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5 지난 9월 초 유엔(UN)은 동티모르에 1개 중대 규모(120여 명)의 한국 경찰 파견을 요청했다. 경찰청과 정부당국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동티모르는 몇 년 전에 우리나라가 치안·질서유지를 위해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병한 곳이기도 하며, 지난 2003년 대구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육상선수가 여자부 400m 예선에 출전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동티모르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독립한 후에도 지금까지 내전과 인권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식민지의 상처와 내분의 아픔 티모르 섬은 말레이 반도로부터 남방으로 걸쳐 이주해온 테툼(Tetum)족이 원주민을 내쫓고 대대손손 이어져 오고 있다. 테툼 족은 현재 티모르 섬(특히 동티모르 지역)에 살고 있는 가장 많은 수의 종족이다. 따라서 동티모르의 언어 또한 테툼어(語)이다. 티모르 섬은 말레이 반도로부터 남방으로 걸쳐 이주해온 테툼(Tetum)족이 원주민을 내쫓고 대대손손 이어져 오고 있다. 테툼 족은 현재 티모르 섬(특히 동티모르 지역)의 다수 종족이다. 동티모르의 언어도 테툼어(語)이다. 16세기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티모르 섬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제패한 이후, 인도양과 태평양의 연결지점을 통제하기 위해 티모르 전체를 식민지로 편입시켰다(1524). 이후 300년간 포르투갈은 티모르 섬에 대해 방임으로 일관하다가 1849년 네덜란드에 티모르 섬의 서쪽을 할양했다. 서티모르는 1949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에서 독립한지 4년만에 인도네시아에 공식 합병됐지만 동티모르는 1974년까지 포르투갈이 관할권을 가지는 식민지로 남아있었다.photo1 1960년대 초반 포르투갈은 세계적인 탈식민화 추세에 따라 동티모르를 해방시키려고 했으나 국내외 사정 때문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1974년 포르투갈의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지자 동티모르에서는 FRETLIN(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과 UDT(티모르민주동맹)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FRETLIN은 농촌개발과 토지개혁, 대중교육과 조속한 독립을 내세워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반면, 보수적인 엘리트 · 토지소유자 · 전통적 지배계급으로 구성된 UDT는 기득권의 상실을 염려해 포르투갈과 연합을 주장했다. 또한 지지는 받지 못했지만 인도네시아와의 병합을 주장하는 APODETI(동티모르인인민민주협회), 노동운동적인 TRABALHISTA, 티모르 정체성 회복을 주장하면서 APODETI를 지지하고 FRETLIN을 반대한 KOTA(테툼 어로 ‘산의 용사들의 후예’) 등도 있었다. photo2강대국 정치에 희생된 독립의 꿈티모르섬 북쪽의 웨타르 해협은 태평양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여서 미국의 핵잠수함 이동에 중요한 군사적 가치가 있는 지역이었다. 한편 호주는 티모르 남쪽 대륙붕에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에 미국과 호주는 이 지역에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이 스며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민족주의적이고 독립을 주장하는 FRETLIN은 공산주의 세력으로 보였다. 한편 1965년 미국의 지원으로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은 ‘강압에 의한 동티모르 통합’을 추진했다. 수하르토 역시 동티모르에서 좌파계열인 FRETLIN 정부가 등장하는 것을 우려했다. 결국 인도네시아는 1975년 12월 7일, 미국산 무기로 무장한 3만 여명의 육해공군을 앞세워 동티모르 침략을 강행했다. 이때,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일본, 캐나다 등이 인도네시아에 무기를 수출해 이익을 얻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진상을 은폐하는데 협조해 왔다.전쟁으로 동티모르의 당시 인구 68만명 중 10만 명이 희생됐다. 외부에서 고립된 FRETLIN 세력만으로는 막강한 인도네시아군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었다. 1976년 7월 17일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됐다. 하지만 동티모르 주민들의 독립 투쟁과 저항 의지는 4반세기 동안 지속되어 왔다. 독립을 위한 희생제물인가 – 민병대의 학살1998년에 들어서면서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운동이 힘을 키워나감에 따라 수하르토 정권은 위기에 봉착하고, 동티모르에서도 독립열기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수하르토 정권이 붕괴되고 새 인도네시아 대통령 하비비는 1999년 8월에 동티모르 주민들이 ‘인도네시아 내 자치’와 ‘완전 분리 독립’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한 발 물러섰다. 1999년 8월 30일 유엔 감시하의 투표 결과 78%의 동티모르인들이 독립을 선택했다.