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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된 지상파 방송국의 단막극 프로그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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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드라마시티’와 ‘HD TV 문학관’의 여러 작품들. |
수애, 이동욱, 노희경 드라마작가 그리고 이윤정 PD까지. 현재 왕성하게 방송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단막극으로 드라마 데뷔를 했다는 것이다. 단지 데뷔뿐만이 아니었다. 이준기, 전도연, 이선균은 단막극을 통해 그들의 연기력을 쌓아갔다. 한동안 전국을 ‘삼순이 신드롬’에 시달리게 했던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윤철 PD 역시 이미 ‘베스트극장-늪’으로 몬테카를로 TV페스티벌에서 ‘최고 작품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이처럼 단막극은 유명 배우와 작가, PD들을 배출하는 통로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서서히 설 자리를 잃어가던 단막극은 지난 4월 KBS가 ‘드라마시티’를 폐지함으로써 지상파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드라마 작가와 PD들 사이에는 단막극 폐지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당장 단막극을 부활시킬 수 없는 것이 방송국의 사정이다. 한순간에 방송국의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린 단막극, 그 속사정은 무엇일까. 시장 논리에 희생당하는 단막극요즘 단막극이라고 하면 시청률이 한자리를 넘지 못하는 경쟁력 없는 프로그램으로 치부되지만, 불과 90년대 이전만 해도 단막극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시작 시간에 맞춰 버스에서 내리게 만들 만큼 전성기를 누렸다. 지난 삼십여 년 간 ‘TV문학관’의 연출을 맡아온 장기오 전 KBS 드라마제작국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토요일 밤에 ‘TV문학관’이 방영되고 나면 그 다음주에는 어김없이 각 신문에서 드라마에 대한 ‘주평(週評)’을 싣곤 했다. 심지어 ‘TV문학관’에 대한 심의는 KBS사장이 직접 할 정도였다.” 그만큼 ‘TV문학관’은 PD들의 최고 지향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오면서 단막극의 인기는 계속 떨어졌고, 결국 트렌디 드라마와 시트콤에게 그 자리를 내줬다. 이렇게 단막극이 홀대받게 된 이유는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시청자들이 심각한 내용의 드라마를 찾지 않는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드라마시장의 상업적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재원의 많은 부분을 광고에 의존하고 있는 현 방송제작 구조 상 광고주들이 투자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사장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KBS드라마기획팀의 이강현 PD는 “해마다 경제 불황으로 1000억원씩 광고 수익이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에 인기프로그램이나 대작프로그램이 아닌 이상, 무한 상업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적자를 남기는 단막극의 경우, 공영방송의 소신만으로 유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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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오 전 KBS PD. 그는 1971년 KBS에 입사해 ‘TV 문학관’을 비롯해 삼십여 편의 문예드라마를 연출해 명성을 날렸다. |
달라진 방송제작환경도 단막극 제작을 더욱 힘들게 했다. 거대 기획사 및 외주제작사의 수가 불어나면서 정작 방송국 자체의 기초인력들은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장기오 PD는 “기획사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활성화되면서 배우의 대부분을 기획사에서 관리한다. 그러다보니 배우 한 명 때문에 방송국이 드라마 제작권을 외주제작사로 넘기는 일까지 발생할 지경”이라며 현 상황에 대한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외주제작사에서 거액을 투자해 대형 작가, 배우와 함께 대작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마치 관행인양 굳어진 점도 더더욱 단막극이 설 자리를 없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장 PD는 단막극을 기피하는 배우들과 천정부지로 솟는 그들의 몸값, 그리고 방송을 문화매체로서 발전시키려는 노력 없이 관성화에 젖어있는 현 방송국 내부 문제도 단막극의 위치를 위태롭게 했다고 비판했다. 결국 만드는 쪽, 보는 쪽, 배우 세 측 모두가 단막극 폐지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단막극은 신인작가와 피디들에게 유일무이한 기회의 창지난 3월 KBS ‘드라마시티’의 폐지방침이 알려지자 한국방송작가협회(작가협회)는 이례적으로 ‘‘드라마시티’를 살려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현재 작가협회는 KBS를 비롯해 방송 삼사와 단막극 부활에 대해 꾸준히 논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일선 PD들 역시 단막극이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한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단막극 폐지 문제가 곧 방송의 미래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100m도 못 뛰는 사람한테 300m, 500m를 뛰라면 뛸 수 있겠나?” 장기오 PD는 단막극이야말로 신인 PD와 작가들이 자신의 역량을 쌓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프로그램이며, 단막극 폐지는 곧 미래의 인재를 양성할 마당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신인 PD로 입봉한 후 3~4년 활동이면 PD로서의 성공 여부가 결정되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그들의 실력을 연마할 곳이 사라지는 것이다. 신인 작가들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신인 작가의 데뷔장이던 단막극이 사라지면서 그들에겐 아예 나아갈 길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작가교육원에서 작가지망생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선희 드라마작가 역시 단막극 폐지와 관련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단막극이 폐지되면서 작가지망생들의 여건은 너무 참담해졌다. 교육원 졸업생 중 1/10 밖에 인턴작가로 활동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단막극 폐지로 극본 응모의 기회도 사라져버렸다. 결국 그야말로 눈물의 졸업식을 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이 작가는 단막극과 같이 짧은 호흡의 대본도 연습해보지 않고 미니시리즈와 같은 긴 호흡의 글을 쓰는 것은 신인작가에게 버거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작가는 무엇보다 신(Scene)을 쓰는 연습을 해야 되는데, 요즘 방송국은 무턱대고 신인작가에게 미니시리즈 시놉(Sinope)을 요구한다”며 도대체 어떻게 신인작가들을 지금의 유명 작가들처럼 성장시킬지 의문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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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국제 TV페스티벌에서 골든체스트 동상을 차지한 KBS ‘HD TV 문학관-외등’. |
“단막극은 ‘드라마의 본령’입니다.”
