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쟁이’들의 끝나지 않은 싸움

2009년 11월 14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용산참사 300일 범국민추모대회’가 열렸다.범국민추모대회에서는 300일째 묵묵부답인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내용과 장례만이라도 치르게 해달라는 호소가 줄을 이었다.다음날인 2009년 11월 15일에는 풍물패연합이 참사 현장에서 ‘용산참사 해결 염원 한(恨) 굿’ 추모행사를 했다.300일 전 이 곳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는 5명의 철거민들과 1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었다.

2009년 11월 14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용산참사 300일 범국민추모대회’가 열렸다. 범국민추모대회에서는 300일째 묵묵부답인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내용과 장례만이라도 치르게 해달라는 호소가 줄을 이었다. 다음날인 2009년 11월 15일에는 풍물패연합이 참사 현장에서 ‘용산참사 해결 염원 한(恨) 굿’ 추모행사를 했다. 300일 전 이 곳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는 5명의 철거민들과 1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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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용산 분향소에는 촛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경찰의 무리한 진압이 참사 불러

300일전 1월 19일 남일당 건물 위의 상황은 평화로웠다. “염산투척과 화염병이 난무했다는 경찰의 발표와는 달리 철거민들은 용역과 경찰들에 대해 방어적 자세만 취할 뿐”이었다는게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권영국 변호사의 주장이다. 소강상태가 지속될 즈음 경찰이 급작스럽게 작전을 개시했다. 권 변호사는 “진압에 들어갈 이유가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경찰 수뇌부가 조급하게 진압을 결정했다”며 졸속한 진압결정을 비판했다. 이렇게 진압이 급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철거민과 경찰사이에는 협상을 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고, 진압에 나선 경찰특공대에게 망루 내부의 상황과 위험물질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경찰특공대의 투입자체가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목소리도 있다. 현재 용산 유가족 변호인단을 맡고 있는 김형태 변호사는 “경찰특공대의 목적은 테러에 준하는 집단에 대한 섬멸”이라며 “일반 시민들이 있는 망루에 경찰특공대를 투입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명박정권용산철거민살인진압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 소속 류주형 대변인은 “용산참사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라며 그 이유로 작년 촛불이후 법무부 장관이 공권력 집행과정에서 우발적인 폭력이 일어나도 법적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일선에 전달한 사실을 언급했다. 즉 “1월 20일 경찰특공대는 살인면허를 갖고 있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민사문제로 진행되는 명도소송의 특성상 경찰이 직접 개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개입명분을 위해 철거민들을 자극해 화염병을 던지게 하고, 골프공을 던지게 유도했다”고 김 변호사는 밝혔다. 철거민들의 이런 반응들을 진압에 구실로 삼아 경찰이 개입했다. 권 변호사는“시민의 편이 아닌 자본의 아래에서 경찰이 하수인 노릇을 한다”며 “자본력이 있는 조합사무소의 행동에 대해서 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경찰이 놓여있다”고 경찰의 개입을 비판했다.무엇이 그들을 망루에 오르게 했는가? 용산 4구역 세입자들은 용역들의 횡포를 피해 망루에 올랐다. 용산 4구역에서 장사를 하던 박선영 씨는 망루를 ‘최후의 방어수단’이라고 표현했다. 더 요구하기 위해서, 투쟁을 위해서 망루에 오른 것이 아니라 용역들에게서 너무 시달려서 망루에 오른 것이다. 망루라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용역들의 횡포는 용산 4구역이 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범대위의 한 관계자는 “시커먼 옷을 입은 덩치 큰 사내들이 가게에 들어와 욕설로, 폭행으로 손님들을 내쫓아 장사를 방해하기 일쑤였다”며 재개발전 용역들이 4구역에 상주해 시민들을 괴롭히던 상황을 설명했다. 김형태 변호사는 용역에 대해서 “건설사와 형식적으로는 철거계약을 맺지만 실제로 이들이 하는 일은 사람을 내쫓는 일”이라며 시공사가 자행할 수 없는 불법 역할을 용역이 대신한다고 비판했다. 범대위 사람들은 용역들의 행태에 대해 “용역들은 상인들에게 상인들의 아이 이름을 불러가며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또한 부녀자들에게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 모멸감을 느낄 수 있는 발언을 했다. 이미 철거가 진행된 건물에 빨간 락카로 식칼과 사람이 목매달은 그림을 그리며 폭력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침마다 가게 앞엔 쓰레기, 비둘기 시체, 오물들이 뿌려져 있었다. 심지어 망루에서 돌아가신 고 이상림 씨의 경우는 한참 어린 용역들에게 성기를 붙잡혀 내팽개쳐지기도 했다”고 말하며 치를 떨었다. 김 변호사는 철거민들이 만족스럽지 않은 보상금에도 불구하고 용산을 떠난 이유가“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철거민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경찰은 용역들을 비호했다는 비판이 있다. 폭행당한 세입자가 경찰에 신고를 하면 경찰은 언제나 늦장대응을 보였고, 적극적인 수사권을 행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용역들은 자해를 서슴지 않으며 역으로 세입자들을 고소했고 용역들에게 맞은 피해자들이 도리어 용역들에게 치료비를 물어주는 일도 있었다. 김 변호사는 “피해자가 고소를 해도 처벌은 피해자가 받고 용역들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며 경찰마저도 세입자의 편이 아닌 상황을 지적했다. 공권력마저 세입자를 보호해 주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힘없는 철거민들은 힘을 모을 수밖에 없었고,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3층에서 옥상으로 옥상에서 망루로 쫓겨 갈 수밖에 없었다. 집회·시위의 자유마저 빼앗긴 그들참사 이후에도 용산 철거민들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다. 류주형 대변인은 “경찰에서 범대위 이름으로 신고한 집회는 단 한 건도 허가한 것이 없다. 심지어 기자회견조차도 범대위의 이름으로는 허가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찰 측에선 범대위의 이름이 들어가면 불법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번 300일 집회도 범대위가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집회신고를 해서 허가를 받은 것이다. 용산에서 미사를 여는 이강서 신부는 이러한 정부의 태도에 대해 “정부의 기본 입장과 태도는 용산 4구역, 전국철거민연합, 유가족, 범대위 활동가들, 매일 미사를 드리는 신부등 용산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예비 범법자 취급을 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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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역들에 의한 폭력은 현장에선 일상이다.

