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히로시마를 생각하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히로시마 상공을 비행하던 에놀라게이 호는 ‘리틀보이’라는 애칭이 붙은 폭탄을 투하한다.이름답지 않게 너무도 위력적이었던 이 폭탄은 순식간에 히로시마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몇 초 만에 14만 명이 죽었고 35만 명의 사람들은 방사선에 노출되어 서서히 죽어갔다.피폭자들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상처의 피가 멈추지 않는 이상한 질병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을 비행하던 에놀라게이 호는 ‘리틀보이’라는 애칭이 붙은 폭탄을 투하한다. 이름답지 않게 너무도 위력적이었던 이 폭탄은 순식간에 히로시마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몇 초 만에 14만 명이 죽었고 35만 명의 사람들은 방사선에 노출되어 서서히 죽어갔다. 피폭자들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상처의 피가 멈추지 않는 이상한 질병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누구도 이 치명적인 질병의 이름을 알지 못한 채 단지 죽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첨단 과학이 피워낸 이 야만적 불꽃은 사흘 뒤 나가사키에 다시 타올랐고 7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망상에 사로잡혀 화를 자초했다고 비난했지만 이미 전쟁 능력을 상실한 일본에 굳이 원폭을 사용했어야 했는가는 의문이다. 그러나 원폭 투하가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의지를 확실하게 꺾은 것은 사실이며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후 미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라는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사흘 만에 2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낳은 재앙을 바라본 한 작곡가는 슬픈 노래로 히로시마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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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폭탄 투하 직후의 버섯구름. 단 몇 초만에 14만명이 숨졌다.

폴란드의 작곡가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 1933~ )는 1959년, 현악기의 기괴한 소음으로 이루어진 곡을 발표한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Threnody to the victims of Hiroshima)”라는 제목의 이 곡은 선율, 화성, 리듬, 박자와 같은 전통적인 음악적 요소들에 의존하지 않은 실험적 작품이었다. 곡엔 ‘애가’와 어울릴만한 슬픈 가락이나 화성진행이 없다. 대신 현악기의 미분음과 특수주법, 예컨대 음고가 정확하지 않은 최고음을 사용한다든지 혹은 줄받침과 줄걸이 판 사이의 현을 연주한다든지 아니면 활의 끝부분이나 손으로 몸통부분을 두드리는 등의 주법을 이용해 음의 덩어리(Cluster)를 만들어 낸다. 이 작품으로 펜데레츠키는 현대음악을 이끄는 아방가르드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는 요즘도 종종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의 참상을 표현하며, 사회적·정치적 혼란 속에서 빚어진 전쟁의 엄청난 피해를 고발하는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작곡가 자신은 “이 곡은 절대음악이기 때문에 여전히 음악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했다. 자신의 작품에 정치색을 덧칠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온 펜데레츠키지만 ‘히로시마’가 갖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희생자를 위한 애가’라는 제목은 음악의 성격을 규정하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가 부정한다 해도 이 곡이 감상자에게 던져주는 청각적 심상은 분명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이글거리는 화염이다. 그러나 시종일관 쏟아져 나오는 기이한 음향의 자극들이 모두 히로시마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기 바란다. 필자가 느끼기엔 음악은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작곡가가 말할 뿐이며 또한 청중이 상상할 뿐이다. 그의 창작 여정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지만 초기의 실험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소리를 결합시키려는 음층音層음악의 시도는 이후 전통으로의 회귀가 엿보이는 형식주의를 거쳐 보다 드라마틱하면서도 서정적인 스타일의 신낭만주의까지 이어진다. 50-60년대 실험적 아방가르드 음악이 다음 세대에 트라우마(Trauma)가 되었다고 말하는 그는 동시대 작곡가들에게 영감(inspiration)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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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악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롤 펜데레츠키는 서울대에서 철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편 펜데레츠키는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는 지난해 9월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해 연주·강연 활동을 하고 백건우, 장한나, 김지연씨 등 한국의 재능 있는 음악가를 발굴·육성하는 등 우리나라 음악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대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엔 우리민요 ‘새야새야’의 선율을 주제로 사용한 교향곡 5번 ‘한국(Korea)’을 발표하기도 했다. 정부에서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위촉한 작품이었다. 