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인디 음악판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솔직히 처음엔 인디 음악판이 통째로 망하는 줄 알았다.사실 그럴만했다.사건이 있고 나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 미디어들이 앞 다투어 군중들의 옷을 벗기기에 달려드는 바람에 클럽은 순식간에 나체의 도가니로 재창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평소에 전혀 관심도 없던 것을 기껏 하루 취재해서 쓴 기사들치고는 너무 자신감들이 넘치고 있었던지라, 사람들은 정말 그런가보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솔직히 처음엔 인디 음악판이 통째로 망하는 줄 알았다. 사실 그럴만했다. 사건이 있고 나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 미디어들이 앞 다투어 군중들의 옷을 벗기기에 달려드는 바람에 클럽은 순식간에 나체의 도가니로 재창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평소에 전혀 관심도 없던 것을 기껏 하루 취재해서 쓴 기사들치고는 너무 자신감들이 넘치고 있었던지라, 사람들은 정말 그런가보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서 음악 하는 친구들에게 부모님들께서 “너도 저리 벗고 다니냐”며 걱정스럽게 전화를 거셨고, 누군가는 “기타만 메면 주위의 눈초리들의 흉흉해진다”고 반농담 삼아 얘기했다. 하지만 망하지는 않았다. 인디 음악판 내부에서 비상대책위를 꾸리면서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고, 미디어들도 이성을 찾고 자신들이 창조해 낸 알몸의 문화의 허구성을 밝히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지, 이건 동시에 기회기도 했다. 사건이 터진 다음날 주요 일간지의 1면을 장식하고 방송 3사의 9시 뉴스에 일제히 다뤄질 만큼-인디문화가 9시뉴스에서 일제히 보도된 것은 98년 1회 독립예술제를 제외하고는 이게 유일하다고 한다-미디어의 관심이 집중됐던 것이다. 그 관심이 아무리 선정적이라 하더라도 정말로 발가벗고 놀지 않는 한에야 미디어들의 벌개진 눈이 가라앉으면 그때는 반성이니 재조명이니 하는 흐름이 올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그런데 정작 그토록 갈망했던 관심이 주어지자 인디 음악판이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성공할 것도 없었고, 망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서서히 가라앉다 흔히들 홍대 인디음악판-줄여서 홍대씬(scene)-이 10년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충 클럽 ‘드럭’의 형성과 미국 밴드 너바나(Nirvana)의 리더인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의 추모 공연 이후 가시적인 흐름이 형성된 것을 기점으로 하여 10년이라는 것이다. 애초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한창 미국에서 인기 끌던 너바나나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 류의 얼터너티브-그런지(Alternative-Grunge) 음악 따위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술 먹다가 공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연주 경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가내로 밴드를 시작했고, 비슷한 사람들이 홍대 근처로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물리적 공간인 클럽들이 생겨났고, 이전의 대중음악 흐름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종류의 음악들이 클럽에서의 공연을 통해 불려졌다. 그러다가 드디어 음반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대중들과의 접점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인디라는 말의 어원인 ‘인디펜던트(independent)’가 주류 시스템으로 분리된 채로 음악을 생산/유통하는 체계를 의미하는 만큼, 독자적인 음반 생산이 가능해진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인디 음악‘이 된 것이다. 정말 굉장한 것들이 이러한 흐름을 통해 만들어졌다. 아마 1998년부터 2000년까지가 전성기라고 할 만한 시기였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최고라 꼽는 크라잉넛의 2집 「써커스매직유랑단」과 미선이의 「Drifting」, 그리고 어어부프로젝트의 「개, 럭키스타」를 비롯, 수없는 주옥같은 음반들이 나왔고, 그에 비례하여 홍대 앞 라이브클럽들은 관객들로 융성했으며, 미디어들의 관심-그때는 서브 같이 인디음악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월간지도 있었다-도 풍족했다. 동시에 “라이브 클럽에서 놀던 애들이 댄스 클럽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는 말이 자주 들리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다. 덩달아 신보 목록이나 공연 소식란에서 이름만 보고 손이 가고 발이 가는 밴드들이 부쩍 줄어들기 시작한 것도 분명 그 무렵이다. 그렇게 5년, 절정에 달한 흐름은 이후 5년,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하여 아직도 하강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불황 탓이 있을 것이고, 음반 시장 불황이 아주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mp3를 무료로 공유하는 것이 인디음악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90% 정도는 환상이다. 대개는 그 반대의 효과를 일으켰다.) 클럽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고, 정부가 홍대 근처를 월드컵 이후 ‘밤의 관광지’ 격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땅값이 급속도로 상승, 열의만 많고 돈은 없는 자발적 흐름들이 설만한 공간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 흐름을 주동했던 세력이 힘을 거의 다 소진했다는 사실이 크다. 10년 동안 홍대 씬을 이끌어 온 크라잉넛이나 코코어, 델리스파이스, 언니네이발관 같은 밴드는 분명 대단하긴 하고, 여전히 감흥을 줄만한 작업들을 하고 있기는 하나, 이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기는 역부족이다. 그들의 공연에는 홍대 앞의 클럽들에서 벌어지는 다른 공연들에 비해 분명 많은 사람들이 오기는 하지만 관객의 연령층은 대개 30대.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자란 이들이 그들과 똑같이 나이 들어 갈 뿐, 더 이상 새로운 관객들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흐름이다 카우치의 성기 노출로 인한 위기 이전에 이미 홍대 씬은 내부에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라리 쏟아진 관심은 홍대 씬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발가벗겨진 인디음악판에는 관심을 가질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 변두리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그런데, 아예 바깥에서 보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날뛰고 나서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미디어의 관심이 그걸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다. 때문에 인디 음악을 구원할 것은 “라이브클럽과 댄스클럽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미디어의 건전한 관심이나 정부의 정책적 지원 같은 것 이전에 내부의 추동력이다. “전성기였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식의 복고 지향적인 추동력은 매우 곤란하다. 솔직히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의 사람들과 과감하게 단절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미 변화는 일어났고 일어나는 중이다. 인디 음악판이라는 단어 앞에 ‘홍대’라는 말을 붙이는 게 다소 착오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홍대의 클럽이 아닌, 자기의 방을 본거지로 컴퓨터 한대를 바탕으로 돈 받고 팔아도 될 정도의 질을 갖춘 음반을 내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유통 매체도 인터넷의 영향력이 심화하면서 보다 유동적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려는 이들은 별로 없다. 나 역시 들은 얘기긴 하지만, 지금 홍대 인디 음악판에서 어느 정도의 지분을 가지고 활동하는 이들은 대부분 90년대 중반부터 활동해 온 이들이라고 한다. 뮤지션들은 젊어질지 몰라도 인프라는 계속 늙어가고, 변화를 수용하여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낼만한 힘이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이번 사태가 의미가 있다면 벌거벗겨진 인디 음악판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한 것이다. 뭐 물론 인디 음악에 대해 대중들이 좀 더 적대적이 되긴 했겠지. 그런데 언제는 관심을 받으면서 했던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어떻게 만들 거냐고? 아직 잘 모른다. 일단 시작한 후에 여러 상황에 맞부딪히고 나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10년 전에도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시작됐다. 더욱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 이외에는) 잃을 것도 없다는 소리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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