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understand just one life, you have to swallow the world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라, TV에서 나오는 외신 보도를 통한 것이었다.인도출신의 영국 작가가 악마의 시라는 소설을 써서 이슬람계로부터 아주 격렬한 항의를 받게 되었고 급기야 그는 이란의 회교 지도자 호메이니로부터 종교적인 파문(fatwa)을 받아서 피신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보도였다.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라, TV에서 나오는 외신 보도를 통한 것이었다. 인도출신의 영국 작가가 악마의 시라는 소설을 써서 이슬람계로부터 아주 격렬한 항의를 받게 되었고 급기야 그는 이란의 회교 지도자 호메이니로부터 종교적인 파문(fatwa)을 받아서 피신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보도였다. 그의 책은 자신의 조국인 인도로부터 추방 당하고 자신의 가족이 살고 있던 파키스탄을 비롯한 주변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영국의 펭귄 출판사에게 즉시 악마의 시를 수거할 것을 종용하는 대규모 시위와 집회가 잇달아 열리고 있었다. 루시디는 곧 사과 성명을 내었으나 이슬람의 시위와 항의는 그칠 줄을 몰랐고 그들의 거친 태도는 급기야 루시디의 책을 번역한 번역가를 테러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989년에 내려진 종교적인 파문으로 인해 루시디는 그 후 10여년간의 도피 및 은거의 삶을 살게 되었고 1998에 들어서야 그에 대한 이슬람의 공식적인 파문이 철회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일컬어 일명 루시디 사건(Rushdie Affairs)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 사건에 대한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며 이 둘은 화해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먼저 서구쪽 비평가들과 역사학자들은 루시디의 악마의 시가 이슬람 세계에서 나온 자기 비판의 대표적인 형태로 보면서 환영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서구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작품으로 까지 평가하게 된다. 이 주장의 구체적인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슬람 세계의 극단적인 반대를 불러 일으켰던 지점이 서구 쪽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부분이 되었다는 점이다. 악마의 시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부분인 코란의 형성 과정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 점과 이슬람의 성스러운 예언자 무함마드 사실 무함마드(Muhammad)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마호멧(Mahomet)이라고 불려 왔으나 이는 잘못된 명칭이며, 오리엔탈리즘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호멧은 그 뜻 자체가 잘못된 예언자이며 서구인들이 이슬람을 폄하하기 위해서 부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를 머하운드(Mahound)라고 지칭하면서 무함마드의 12명의 아내와 같은 이름을 지닌 윤락녀들을 등장시켰다는 점이다. 이슬람 쪽에서의 반응이 불과 같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시위와 항의는 어쩌면 정당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악마의 시에 나오는 이러한 부분을 서구쪽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이슬람 내부의 자체적인 반성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격렬하게 항의하는 이슬람 세계의 민중들은 서구쪽 입장에서 바라보면 아직도 근본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무지한 군중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의 이슬람 쪽 반응은 루시디가 자신의 책을 선전하기 위해 일부러 논쟁적인 글쓰기를 하였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종교적인 기반과 뿌리를 서구에 팔아 먹는 행위를 한 작가라는 것이었다. 무함마드를 머하운드라고 지칭한 의도는 머하운드라는 말이 주은 어감을 살펴보면 더 극명해지는데 머하운드라는 말은 루시디가 미친(Mad)라는 말과 사냥개(Hound)라는 말을 결합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슬람의 성스러운 예언자는 미친 개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란의 정치적인 지도자이며 이슬람 세계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던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를 이슬람 근본주의의 화신으로 묘사하면서 그 폭력적인 성향의 중심으로 본 것 또한 이슬람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한 불만을 불러 일으킬만 했다. 그리고 그의 책을 출간한 펭귄 출판사측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고 있었고 그의 신변 또한 영국경찰이 보호하고 있었으니 이런 의심을 받기에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이 합의의 가능성을 보지 못한 채로 유혈시위와 언론에서의 전투는 뚜렷한 결과없이 진행되다가 1991년 걸프전을 맞이하면서 이른바 루시디 사건은 뉴스 헤드라인의 뒤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위의 두 가지 입장 모두 루시디에 작품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작품에 대한 이해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의 세계관이나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하기 전에 작품을 꼼꼼히 읽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서구쪽에서는 악마의 시라는 작품에서 다른 중요한 부분을 놓치면서 논쟁이 되는 부분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들의 선입견에 따라 분석했으며 이슬람 쪽은 대부분이 작품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더러운, 신을 모독하는 작품이라고만 비난한 것이 문제였다. 그들이 작품을 읽지 않고서 비난하는 근거는 이미 신을 모독하는 작품이라는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그러한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독약인 줄 알면서 확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기실 루시디의 악마의 시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에만 그치지도 않고 영국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것에 국한되지도 않는 작품이다. 