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있는 하루가 생겼다. 오늘 하루만큼은 뭔가 하고 싶고, 보고 싶고, 먹고 싶다. 그런데 난 지금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9동 산 56-1번지 서울대학교 안에 있다. 학교 안에서 찌들고 싶지만은 않은 오늘, 어딘가로 내 발걸음이 옮겨지고 있다.마침표 . 홍대입구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사람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 북적이는 노점들과 반짝이는 상점 간판. 유쾌하고 활기 넘치는 젊음의 거리, 홍대입구에 와있다. 홍대입구를 단순히 사람들이 지나쳐가는 공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분명 홍대입구는 목적을 갖고 찾게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노정의 중간이 아닌 끝에 바로 홍대입구가 있다.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기위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공간으로서 홍대입구를 이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잠깐 이곳에 서 있다가 다른 곳으로 바삐 사라지는 사람들보다는 느긋하게 이곳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즐기고, 느끼는 사람들이 일반적이다. 직장인들은 보이지 않는다. 홍대입구의 수요는 주로 젊은 대학생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홍익대학교 앞에 서울대학교 학생이 있고, 연세대학교 학생이 있고, 고려대학교 학생도 있다. 신촌이 코앞이니 연대생이야 그렇다 치고 관악에서 그리고 안암에서 여기까지 온 얘네들은 대체 뭘까. “피어싱하러 왔어요. ‘피어싱클럽’이라고, 예쁘게 잘 뚫어줘요.” 유리(단국대 중문 03) 씨는 귓불을 만지며 웃는다. “디저트 뷔페가 있다고 해서 왔어요. 제가 디저트 킬러거든요. 케익, 타르트, 퐁듀, 과일 요거트 등등 손수 만든 디저트들을 맛볼 수 있다고 해서 와보고 싶었어요.” ‘카페앤’을 찾아온 김은혜(언어 04) 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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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롭고 편안한 분위기, 카페 ‘ZIBE’의 침대방 |
홍대입구에는 수많은 이색카페가 있다. 연극이 열리는 연극카페,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드레스포토카페, 특이한 인형들을 전시, 판매하는 인형카페, 애견카페 등 그 인기가 대단하다. ‘ZIBE’의 침대방에서는 손님들이 정말 침대 위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뒹굴거릴 수 있다. 신비로운 보라색 커튼을 살짝 젖히고 들여다보니 침대 위에 아기자기한 쿠션들이 있다. 카페 이름처럼 내 ‘집에’ 온 느낌, 내 집같이 편안한 분위기가 ‘ZIBE’의 모토. 1층에 있는 풀장에서는 족욕도 할 수 있다. ‘세븐티’는 카페에 쇼핑몰이 결합된 곳이다. 장신구, 그림 등 많은 볼거리에, 다양한 소품을 비싸지 않게 살 수 있고, 셀프 네일 코너도 있어서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있는 손님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두리번 돌아다니며 보고, 만지며, 놀아야하는 카페가 바로 ‘세븐티’.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정적인 공간, 기존 카페의 이미지는 이미 홍대입구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매월 넷째 주 금요일은 홍대의 가장 상징적인 축제, 클럽데이다. 티켓 한 장으로 13곳의 클럽을 돌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공연을 무제한 즐길 수 있다. 클럽데이는 그 특성상 비슷한 음악적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친밀감을 나누고, 정보와 관심사를 함께 공유하는 ‘취향문화, 파티문화’라 할 수 있다. “워낙 춤추는 걸 좋아해서 클럽데이 때 종종 홍대입구를 찾아요. 매번 클럽입구에서 구두, 넥타이 착용자들을 걸러내는 걸 목격했어요. 아주 약간의 정장 느낌 복장까지도 철저히 막죠. 그럴 때면 왠지 홍대입구는 ‘난 대학생들의 놀이터야’ 하고 스스로를 정의하려는 느낌도 들어요. 그런 점에서는 조금 뾰루퉁해지기도 하죠.” 직장인C 씨의 푸념이다. “클럽 ‘JOKERRED’를 즐겨 찾아요. 정통 테크노를 밤새도록 즐길 수 있거든요.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이 그렇게 상쾌하게 느껴질 수가 없어요. 힘든데 힘이 난다니까요.” 최연규(전컴 04) 씨는 춤추기 위해 꾸준히 홍대입구를 찾고 있었다. 쉼표 ,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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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쏟아질듯 다양한 상점의 간판들, 이곳이 바로 사당이다. |
사당은 하루 15만명의 인구가 움직이는 거대 환승지, 없는 것 없는 2호선의 대표주자다. 각종 패밀리레스토랑에 최근에는 대형서점인 반디 앤 루니스, 신촌-압구정-명동에 이어 고급유희공간이라 일컬어지는 곳에 줄줄이 개점 된 크리스피크림도넛, 커피빈에 이르기까지. 알아주는 브랜드의 고급 프랜차이즈들이 즐비하다. 수요는 누굴까? 하지만 도무지 이 곳 느낌, 분위기, 코드를 모르겠다. 들쭉날쭉 특색 없이 뒤섞인 건물들과 상점들은 어떤 분위기나 조화로움과는 거리가 멀다.똑같은 걸 먹어도 어떤 공간에서 먹느냐는 것만으로 하나는 단순히 먹는 행위가 되고 또 다른 하나는 노는 행위가 된다. 사당 TGI요? 한번도 안 가봤는데. 글쎄. 굳이 거기서 먹을 일이 없죠. 먹고 나면 다잖아요. 주변에 놀 거리도 없고, 동네가 특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정말 ‘식사’ 하는 거죠. 코엑스 TGI요? 많이 갔죠. 거기서 먹는 건 ‘식사’이상의 범주죠. 먹고 쇼핑도 하고 시간 맞으면 영화도 보는 거고. 많이 달라요. – A(국문 04) 씨저희 수요는 직장인들이나 가족들이 절대적이에요. 주변에 서울대, 중앙대, 숭실대, 서울교대 등 대학교들도 다수지만 그만큼의 대학생 수요는 없어요. – 사당 TGI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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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객들을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의 군집 |