참사 이후에도 계속된 경찰·용역들의 폭력

집회 시위의 자유에 대한 탄압뿐 아니라 물리적 폭력은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철거를 하려는 용역과 그것을 막으려는 범대위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 용역들은 철거를 막으러 간 여성의 머리채를 잡고 내던졌고 그 여성은 목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또한 용역들은 곡괭이를 휘두르며 철거를 막으려는 사람들을 위협했다. 용역뿐 아니라 경찰 역시 폭력적인 태도를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6월 21일에는 경찰이 신부들을 폭행했다. 류 대변인은 “일요일 아침 9시에 경찰들이 기습적으로 와서 신부님들의 천막을 탈취해 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에 폭행에 의해 이강서 신부는 옷이 찢어지고 온 몸 곳곳이 멍들었다. 이 신부는 당시 폭력을 휘두른 경찰에 대해 “같은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안 됐다. 인간의 양심을 가졌다면,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라면 괴로워서 경찰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찰이 현실을 도피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현실에 대한 왜곡”이라며 경찰들을 비판했다. 철거민도 신부도 변호사도 폭력의 대상이 됐다. 권영국 변호사는 서울지방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 이후 연행됐다. 권 변호사는 “변호사 신분을 밝혔음에도 폭행을 당했다”며 묻지마 연행을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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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들이 권영국변호사를 폭력으로 제압하고 있다.

