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탄압으로 점철된 동티모르의 현대사

동티모르의 역사는 곧 인권탄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동티모르는 포르투갈에 의한 식민 통치를 벗어나기 무섭게 인도네시아에 의해 무력 침공을 당했다.이는 동티모르인들의 목숨과 생활터전을 잃게 하였다.그리고 무력 침공 후 시작된 약 20년간의 인도네시아 식민 통치는 대량학살과 경제적 수탈을 가져왔고 이는 동티모르인들의 인권상황을 더욱 열악하게 하였다.

동티모르의 역사는 곧 인권탄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에 의한 식민 통치를 벗어나기 무섭게 인도네시아에 의해 무력 침공을 당했다. 이는 동티모르인들의 목숨과 생활터전을 잃게 하였다. 그리고 무력 침공 후 시작된 약 20년간의 인도네시아 식민 통치는 대량학살과 경제적 수탈을 가져왔고 이는 동티모르인들의 인권상황을 더욱 열악하게 하였다. 1999년 주민투표를 통해 마침내 동티모르는 독립을 획득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군의 조종을 받는 민병대들에 의한 인권탄압이 발생한다. 1975년 무력 침공에서부터 시작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인권탄압 photo1 생명권은 인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권리이다. 인도네시아에 의한 동티모르 인권탄압은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하면서 그들의 생명권을 박탈한 것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동티모르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지 2주일도 지나지 않은 12월 7일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무력으로 침공했다. 당시 동티모르의 라디오 딜리방송은 전 세계를 향해 이렇게 호소했다. “군인들이 무차별로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다. 여자와 어린이들이 거리에서 총을 맞고 있다. 우리는 모두 살해되고 말 것이다… 국제사회의 도움이 필요하다. 제발 우리를 도와달라….” 동티모르인들의 시신은 바다에 버려졌고 희생자들의 시신이 버려진 수도 딜리(Dili) 동쪽의 아레이아 브랑카 비치(Areia Branca Beach)는 나중에 ‘피의 바다’로 불렸다. 침공 후 인도네시아 정부가 임명한 동티모르 부지사는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무력침공 2개월 동안 동티모르인 6만 명이 살해됐다고 발표했다. 이는 당시 동티모르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숫자였다. 인도네시아의 무력 침공 후 동티모르의 도시들은 대체로 인도네시아 군이 제압했지만 국토의 대부분은 FRETILIN의 지배 하에 있었다. 이에 인도네시아는 1977~l979년에 걸쳐 ‘포위섬멸작전’을 시행한다. ‘포위섬멸작전’의 일환으로 동티모르 전 국토에 대한 인도네시아 군의 전면폭격이 시작됐다. 그 후 1977년 후반부터 1979년 초기에 걸쳐서 행해진 제 2차 폭격에서는 근대적인 전투기가 동원됐다. 이 단계에서는 소이탄 폭격이 시작됐다. 제 1차 폭격 시기에 주민들은 어떻게든 연명해 왔지만 소이탄 폭격이 전면적으로 전개된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혹은 기아에 시달렸다. 침공 후 5년 동안 산악지대에서 FRETILIN과 함께 있었던 포르투갈인 신부 레오니트 비에이라 드 레고는 인도네시아의 무력 침공 후 4년 동안에 동티모르인 약 20만 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이 수치는 인구비율로 볼 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참혹한 집단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 산타크루즈 묘지 대학살 사건 그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군에 의한 동티모르인 학살은 계속 되었다. 1983년 8월 인도네시아 군대는 비께께(Viqueque)시의 크라라스(Kraras)마을에서 2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군은 이를 부인하면서 약 1000명을 체포하여 30여명을 즉결처분하고 나머지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인도네시아 군에 의한 학살은 인도네시아 정부의 부인과 국제적 무관심 속에서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동티모르인에 대한 학살이 전 세계적 이목을 끌게 된 계기는 1991년 11월 12일 수도 딜리에서 벌어진 산타크루즈 묘지 대학살 사건이다. 1991년 여름에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 사이에 포르투갈 의원단의 동티모르 방문 교섭이 타결됐다. 그래서 늦어도 11월 4일에는 포르투갈 의원단의 방문이 실현되게 됐다. 이에 전 세계의 동티모르 연대그룹들은 포르투갈 의원단 방문과 때를 같이하여 동티모르 상황을 감시하는 운동을 전개했으며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속속 동티모르에 잠입했다. 이에 동티모르 내에서는 긴장이 고조됐다. 젊은이들은 대대적인 호소투쟁을 계획했고, 인도네시아 당국은 독립파 활동가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곳곳에서 친인도네시아계열에 의한 테러가 계속됐으며 독립운동 활동가들이 피신처로 자주 이용했던 딜리시의 모타엘교회는 l0월 하순부터 매일 저녁 오토바이를 탄 괴한들에 둘러싸여 괴롭힘을 받았다. 그런 속에서 10월 26일 갑자기 포르투갈은 의원단 방문 중지를 발표했다. 이유는 의원단과 동행키로 되어 있었던 호주 기자의 입국을 인도네시아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photo2 포르투갈 의원단의 방문 중지가 발표된 바로 다음날 인도네시아 군은 모타엘교회를 밤새 습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독립파 청년 세바스찬 고메스를 살해했다. 고메스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주민이 모여들었다. 11월 12일 사람들은 고메스가 안장된 산타크루즈 묘지를 향하는 동안에 독립 요구 시위를 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당일 약 3천 5백 명의 군중이 “동티모르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묘지에 도착한 지 l5분 후, 군대가 나타나 좁은 묘역에 갇힌 군중을 향해 2분 간 기관총 사격을 계속했다. 발포는 경고 없이 시작됐으며 여러 번 되풀이됐다. 