단막극 부활론은 단지 신인작가와 PD의 등용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장기오 PD는 “단막극만큼 짧은 분량에 문학적 완결성이 높은 작품은 없다”며 단막극이 드라마의 ‘본령’임을 강조했다. 그는 “잘 된 단막극 한 편이 10년 후에는 50부작의 대작이 될 수 있다”며 단막극의 무한한 가능성을 높게 샀다. 이선희 작가 또한 단막극이 규모가 큰 드라마의 기초적 뼈대 역할을 한다는데 동의했다. 더불어 이 작가는 “단막극만이 유일하게 작가의 목소리를 온전하게 낼 수 있는 공간”이라며 단막극의 매력을 설명했다. “사실 일일연속극이나 미니시리즈는 가족애, 휴머니즘 등으로 주제에 대한 제약이 많은 반면단막극은 직접 자기 이야기를 터놓고 할 수 있다”며 작가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는 단막극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강현 PD에게 단막극은 PD의 실험 정신을 표출할 수 있는 얼마 안 남은 연출 공간이다. 그는 “단막극은 PD가 부담 없이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적은 예산으로 유행이나 트렌드에 상관없이 깔끔하게 하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며 단막극의 또 다른 매력을 털어놓았다. 지난 3월부터 다음 아고라에서는 ‘드라마시티 폐지 반대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500여 명의 네티즌들이 서명을 했고, 더불어 단막극 폐지의 부당함에 대한 논의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누리꾼 ‘희망’ 씨는 ‘천편일률적인 뻔한 내용의 드라마를 양산하기도 이제는 지겹지 않나’라며 시청률 때문에 좋은 프로그램을 폐지하는 KBS를 비난했다. 또 다른 누리꾼 ‘카랑카랑’ 씨는 ‘신인작가·연출·배우의 양성을 떠나 단막극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삶의 진정성이 있음을 잊지 말아달라’며 방송국이 좀 더 넓은 시야로 현 상황을 판단하길 바랐다. 단막극이 ‘단막극’으로 끝나지 않으려면그러나 모든 사람이 지상파 방송국의 단막극 폐지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시장 논리에 의해 단막극이 사장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구태의연하게 옛날 형식만을 고수하는 현 단막극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시청자의 입맛에 따라 단막극도 혁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방송사에서는 매 회마다 다른 에피소드를 꾸리는 ‘시즌제 드라마’를 도입하는 등의 형식적 실험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자들은 단막극이 현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형식보다는 내용과 소재의 측면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드라마의 본질을 ‘감동’으로 보는 장기오 PD는 드라마를 약의 표면에 입히는 ‘당의(糖衣)’에 비유했다. “겉은 달지만 속은 몸에 좋은 쓴 약처럼 드라마는 재미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교훈과 감동을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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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막극은 미니시리즈의 기둥이자 의지처가 된다.” 단막극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이선희 드라마작가. |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남녀 간의 사랑, 고부갈등, 가족애 등의 천편일률적인 소재에서 벗어나 공포, 판타지, 엽기 등으로 소재를 다변화 시켜야한다는 점도 지적됐다. 특히 이강현 PD는 누구보다도 혁신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다만 그는 혁신을 위해서는 단막극에 대한 투자가 우선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제작비 마련이 어려운 단막극을 위해 방송발전기금이나 문화콘텐츠진흥기금의 일부를 지원하거나 또는 협찬이나 PPL광고(간접광고)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키는 등 방법은 꽤 다양하다고 본다”며 여러 가지 재원 조달 방법을 제시했다. 현재 작가협회와 일선 PD들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장 이번 가을 개편에서 지상파 방송사의 단막극 부활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이강현 PD는 “회사사정과 경기부진 때문에 이번 가을개편에서 단막극을 부활시키긴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계속해서 KBS 경영진과 편성진이 단막극 부활에 대해 함께 논의 중에 있다”고 전했다. 흔히 사회에서 대세로 받아들여지는 논리가 옛것을 ‘처형’하는 것은 매우 빠르고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시장논리에 의한 단막극의 퇴장이 소리 소문 없이 이뤄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처형은 번복돼야 한다. 단막극은 옛것에 그치지 않는다. 단막극은 드라마의 ‘미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