“법은 그들을 두 번 죽였다”

물리적 폭력 이외에도 유족들과 용산 관련 활동가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용산참사 수사기록 비공개와 농성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한 1심 선고 등 법적으로 가해지는 압박이다. 김형태 변호사는 “3000쪽 가량의 공개되지 않은 수사기록에는 경찰에 과잉진압에 관한 지휘부의 진술과 용역업체와 경찰과의 관계가 담겨 있을 것”이라며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는 공개하지 않는 검찰들을 비판했다. 권 변호사는 여기에 덧붙여 “검찰이 용역업체 사무실에서 압수한 물품 중 용역업체의 회계장부도 있었다. 장부 속에 용역업체와 조합사무소와 건설사와 경찰사이에 모종의 유착관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겠느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사생활의 문제이고 사건과 관계없다는 검찰의 발표에 대해 “사생활의 문제라는 건, 검찰이 조사할 때 경찰 수뇌부를 불러다 사생활을 조사했다는 것인데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경찰이 진압을 결정한 과정과 수행과정에서 안전을 수칙 지켰는지 여부가 담겨있는 진술 내용이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며 “전적으로 검찰이 자신들의 주장에만 부합하는 증거만 제시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한 쪽으로만 치우친 채 파행으로 치닫던 법정 공방은 10월 28일 법원이 검찰의 기소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 것에 대해서 권 변호사는 “법원이 사법부의 권위를 스스로 포기했다”며 무너진 사법체계를 지적했다. 경찰의 공무집행을 방해하다가 1명의 경찰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명목으로 농성자들을 기소한 검찰에 대해 “공무집행이 애초에 정당하지 못했다”며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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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변호사는 “1심 법원 판결은 어처구니 없는 판결”이라고 사법부를 비판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김 변호사는 “이렇게 터무니 없는 판결은 처음 본 것 같다”고 사법부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다. 망루에서 목숨을 잃은 다섯 명의 철거민을 피해자가 아니라 공범으로 보고 있는 검찰에 대해 이강서 신부는“자본, 권력 앞에 스스로 시녀역할을 자청한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의 이러한 행태는 국민참여재판을 막은데 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변호인단은 독점적 수사권이 인정되는 재판은 공정하고 투명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공정하고 법상식에 가까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으나 검찰이 60명의 증인을 무더기로 신청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러나 검찰은 실제 재판에서 40명의 증인만을 신청함으로써 60명의 증인 신청이 국민참여재판을 막는 용도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렇게 권력기관들이 하나가 돼 철거민을 짓밟는 행위에 대해 김형태 변호사는 “자본의 힘이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항소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유족들을 보고 다시 힘을 내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라고 말했다.참사 이후 300일이 흘렀지만 학생사회는 여전히 무반응300일이라는 시간 앞에 용산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서울대학교 내에도 학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용산을 잊어갔다. 이런 상황속에서 ‘서울대대학생사람연대’가 주축이 된 ‘무한도전 실천단’의 김재의(사회복지 06) 씨는 “용산참사해결을 위해 학생 5000명의 서명 받는 활동을 하고 있다. 학생들의 참여가 절실하다”고 밝혔다. 학생들의 참여와 관련해 김 변호사는 “돈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에서 서울대 학생들의 계급의 확대, 재생산에 편승해선 안된다며 서울대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강서 신부 역시 20%의 사람들이 나머지 80%를 지배하는 차가운 사회에서 치열하게 가치를 위해 싸우는 학생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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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서 신부는 “사람들이 희망”이라고 말했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철거민들의 가녀린 외침을 외면해 온지가 벌써 1년 가까이 됐다. 그 동안 공권력은 기득권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자청해왔다. 집을 잃은 ‘난쟁이’들의 길고 긴 싸움 속에서도 현장의 사람들은 희망을 말한다. 이강서 신부는 “아무리 현실이 어둡다고 하더라도 사제로서 희망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다. 혹독한 현실을 껴안고, 현실에 부딪치는 사람들이 희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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