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찾아온 시험기간

중도 3열의 무겁고도 텁텁한 공기에 안압이 높아져 가고 있다.학기 내내 시험들이 골고루 분포해 있지만 지금이 표준정규분포에서 z=0인 지점.관악에서 좀 조용하다 싶은 곳들은 평소보다 아침에 신경을 덜 쓴 듯 머리상태가 온전하지 못하고 안경을 쓴 채로 공부를 하는 학생들로 가득하다.

중도 3열의 무겁고도 텁텁한 공기에 안압이 높아져 가고 있다. 학기 내내 시험들이 골고루 분포해 있지만 지금이 표준정규분포에서 z=0인 지점. 관악에서 좀 조용하다 싶은 곳들은 평소보다 아침에 신경을 덜 쓴 듯 머리상태가 온전하지 못하고 안경을 쓴 채로 공부를 하는 학생들로 가득하다. 날씨는 다소 쌀쌀하지만 도서관 안에는 빈 의자가 없고, 그 의자를 꽉 채운 우리의 2만 학우들이 있고, 그들이 눈에서 발산하는 레이저와 온 몸으로 내뿜는 적외선이 있어 가을이라는 계절이 무색할 정도다. photo1 여기 이곳에 미리 공부를 안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내일 1교시 시험을 준비하는 라이토(Deathnote)가 조용히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 젠장.” 추석 연휴 내내 수사하랴, 데쓰노트 관리 하랴, 말 많은 미사미사 단속하랴 바빴다. 내 머리가 좀 빠르게 회전하기는 하지만 이 많은 분량을 어찌 하루 저녁에 본단 말이냐. 그냥 드랍할까? 아직 기간은 안 지났지만 수강신청 취소는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교실 문 앞에 걸린 성적표의 학번 중 1위는 항상 나, 라이토의 것이어야 한다. 순간기억능력소유자라도 된다면 좋으련만. 사고력을 발휘해서 공부 안 하고도 문제를 풀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도권 교육을 착실히 받고 자란 터라 그런 것은 쉽지 않다. L 그 녀석, 수사 중간 중간에 책 보는 것 같던데. 지는 것을 못 참는 라이토는 가슴이 답답해진다. 10개가 넘는 챕터와 잔뜩 들어있는 연습문제, 또 왜 솔루션은 이 비싼 책에 안 붙어 있는 것인지. 천하의 라이토도 200쪽 분량의 전공 원서 앞에서는 63빌딩 앞의 자그마한 토끼처럼 작아질 따름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그, 약간의 짜증과 흥분과 불안을 가라앉히고 내일 아침까지 하는데까지 해 보자는 자기 다짐의 일환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잠시 동공에 힘을 줬다가 풀고 나서 다시 펜을 쥔다. 한편, 집에 앉아 교양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프랭크(Catch me if you can)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다. 프랭크로 말할 것 같으면 17살 때 수표거액환코드번호기를 사용하여 개인수표를 위조해 130만 달러(=13억 원)를 뿌리고 다닌 거물 사기꾼 전력의 소유자다. FBI를 흥분하게 할 정도의 실력으로 이깟 치팅페이퍼 하나 못 만들까. 객관식 OMR카드라면 우선 낸 다음에 답을 알아내고 슬쩍 바꿔치기를 할 수 있을 터인데 서술형 문제라 그럴 수도 없고 엑기스만 뽑아서 예술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타고난 언변술로 사법시험도 치르지 않은 채 변호사 행세까지 했던 경험이 있으니, 이번 시험은 이 두 가지, 페이퍼와 언변술이면 문제없겠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청춘을 도서관에서 썩히지 않겠다”는 다소 독특한 독야청청의 신념으로 어서 페이퍼를 만들고 또 다시 녹두의 밤을 누리러 갈 태세다. 그리고 “나 공부 하나도 안 했어. 너 많이 했어??” 라고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야지. 상대평가니까. 학교 화장실 문에는 “부끄러운 A학점보다 정직한 B학점이 낫습니다”라고 적혀있지만 우매한 일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photo2 프랭크는 금발에 파란 눈이 흔치 않은 관악에서 거의 유일하게 알고 지내는 사람 윌 헌팅(Good Will Hunting)에게 전화를 건다. 