히로시마의 참상을 담아낸 음악으로 서구음악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이 작곡가는 한국과의 인연을 돈독히 하는 교향곡 5번(이 번호도 매우 상징적인데 베토벤의 5번 교향곡엔 ‘운명’이란 제목이 붙어있다)을 작곡하고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그의 작품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와 교향곡 ‘한국’을 나란히 놓고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일본의 패전, 곧 한국의 독립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괴물이었다면 그가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라는 곡이었다. 비록 굴곡의 현대사 속에 거듭된 비극을 겪었지만 광복 50주년을 맞이하기까지 빛나는 발전을 경험한 한국은 히로시마의 진한 소음을 넘어 영감이 넘치는 ‘소통 가능한’ 음악으로 돌아온 펜데레츠키로부터 교향곡 ‘한국’을 선물 받는다. 인류 최악의 악몽으로 불리는 히로시마의 고통은 그렇게도 갈망하던 우리의 독립과 교차하며, 실험음악의 최전선에 있던 음층음악은 같은 작곡가의 완전히 다른 어법인 신낭만주의와 교차한다. 간디는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삼지 말라고 했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의 기초가 되는 경우가 많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면서 자기들의 원수, 즉 홍해에서 빠져 죽은 이집트인들의 비극을 두고 기뻐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은 곧잘 우리의 광복절과 비교된다. 홍해를 가른 야훼의 손이 히브리 민족의 출애굽을 도왔듯이 히로시마를 불태운 ‘리틀보이’가 우리의 독립을 돕지는 않았을까? ‘덕분에’라는 표현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기쁨에 넘친 광복의 함성엔 어느 정도 버섯구름의 그을음이 묻어있다. 그러나 광복절에 히로시마를 생각하는 것은 마치 즐거운 크리스마스에 헤롯에 의해 죽은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분위기를 깨는 일임이 분명하다.지난 15일 우리는 61번째 광복절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를 치렀다. 하지만 히로시마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혼란은 아이러니다. 아이러니는 주체와 세계 사이의 묘한 괴리감에서 파생된다. 전쟁과 해방을 두부 썰듯 가르는 것이 가능하겠냐마는 1945년 8월의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다. 그것은 방향성을 잃은 과학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고 20세기 인류의 문명에 대한 중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히로시마의 비극 이후 서구 사회의 핵에 대한 의식은 변화하기 시작하여 10년이 지난 1955년, 68개국이 모인 세계평화 회의는 헬싱키 선언을 통해 원폭 전쟁 반대를 명확히 했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을 세계 평화 기념일로 정했다. 이렇게 해서 히로시마는 양심을 갖고자 하는 과학자들에게, 그리고 전쟁과 파괴를 거부하는 평화주의자들에게 성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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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15일 일본 도쿄에 위치한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엔 유대인의 가르침에 따라 기쁨을 억제하기에도 힘든 상황이 연출되었다. 반복되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주장은 히로시마의 평화공원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한국인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준다. 이 두 번째 아이러니는 역사의 가해자가 순식간에 피해자로 둔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며 독도 영유권 분쟁이나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의해 증폭된다. 히로시마 원폭 기념관에 최근에야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비가 외곽에서 중심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나 전시장에 적힌 문구(이 굴욕을 어찌하리)를 생각하면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이다. 한편 인터넷에서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 아래 ‘속이 다 후련하다’라는 댓글이 달린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민족적 감정이란 것이 철저히 타자화한 적국의 도발 앞에서는 역사적 연민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것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생명에 대한 일반적 경외감을 완전히 무시한 그 몰상식은 딱 일제가 이 땅에서 자행한 억압만큼 역겹다. 하지만 그 몰상식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몰려온다. 그러나 기억하자. 히로시마의 비극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히로시마에겐 할 말이 많이 남아있고, 우리 역시 히로시마에게 할 말이 많다. 펜데레츠키도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지난 2003년 10월 서울대에서 있었던 특별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적 작업은 하나의 대화입니다.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는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를 썼지만 교향곡 ‘한국’도 썼다. 우리가 광복절에 느끼는 감동은 히로시마가 상징하는 핵무기의 파괴력 앞에 세계인들이 느끼는 공포와 분리되기 어렵다. 유난히도 한국에 애착을 가진 그 작곡가는 어쩌면 이 모든 아이러니를 함께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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