위의 두 가지 요소는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일부에 속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인간의 인식 능력과 범위에 대한 것이며 그러한 인식을 통해 지나간 역사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또는 이미 확립된 역사 또는 신화 속에서 의심할 부분을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 속에는 두 명의 인도인이 영국으로 건너가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지에 대한 탐구이고 이와 더불어 유일하게 역사 속에 등장하는 예언자인 마호멧에 대한 루시디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를 밝힌 것일 뿐이다. 결국 루시디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루시디 사건으로 인해 생겨난 국제 정치적, 종교적인 명성을 얼마나 벗겨내고 이해하는가에 다름 아닐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민(Migration)과 변신(Metamorphosis)의 삼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대표작들, 즉 한밤의 아이들(Midnights Children), 수치(Shame), 악마의 시(Satanic Verses)를 꼼꼼히 읽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그에게 영국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부커상(Booker Prize) 루시디는 1981년에 한밤의 아이들로 부커상을 수상한다. 1993년에는 지난 25년간 부커상 수상작 중의 최고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Booker of Bookers로 선정된다. 후보에 오른 작가 중 우리에게 낯이 익은 작가로는 나딘 고디머, 존 버저, V.S. 나이폴 등이 있었다.를 안겨준 작품인 한밤의 아이들은 그가 현실을 파악하는 방식을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밤의 아이들은 우리나라에 번역본이 나온 적이 있었으나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절판된 상태라 우리나라의 일반 대중에게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긴 하지만 루시디의 작품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서 루시디는 살렘 시나이(Saleem Sinai)라는 주인공의 가족사와 인도의 독립과 관련된 근대사를 자신만의 독특한 서술 방식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일인칭 시점 서술이기 때문에 주인공인 살렘이 지나간 역사와 당면한 현실을 파악하는 방식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살렘의 서술방식은 서구에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걸쳐서 확립된 리얼리즘적인 서술방식과는 상당한 거리를 지닌 것이고 오히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나 귄터 그라스와 같은 작가의 서술방식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살렘이 취하는 방식이 지니는 특징은 개별적인 세가지 특징과 그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특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가 지나간 역사와 당면 현실을 자기 중심적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은유적인 것은 직설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직설적인 것은 은유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시간적인 순서를 잘못 서술하고도 그렇게 믿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의 서술방식들은 모두 인도의 전통적인 서술방식은 구전 서술(Oral Narrative)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앞선 세가지의 개별적인 특징들은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루시디의 입장에서는 거대한 역사 속에 개인이 포함되는 관계보다는 개인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기억 속에서 불균등하게 존재하는 역사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구전 서술방식의 경우에서는 기존의 서구적인 서술방식과 차별화를 읽어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 확립된 선적인 서술방식(Linear Narrative)이 서구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근대적인 성장과 발전을 기술하는데 적합하다고 한다면 루시디의 주인공인 살렘의 방식은 그러한 선적인 서술방식이 자신의 무대인 인도에 적용될 때 지니는 한계를 인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구는 근대적인 성장과 발전을 자신의 근거에서 진행시켜왔지만 인도의 근대화는 영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라는 독특한 역사적 경험과 결부되었으며 인도의 독립 또한 식민지 지배의 산물이라는 뼈아픈 사실은 선적인 발전과 성장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성격의 진행이 아닌 것이다. 결국 살렘이 사용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의 식민지 역사와 근대화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 주위에 관련된 여러 인물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조금 더 확장 시키면 살렘만의 역사 인식방법이 아니라 실제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 가지는 실감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적인 역사를 배우기는 하지만 인간의 기억 속에는 자신이 기억하고자 하는 부분내지는 잊을 수 없을 만큼 통렬한 부분만 남게 마련이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그저 일어난 일 정도일 뿐 개인에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저 일어난 사건으로 치부되는 것에도 그 개인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인물과 사건을 읽어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세계를 삼켜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것이 루시디의 작품을 읽어내는 방법 중에서 가장 제대로 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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