필즈상을 수상한 그의 지도교수조차도 못 푼 퍼서벌 증명을 쓱쓱 해냈다고 거만을 떨어서 얄밉기는 하지만 반항적이고 냉소적이고 향락지향적인 이 친구, 시험이야 굳이 공부를 안 해도 만점일 터이고 오늘 나와 재밌게 놀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야 녹두로 나와.”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의외의 대답. “나 내일 서술형 시험 있어. 서술형은 당췌 어떤 기준으로 학점을 주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이제 너도 공부할 때 좀 되지 않았냐.” 두둥. 졸업을 앞둔 그는 변했다. 아무리 서술형 시험이 학점기준이 애매하다고 해도, 아무리 B-는 재수강을 할 수 없다고 해도, 아무리 S대라고 다 취직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너 같은 천재마저도 학점의 노예가 되는 거냐. 프랭크는 갑자기 외로워진다. photo3 사실 평소엔 “공부 따윈 필요 없어, 학점 따윈 필요 없어!”를 외치며 깐죽댔지만, 그도 이 사회에 들어온 이상 은근히 학점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던 게다. 남들 다 열심히 공부하는데 혼자 해 놓은 것이 없어 불안하지만 막상 공부는 되지 않는 그 안타깝고도 처참한 기분을 아는가? ‘나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 하는 회의감이 빛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 졸업하면 미국 돌아가서 FBI에서 위조수표나 잡아내고 살아야지. 공무원이 최고야’ 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하루 종일 가동하다가 아까 아주 잠깐 껐던 컴퓨터를 부팅시킨다. 스누라이프에는 “혹시 저같이 공부 안 되는 분 없나요 ㅠㅠㅠㅠ” 등의 보는 사람 마음까지 안타깝게 하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며 프랭크는 다소 구차한 동질감과 안정감을 찾는다. 리플이나 하나 달아줘야지. 힘내세요. 한편, 라이토는 열람실에서 나와 담배를 문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니 좀 살 것 같다. 렘 녀석, 어찌나 코를 고는지. 다른 사람에게는 사신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원래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정이 없는 성격이지만, 도서관에서 혼자 밤을 샌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울 줄은 몰랐다. 말 한마디 안 하고 몇 시간을 계속 있으니 입에 거미줄이 쳐지는 기분이랄까. 시간이 지날수록 멍해지는 학생들의 눈빛을 보는 것도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도서관 밖에는 야식을 먹는 아이들이 꽤 있다. 어떻게 이 새벽에 튀긴 닭을 먹을 수가 있지. 대단한 식욕이다. 옆에 있던 학생들 둘은 공부 좀 하다가 나가서 두 시간 째 안 들어온다 싶더니만 밖에 있다. “라이토는 이번 시험도 잘 보겠죠? 공부는 많이 했나요?” 의자위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른손 검지를 입에 갖다 댄 채 얘기하던 그 녀석의 모습이 떠오른다. 갑자기 경각심과 승부욕이 치솟은 라이토, 담배를 서둘러 짓이겨 끄고 다시 침잠하는 공기로 가득 찬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꺼지지 않는 중도의 불과 함께 날이 서서히 밝아온다. 지치고 피곤한 기색의 학생들은 밖으로 나오고, 아침 일찍 등교한 학생들은 그 안으로 들어간다. 끊이지 않는 심장의 혈류처럼, 나와 너와 우리들이 드나드는 관악의 중심부는 펌프질을 멈추지 않는다. 모두들 어떤 이유에서인가 공부를 하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인가 달려가고 있다. 혹시 그 이유와 그 방향을 모른다 하여도, 저 떠오르는 해가 조금이나마 그것을 알려주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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