이 투표 이후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에 의한 무자비한 살상과 방화가 극에 달했다. 이를 피해서 25만명 이상의 난민이 인근 인도네시아의 서티모르, 서 파퓨아, 슬라웨시, 플로레스, 보르네오, 발리, 호주의 다윈 섬 등지로 피신하게 됐다. 이들 난민 중 약 23만 4천여 명은 2005년 12월까지 동티모르로 귀환했으나 나머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 미귀환 난민들은 대부분 전 민병대, 군인, 경찰, 공무원으로 독립 반대파가 대부분이다. 또한 서티모르에 거주하는 수백 명의 난민들은 동티모르에 남겨둔 2천 6백만 달러 상당의 재산에 대해 인도네시아 정부에 보상을 요구한 상태다. 2005년 12월 구스마웅 초대 대통령이 서티모르 난민지역을 찾아가 귀환을 독려하기도 했으나, 동티모르 대다수 국민들이 화해의 자세로 그들을 받아들이기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photo6 국제적 압력이 고조되자 1999년 9월 인도네시아 군이 철수하고, 호주를 비롯한 다국적군이 대거 동티모르에 진입, 민병대를 축출하면서 치안을 확보했다. 동티모르 유엔과도정부가 설치되어 공공행정업무와 인도적 지원을 담당하면서, 유엔평화유지군(PKF)이 한국을 포함한 다국적군을 대체해 동티모르 치안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그 후에도 동티모르는 난민복귀 문제와 민병대의 빈번한 출몰로 진통을 겪었다. 그 속에서도 2001년 후반에 헌법 제정 의회를 위한 선거가 실시됐고 이듬해 2월에 헌법이 제정됐다. 2002년 5월 20일, 동티모르는 좌파계열 정당 FRETLIN(현재 동티모르 집권 여당)을 창설한 국내 독립 운동가 출신인 구스마웅 첫 대통령의 맹세와 함께 완전히 독립했다. 총리엔 해외 독립 운동가 출신인 알카티리가 임명됐다. 그해 9월 27일 동티모르는 유엔에 가입했다. 불안한 신생국, 내전은 수습됐지만 갈 길은 멀다photo4 동티모르 동부지역 주민은 독립군에 협조적이었던 반면 서부지역은 인도네시아에 호의적이었다. 독립 후 창설된 군대 내에서는 이러한 지역 출신에 따른 차별이 있었다. 올해 1월, 방위군내 동·서부지역 출신에 대한 차별대우 철폐 및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군인들의 청원과 시위가 있었다. 이에 대해 알카티리 총리는 3월부로 전체 군인의 40%인 594명을 강제 퇴역시켰다. 이에 불만을 품은 퇴역군과 정부군 사이의 폭력사태가 촉발됐다. 5월 20일에서 25일간 양측간 교전 및 비무장 경찰에 대한 무차별 사격으로 21명이 죽고 2만 여명의 난민이 발생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알카티리 총리는 반란진압을 위해 5월 25일 외국 군대의 지원을 요청, 호주를 비롯 포르투갈, 뉴질랜드, 말레이시아에서 약 2000명의 군 병력 및 경찰력이 파병됐다. 구스마웅 대통령은 이 결정에 반대해 알카티리 총리에게 사임을 권유했다. 대통령과 총리는 국내파와 해외파로 독립운동계열이 다르고, 총리가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을 제한하고 여당 내 실권을 장악하는 등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대통령이 강경하게 나온 것이다. 여기다 집권 FRETLIN당원들 또한 총리가 로바토 내무장관의 민간인 무기 공급을 은폐했다며 고소해 사실상 총리퇴진을 요구했다. 닷새 후 총리가 자진사퇴함으로써 이번 사태는 일단락됐다. 한편 과거 유엔사무소가 단기간(2~4년)만에 철수해 국가 건설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이라는 비판 여론이 거세어졌다. 유엔은 이번 사태의 정상화 및 2007년 대통령·국회의원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될 수 있도록 향후 최소 1~2년 이상 유엔의 활동을 지속할 것을 결의했으며, 한국을 비롯한 회원국의 경찰력 파견을 요청했다. 동티모르, 동병상련의 나라한국과 동티모르는 식민지의 아픔과 절망을 공유하고 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것도 두 나라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통분모이다. 그만큼 독립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안위를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도 했으며, 이 와중에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주변 국가들의 개입과 간섭이 심하다는 것도 유사한 점이다. 그리고 동티모르의 해방 이후 다양한 단체의 출현과 갈등은 마치 한국의 해방 직후 좌우 대립구도와도 비슷하다.우리가 동티모르에 대해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지는 것은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우리’라는 생각에서 일 것이다. 동티모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며 그들이 국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지속적인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까. ※ 참고자료『은자의 나라 동티모르』, 한국생산성본부, 2001.동티모르 정세, 주동티모르한국대사관 홈페이지(http://www.mofat.go.kr/ek/ek_a001/ek_tptp/ek_a02/ek_b07/1205372_8983.html)영문판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East_Tim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