병사들은 도망가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쐈다. 아이들도 상당수 죽었다. 집중사격으로 l~2백 명 정도가 현장에서 죽었다고 전해지며 이후 대대적 검거로 구속된 수백 명 중 일부는 고문으로 죽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는 국제여론에 밀려 학살과 관련된 하급병사 10명에게 8개월~l년 6개월형을 선고했으나 시위 주모자들에 대해서는 종신형, l5년형 등의 엄벌에 처했다. 인도네시아의 식민 통치 시기에 만신창이가 된 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식민통치는 이러한 대량학살을 통한 생명권의 박탈뿐만 아니라 각종 수탈을 통한 사회, 경제, 문화적 권리의 박탈로도 나타났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개발’에도 불구하고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주민의 대다수가 절대빈곤 속에 살고 있었다. 이는 1975년 침공 이후 계속된 전쟁으로 쌀을 비롯한 곡물과 커피 등 농작물의 생산이 급격히 감소하고 가축들이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실업 또한 심각했다. 1987년에 동티모르의 대학졸업자를 포함한 구직 희망자 4756명 가운데 3.4%인 166명만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이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약 15만명을 동티모르로 이주시키면서 공직과 상업을 이주민들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자원과 토지의 독점 또한 심각했다. 군부와 연계된 PT Batara Indra Group 산하의 기업들은 동티모르의 주요 생산물인 커피, 백향목, 대리석, 설탕산업을 독점했으며 포르투갈 당국이 소유했던 토지를 모두 차지했었다. 살해되거나 강제이주당한 주민들의 땅을 군 당국과 이민자들이 차지하는 등 외지인의 토지소유도 급격히 늘어났었다. 이처럼 이주민들과 인도네시아 기업 그리고 군부는 동티모르의 토지와 자원 그리고 취업기회를 우선적으로 차지하면서 동티모르를 수탈했다. 이렇게 열악한 경제상황과 더불어 동티모르의 교육상황 또한 형편없었다. 동티모르인들의 문맹률은 50% 이상을 기록했었다. 또한 5세 미만 사망률은 세계최고수준인 1000명당 80명이고 안전한 식수보급률은 세계최저수준인 52%였는데 이는 동티모르의 보건의료상황 역시 얼마나 열악한 것이었나를 보여준다. 주택사정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이 제대로 살 만한 곳은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동티모르의 환경 또한 인도네시아의 식민 통치 시기에 많이 파괴됐다. 인도네시아 군은 지난 20년 동안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으며 산림에 불을 지르고 제초제를 광범위하게 뿌려서 많은 지역이 황폐해졌다. 또한 인도네시아 군은 동티모르 주민들을 강제로 집단 이주시켜 주민들이 떠난 지역과 새로 이주한 지역 모두에 심각한 환경문제를 일으켰다. 기업들의 무분별한 자원개발 또한 많은 환경 파괴를 가져왔다. 독립 과정에서까지 자행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인권탄압 photo3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 정권이 붕괴되고 1999년 동티모르인들은 마침내 인도네시아 내에서의 자치와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투표가 최소한 자유롭게만 진행된다면 친독립세력이 이기는 것은 당연시됐다. 그러나 독립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천명된 이후 인도네시아에 의한 폭력은 더욱 빈번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군의 수는 증강됐고 인도네시아 정부는 친인도네시아계 민병대를 조직하여 공포감을 조성했다. 동티모르인들은 “경찰, 군대, 정보기관, 민병대는 서로 다른 제복을 입고 있을 뿐 모두 똑같다”고 말했다. 동티모르에서 민병대와 인도네시아군의 목표는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해 독립에 반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거의 빈틈없이 수행됐다. 1999년 4월 이래 인도네시아가 조종하는 민병대원들은 여러 잔혹한 행위들을 자행했다. 교회로 피신한 수백 명을 살해했으며 마을을 불태우고 수만 명의 사람들을 밀집 캠프나 산악 지대로 끌고 갔다. 보고에 따르면 거기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실상의 노예 상태에서 커피 농장 수확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들은 민병대의 인질이며 만약 그들이 독립에 찬성하는 투표를 할 경우 죽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이처럼 민병대들은 고문과 살인, 협박 등으로 동티모르인들에게 통합을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민병대들에 의해 수만 명이 겁에 질린 채 집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이에 약 4만 명의 주민들이 인도네시아 군대의 통제 하에 있는 서티모르의 ‘난민 캠프’에 머물러야 했다. 지금의 동티모르, 정권 초창기의 복잡한 요소로 아직도 불안정 인도네시아에서의 독립 후에도 현재 동티모르의 인권상황은 불안정하다. 비록 인도네시아와 민병대에 의한 폭력은 사라졌으나 아직 국가 수립 초기 단계이기에 사회 혼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티모르의 열악한 경제상황으로 인해 도시지역 특히 딜리에서는 가난과 실업이 겹쳐 효율적인 치안활동이 없는 가운데 법과 질서에 대한 계속되는 위협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농촌지역에서는 토지 소유권으로 인한 갈등이 잠재하고 있다. 그리고 조직범죄, 강도 및 기타 범죄와 연계되어 있는 파푸아뉴기니의 악질 갱들과 같은 조직 범죄단이 출현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처럼 동티모르 사회가 불안정함에 따라 동티모르인들의 인권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하다.참고문헌「동티모르 인권상황과 독립운동의 전망」, 조용환사이버 민주, 인권 국제관, (http://cyberhumanrights.com/Kor/International/Asia/EastTimor/sub03/sub03_01_01_01.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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