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0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를 검토하겠다고 표명했다. 이어서 새 정부 출범 직후인 3월 10일 기획재정부는 ‘7% 경제성장을 위한 규제완화 정책’의 하나로 영리의료법인을 허용하고 민영의료보험 활성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방안으로 공·사보험간 정보공유방안의 마련도 제시됐다. 당연지정제 폐지, 의료공공성 붕괴의 신호탄당연지정제는 병·의원들이 건강보험 환자를 정당한 사유 없이 거절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당연지정제는 공공의료기관의 비율이 4.7%(2006년 기준)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취약한 공공의료 인프라 속에서도 의료공공성을 뒷받침해 왔다. 건강보험은 전국민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공보험이기 때문에, 가입자의 소득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험료를 부과한다. 여기에 얼마간의 국고 보조를 더하는 방식으로 재정운영이 이뤄진다.
| ###IMG_0### |
| 정부여당의 의료상업화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이 ‘함께봐요 식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모습. |
당연지정제가 폐지된다는 것은 의료기관이 건강보험 환자를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건강보험 받는 병·의원’과 ‘건강보험 안 받는 병·의원’으로 분화되는 것이다. 그동안 건강보험의 보장성은 꾸준히 증가해, 현재는 통상적 진료의 경우에는 진료비의 50% 가량, 암 등의 일부 중증질환의 경우에는 진료비의 80% 정도까지를 건강보험이 지원한다. 그런데 이제 ‘건강보험 안 받는 병원’에서는 건강보험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당연지정제 폐지가 이뤄진다면 전문성과 경쟁력을 갖춘 대형병원들이 우선적으로 건강보험을 이탈할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은 “(의료기관들 사이에) 의료서비스의 질적 차이가 발생하고 이로 인한 사회적 위화감과 건강양극화가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건강보험 대체하는 민영의료보험 등장, 심화되는 건강불평등당연지정제가 폐지되면 새로운 ‘틈새시장’이 탄생한다. 이른바 ‘건강보험 안 받는 병원’을 가기 위한 보험 상품이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건강보험을 대체하는 ‘민영의료보험 도입’까지 현실화되면 충격파가 상당히 클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민간의료보험 시장은 건강보험에 대한 보충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암과 같은 큰 병에 걸렸을 때 건강보험이 지원하지 않는 본인부담금을 얼마간 내 주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의료보험 체계가 아예 건강보험과 민영보험 간의 경쟁체제로 재편되는 것이다.
| ###IMG_1### |
| 의료보험 이원화를 택한 칠레의 의료양극화를 보여주는 지표. |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칠레가 있다. 원래 한국의 건강보험제도와 유사한 공보험(FONASA) 체제를 택하고 있었던 칠레는 1981년 이후 공보험과 경쟁하는 민영보험(ISAPREs)을 도입했다. 그 결과 부유층과 저소득층의 보험 이용은 양극화됐다. 민영보험에 가입한 임금근로자의 비율은 56.5%에 달했지만, 은퇴근로자는 3.8%만이 민영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다. 하위 5%에 속하는 노년빈곤층의 가입율은 불과 1%다. 질병보유 여부에 따라 민영보험의 문턱도 상당히 높아졌다. 결과적으로 ‘돈 많고 건강한 사람’은 민영보험으로, ‘가난하고 아픈 사람’은 공보험으로 쏠렸다. 공보험의 재정상태는 더욱 열악해져갔고, 민간 보험사들은 배를 불렸다. 이에 따라 공보험의 보장성은 취약해졌다. 2005년 WHO는 칠레의 보건의료시스템이 전세계 191개국 가운데 168위라고 평가했다. 참고로 칠레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70위권이다. 칠레 보건부는 이를 받아들여 자국의 의료보험체계가 ‘심각하게 불평등하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공·사보험간 정보공유, 개인정보 악용의 위험 높아
| ###IMG_2### |
| 공·사보험간 정보공유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시민건강증진연구소 김창보 소장 |