사당은 교통의 요지지만 연계된 다른 놀이 공간이 없다.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터널과도 같은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유동인구들이 집으로 향하는 관문, 혹은 등산객들의 집결지. 뭐 이건, 머무르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빨리빨리 움직여서 어디론가 움직이고 나아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사당 역 커피빈은 ‘테이크 아웃! 테이크 아웃!’이라고 외치고 있다. 커피를 들고 다른 공간으로 가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현란한 유흥가, 특히나 직장인들을 수요로 하는 미인촌이며 모텔들. 사당역이 기혼자들의 불륜의 온상이라고 언급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이 대학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절대적으로 기성세대를 위한 것들이다. 코 앞이 사당이지만 가기 싫은 이유 중 하나다. “마치 우범지대 가운데 서있는 느낌이랄까요. 어른들 틈에 섞여 있는 것 같은 낯선 기분이에요. 신림도 마찬가지죠, 뭐. 사당이나 신림이나 서울대입구에서 오른쪽, 왼쪽으로 두 정거장씩만 가면 될 뿐인데 아무도 가지 않잖아요.” C(원자핵 01) 씨의 말이다. 사당은 적어도 우리 대학생들에겐 지나가는 공간일 뿐이었다.강북의 숨은 히어로, 삼청동차 없이 찾아가기는 살짝 억울한 공간이다. 삼청동이라는 지하철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광화문이나 안국, 종로 3 가 즈음에서 슬슬 걸어가거나, 택시를 타거나 해서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이곳을 찾아내주어야 하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삼청동은 강북 제일의 명소이자 가고 싶은 공간,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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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청동의 어느 장난감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독특한 계단길 |
느긋한 산책의 공간, 소요하고픈 공간. 이곳은 부담스럽지 않은 생소함으로 찾는 이들을 자극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기자기하고 독특한 간판들은 훈훈하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삼청동 하면 떠오르는 북카페. 북카페, ‘내 서재’는 커피 한 잔과 함께 좋은 책을 보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곳이다. 주인이 직접 고른 수 천 권의 북콜렉션이 카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은 없는데 시간을 그냥 보내기는 아까울 때 가기 좋은 카페이다. 도서관의 숨 막힐 듯한 조용함이 아닌 편안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집에서 책을 읽는 듯함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북적이는 도시에서 잠시 떠나와 이곳에서 우리는 한적함을 만끽한다. ‘한적해도 지루하지 않을 수 있구나’ 싶은 아이러니한 공간, 삼청동이다. 강남의 블랙홀, 압구정오전의 압구정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시간도 많고, 돈도 많은데, 딱히 할일은 없는 사람들의 유희공간이 된다. 그들 대부분은 유학생, 자발적 백수 혹은 백조, 프리랜서 등 비슷비슷한 부류의 사람들. “애매한 오전 시간에 브런치카페나 노천카페에 죽치고 있는 남자, 여자들, 무척 많이 봤어요. 5000원 이하의 음식을 먹는다는 게 여기서 만큼 힘든 곳도 없을 거 에요. 무척 비싸면서, 약간 맛있는 음식들을 매일 먹을 수는 없잖아요. 점심 때마다 고민이었죠.” 압구정에 있는 어느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다는 최지윤(서문 04) 씨는 지난 6개월 동안 많은 것들을 보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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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급 브런치 카페, 74 |
압구정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밥 대신 트렌드를 먹는다. 그들이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고 있는 것은 하나의 관념이자 생각이다. 그들은 목구멍으로 음식을 씹어 넘기면서 ‘난 유행과 트렌드를 잘 소화시키고 있어’ 라며 안심한다. 뉴욕의 브런치 문화는 이미 이곳에 탄탄히, 그리고 깊이 자리하고 있다. 즐비한 브런치카페는 한국판 섹스 앤 더 시티, 한국판 뉴욕을 방불케 한다. 고급 레스토랑에 삼삼오오 앉아있는 숙녀들은 바로 제2의 캐리와 사만다다. ‘오늘 화장도 안했는데?’, ‘옷이 엉망이야. 전혀 준비가 안 됐어.’ 압구정은 편안한 마음으로 찾게 되는 편한 공간은 아닌가보다. 오늘 자신이 추레한 모습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지체 없이 녹두로 향할 테니까. 압구정은 예쁘게, 완벽하게 차려입고 가야하는 공간인 것이다. 불편한 느낌으로 끝없이 긴장해야하는 공간, 어떤 가격의 어떤 트렌드가 갑자기 내 앞에 펼쳐질지 쉬지 않고 의식해야하는 공간이다. 하루 꼬박을 4군데나 둘러보고 나니 퍽 피곤하다. 공간은 말한다. 우리는 공간과 소통한다. 그렇게 공간을 인식하며 우리는 선택한다. 머무를지, 지나갈지. 오는 주말 한 군데 골라 가보는 건 어떨까? 이 기사에 꼬투리 잡을 만한 건 없는지도 살펴볼 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