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그리고 계속되는 이야기

‘나는 그냥 강의실에서 뛰쳐나왔고, 화장실에 가서 울면서 목덜미를 몇 번이고 씻어냈다.차마 그 강의실에 다시 갈 용기가 나지 않았고, 넋 나간 사람처럼 학교를 돌아다녔다…그 남학생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마음 같아선 관악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하고 싶었지만 사건을 공개하는 일도 그 남학생의 신원을 공개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강의실에서 뛰쳐나왔고, 화장실에 가서 울면서 목덜미를 몇 번이고 씻어냈다. 차마 그 강의실에 다시 갈 용기가 나지 않았고, 넋 나간 사람처럼 학교를 돌아다녔다… 그 남학생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 같아선 관악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하고 싶었지만 사건을 공개하는 일도 그 남학생의 신원을 공개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사건을 묻어두었다…’ 이 글은 93년도 자주관악에 실린 87학번 한 여학우가 쓴 ‘관악 성폭력에 대한 단상’ 의 일부이다. 성폭력은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그로 인한 피해자들도 계속 있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쭉 ‘있어왔던’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드러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늦게나마 성폭력이 드러나게 되면서 그 해결을 위한 노력도 계속 되어왔다. 관악에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들은 이제까지 어떻게 있어 왔을까. 성폭력 드러내기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쉬쉬되던 성폭력에 대한 담론이 공론의 장으로 나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93년, 서울대 화학과 신 교수의 조교 성희롱 사건이었다. 교수가 조교를 성희롱 하고, 조교가 요구를 거절하자 권한을 행사하여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것이다. 이에 조교는 성희롱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승소했다. 하지만 언론이나 사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판결을 불만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판결을 내린 판사에게 항의와 비난 전화가 빗발쳤고 ‘이젠 여직원을 쳐다보지도, 말을 건네지도 못하겠다’ 하는 말들이 오고갔다. 당시 총학생회는 대학본부측에 성폭력 학칙제정을 요구했으나 본부의 ‘절대불가’라는 강력한 반대에 의해 무산되기도 했다. 그 때의 사회나 학내의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학내에서 여성운동의 기반이 형성되고 다져져가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이때부터 그동안 묻어두기만 했던 성폭력에 관한 논의들이 점점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성운동 단위들의 조직 이어 96년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 문제와 약대 교수의 성희롱 사건이 드러나면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고 학칙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져 갔다. 여러 단대, 과에서 여성운동 단위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97년에는 학내 여성운동 단위들의 연대체인 ‘관악여성모임연대’(이하 여모)가 발족하였다. 여모는 당시 총학생회선거에서 모든 선본에게 성폭력 학칙 제정 투쟁을 선거공약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듬해 41대 총학생회에서는 이를 담당할 성정치위원회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학원내의 성폭력 담론을 보다 현실적으로 실행 해 나가기 위해 97년 10월 ‘성폭력 학칙 제정 및 신 교수 퇴진을 위한 공동 대책 위원회’(이하 공대위)가 총학생회와 여모, 단대 학생회들의 지원을 받으며 꾸려졌다. 공대위는 준비한 성폭력 학친 가안과 함께 성폭력 학칙을 논의하는 공청회를 열고 신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학내 집회를 가지는 등, 이 두 실행안을 학내에 공론화 시키는데 힘썼다. 계속되는 성폭력 학칙 제정운동 98년에는 성폭력 학칙 제정운동이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본부와 교수를 상대로 한 강제력을 갖는 학칙 제정 투쟁이었는데, 여모와 총학생회에서는 함께 본부에 반성폭력 학칙을 제언하였고 이후 학칙안에 대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머지 하나는 대학 내의 자치적 질서에 기반을 둔 자치규약 제정운동이었는데 그 결과 인문대와 사회대 에서 성폭력 학생 회칙이 제정되었다. 학생회칙 제정은 학생사회 내의 자치적 움직임에 기반 한다는 점과 학칙보다 효율적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당시 그 과정에서 제정된 학생 회칙과 관련하여 가해자의 공개 사과문 게시에 대한 논쟁이 대자보를 통해 활발히 진행되기도 하였다. 98년 후반기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단과대에서 ‘성폭력 해방공간 선언운동’이 벌어졌는데, 이는 앞서 제정된 학생회칙의 한계성에 주목, 학우들이 스스로를 운동의 주체로 인식하고 행동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다음해인 99년 4월에는 반성폭력 학칙 제정을 위한 활동단 ‘바로지금’이 결성되었다. ‘바로지금’은 학내의 여성운동 모임들과 학생회 대부분이 결합하여 만들어 졌으며 2주간에 걸친 공청회, 서명 운동과 결의대회 등을 통하여 지금까지의 학칙제정 논의를 대중적으로 알리고, 그에 대한 의견과 동의를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벌였다. 이 서명운동에는 4000명이 넘는 학우들이 참여했으며 이 ‘바로지금’ 활동으로 인해 반성폭력 담론이 관악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계속되는 이야기 수년간에 걸친 학칙 제정 운동으로 드디어 00년에는 학칙제정이 마무리되었고, 11월 말에는 학생회관 4층에 서울대 성희롱 성폭력 상담소가 개소하게 되었다. 이 학칙과 상담소는 학생들의 자발적 요구와 지속적인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 자치 운동의 성과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성폭력 학칙은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고 보상 받으려는 사람들을 위한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제도 기관의 설치를 보장해 줄 수 있으며 이제까지의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를 부분적으로 제도화하여 보다 전진된 상황에서의 여성운동을 가능하게 해 준다. 또한 상담소는 강제력과 전문성을 가진 공신력 있는 기구로써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해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상담소가 제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 지금의 상담소는 독립된 기구가 아니고, 따라서 재정, 입지 등 여러 문제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열악한 재정이나 그로인한 안정적이지 못한 인력수급, 불안정한 시스템 등이 하루빨리 제대로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2001년, 관악은 성폭력 사건처리에 관한 자보, 담론이 말 그대로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이번 이 모씨 사건 처리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수많은 논쟁들은 아직 성폭력과 그 처리과정에서 명확히 정의되지 못하고 서로 합의되지 못하는 지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한 경우에 어떤 혼란이 야기되는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논의들이 모두가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정리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93년, 성폭력을 사회로 ‘드러내기’위한 시도부터 오늘, 성폭력 처리과정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과 고민들, 그런 노력들이 성폭력 문제 해결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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