공·사보험간 정보공유는 국민건강보험관리공단이 독점하고 있는 정보를 민간보험사에도 제공하겠다는 취지로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정보공유’라는 달콤한 말을 비틀어 보면, 사실상 개인의 건강정보가 민간 기업에 제공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보험사들은 ‘보험사기를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에게 개인 식별이 가능한 진료정보를 넘겨줄 것을 꾸준히 요구해 왔다. 건강세상네트워크 부설 시민건강증진연구소 김창보 소장은 “외국에는 이미 보험사기를 방지하기 위한 고도의 테크닉들이 보편화돼 있다”며 “보험사기를 줄이고 싶다면 노하우를 스스로 축적하면 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보험사들이 정보공유를 요구하는 진짜 이유는 마케팅에 활용할 속셈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간보험사들은 이윤 추구가 목적이기 때문에 보험료 지출을 줄이려 노력할 수밖에 없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건강한 사람들만 보험에 가입시키는 것이다. 이는 원유에서 맛있는 크림만 채집하는 것에 비유해 ‘단물 빨기(cream skimming)’라고도 불린다. 이를 법으로 금지하는 영국과 호주 등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이에 대한 제재규정이 없는 상태다. 공·사보험 간의 정보공유가 이루어질 경우, 개인의 건강정보는 보험사들이 ‘단물 빨기’를 하는 데에 악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영리의료법인 허용,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의료서비스앞선 세 조치들의 가장 큰 수혜자가 민간보험사들이라면, 영리의료법인 허용은 대형병원들이 직접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병·의원을 비롯한 모든 요양기관은 정부 또는 비영리법인이 운영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영리의료법인이 허용되면 이름 그대로 ‘영리’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주식회사 삼성병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영리의료법인 허용을 주장하는 쪽은 주로 대형병원들이다. 이들은 외부투자자들의 자금을 유치해 대형병원들에게 절실한 시설장비의 확충을 꾀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진석(충북대 의과대학) 교수는 대당 200억 정도 하는 암 검진 장비인 PET가 우리나라에 45대가 도입돼 있는 반면, 1인당 국민소득이 훨씬 높은 유럽 국가들은 국가 당 2~4대 수준에 불과한 예를 들어 “오히려 고가의료장비의 과잉이 문제”라고 비판한다. 영리의료법인 도입이 꾀하는 정책목표 자체가 잘못 설정돼 있으며, 이는 환자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준다는 것이다. 이미 정부는 대형병원들의 시설투자비용을 보전한다는 명목으로 진료비에 ‘종별가산율’을 적용해 왔다. 이를 근거로 대형병원들은 소규모 병의원보다 10~20% 가량 높은 진료비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는 병원 운영 과정에서 발생한 이익금을 전액 시설과 장비, 인력에 재투자해야 했지만 영리법인으로 전환하면 투자자들이 이익금을 나눠 가질 수도 있고 다른 기업에 투자하는 것도 가능하다. 건강권 보장과 의료 공공성 강화를 위한 희망연대는 “신규로 영리법인이 설립된다하더라도 이들 병원들은 대부분 수익창출이 기대되는 대도시와 급성기 병상에 집중될 것”이라며 “이는 과잉진료와 중소규모 병의원의 도산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고 우려했다. 이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국민은 의료공공성 지키자는데…
| ###IMG_3### |
| 영화 ‘식코’는 손가락 봉합수술을 하는데 6천만원이 드는 미국의 의료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의료상업화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식코’는 한국에도 큰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
정부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일련의 의료민영화 정책들은 기획재정부가 주도하고 있다. 대부분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공약으로 발표했던 것들이다. 정책의 목표도 ‘7% 경제성장’이다. 상업화된 미국의 의료현실을 다룬 영화 ‘식코(Sicko)’가 개봉되면서 새 정부의 의료정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지자, 한나라당은 총선 공약에서 대부분의 세부정책을 삭제한 바 있다. 하지만 과반수 여당을 등에 업은 MB정부는 당연지정제 폐지에서부터 영리의료법인 도입에 이르기까지의 제반 정책들을 언제든지 밀어붙일 태세다.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이 2004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0.9%가 ‘국가가 책임지고 평등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 ‘개인이 책임지고 능력에 따라 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답한 비율은 16.6%에 불과했다. 정부여당은 국민들 대다수가 반대하는 의료상업화 정책을 별다른 의견수렴 절차도 없이 밀실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 김창보 소장은 “경제부처가 내수경기 회복 차원에서 의료상업화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은 앞뒤가 한참 뒤바뀐 것”이라며 새 정부의 의료정책을 비판했다. 김 소장은 “이전 정부에서도 관련된 움직임들이 있었지만 반대의견에 좌초됐다. 하지만 MB정부에서는 더욱 강력한 드라이브가 걸릴 가능성이 있어서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새 정부가 경제를 살린답시고 의료양극화를 부채질하는 사이, ‘국민성공시대’는 간데없고 ‘성공한 국민들의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