이 떨어져 피해 사실 자체가 의심받기도 한다. 강간이 ‘성적 자기 결정권’의 논리가 아닌, ‘피해자의 저항정도’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이다. 데이트 성폭행의 경우, 성폭행 발생 이후 같이 식사를 했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성폭행을 입증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례가 있다. 성폭행이 발생하면 피해자는 뇌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각을 아예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해리장애를 겪게 되기도 한다. 대구 학생 집단 성폭행 사건의 경우, 피해자는 해리장애로 인해 성폭행이 일어나고 있을 때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사건 해결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고 성관계에 합의한 것으로 간주돼 성폭행을 입증하기 어렵게 된다. 수사 과정에서 반복적 진술을 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피해 당시를 여러 차례 회상하고 같은 내용을 재차 진술해야한다. 기소과정에서 가해자를 대면해야하는 것도 피해자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허복옥 씨는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을 만나고 가해자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것만으로도 후유증을 드러내고 무서움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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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작은 말하기’와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등을 통해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
피해자를 대하는 사회의 시선이 고통이 되기도 한다.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를 당했음에도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회적 시선에 2차 피해를 겪는다. 허 씨는 “성폭력 피해자는 그 공동체에서 더 이상 지내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지만 오히려 가해자는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국사회가 성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고 가해자에 대해서는 남성의 성충동을 정당화하고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비판이다. 성폭력 상담소와 쉼터,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주변의 시선이 이렇다보니 피해자 스스로도 자신에게서 성폭력의 책임소재를 찾게 된다. 고소 결정이 옳았는지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기도 한다. 피해자의 이러한 혼란과 고민을 상담할 수 있는 여성긴급전화 1366과 상담소들이 운영되고 있다. 성폭력 상담소에서는 의료, 심리적 지원을 통해 피해자의 치유를 돕고 치료를 위한 전문 기관이나 쉼터를 연계해주기도 한다. 또한 법률적으로는 고소장 작성부터 검토, 법률 자문, 수사 동석, 진술 동석, 진정서 검토, 법정 참관 등을 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치유를 돕는 쉼터 시설은 전국에 19곳이 있다. 쉼터에는 기본적으로 6개월 동안 입소가 가능하고, 그 기간을 최대 1년 6개월까지 연장할 수 있다. 다만 친족성폭행 피해를 입은 미성년자에 한해서 만 18세까지 쉼터에서 생활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일정기간이 지나면 치유 여부와 관계없이 피해자가 범죄에 취약한 환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쉼터에서는 치료 회복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품성개발, 집단 및 개인상담 등을 진행한다. 또한 캠프, 성교육, 영화, 연극관람, 피아노, 요가 등 정서적 안정을 취할 수 있는 활동들과 원예치료, 미술치료, 음악 치료 등 개인의 특성에 맞는 치료가 실시된다. 그러나 쉼터 수가 많지 않고 수용가능 인원도 제한돼있어 입소를 원하는 모든 피해자들에게 이러한 치료가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의 경우, 두 명의 주간 상담원이 10명 정원의 쉼터 구성원들을 돌보는 등 인력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 문숙영 씨는 “상담원 인력 보충을 위해 취사원이나 조리원이라도 충원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했지만 실효성 있는 방안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상담소와 쉼터, “기본적 예산 지원 없는 인센티브는 반대” 쉼터는 국가의 지원과 후원회비를 통해 운영된다. 하지만 문숙영 씨는 “정부와 공무원의 실무 이해도가 매우 낮다”고 지적했다. 치료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지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생활환경은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상담소나 쉼터에서 근무하는 활동가들은 사회복지사 급여 수준의 급여를 정부에서 받아야하지만 그마저도 기준보다 적은 실정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정부로부터 의료비 지원 등을 받지만 산부인과와 정신과 등 몇몇 분야에만 국한돼있다. 문 씨는 “성폭력 피해가 이러한 특정 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전반적인 신체적·정신적 후유증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며 현행 지원 체계의 허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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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의 문숙영 씨는 보호시설 현장의 실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여성가족부 측의 지원책을 비판했다. |
작년 말, 여성가족부는 성폭력 피해자 지원예산 정책으로 성폭행 피해자 상담소와 쉼터에 인센티브 방식의 지원책을 내놓았다. 3년마다 성폭력 상담소와 쉼터 등을 평가해 순위를 매겨 인센티브를 차등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 씨는 “각 상담소들은 나름의 운영철학과 방침이 있는데 정부의 정책에 맞게끔 운영해야만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게 됐다”고 비판했다. 또한 피해자들의 치료회복 프로그램을 위한 예산은 매년 감축하면서 인센티브만을 확충하는 실태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러한 취지에서 80여 곳의 관련 시설들은 정책에 반대해 인센티브 반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기본적인 예산을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것부터 여성가족부가 우선적으로 실시해야한다는 것이다. 재정 지원이 축소되고 시설도 부족한 현 상황에서 보호시설 확충은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 문숙영 씨는 “궁극적으로는 상담소와 쉼터가 필요 없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호시설 확충에 앞서, 피해자가 쉼터가 아닌 공동체 내에서도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