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의사의 길은 무엇인가?

“다시는 결코 메스를 들면서 그 어떤 생명체도 단순한 기계적 유기체로 취급하지 않으리다.사람이란 꿈을 가진 존재다.이제부터 나의 칼은 육체와 동시에 그 꿈을 구하리라” -베쑨의 ‘일기’에서 이번 달에 소개할 인물은 캐나다 출신의 의사 노먼 베쑨(Norman Bethune, 1890-1939)이다.그는 결핵의 외과적 치료에 큰 공헌을 하였고 흉부외과의사로서 명성을 날렸다.

“다시는 결코 메스를 들면서 그 어떤 생명체도 단순한 기계적 유기체로 취급하지 않으리다. 사람이란 꿈을 가진 존재다. 이제부터 나의 칼은 육체와 동시에 그 꿈을 구하리라” -베쑨의 ‘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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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 소개할 인물은 캐나다 출신의 의사 노먼 베쑨(Norman Bethune, 1890-1939)이다. 그는 결핵의 외과적 치료에 큰 공헌을 하였고 흉부외과의사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을 ‘의사’라는 직업에 한정시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전선의 의사였으며, 짚신 차림의 게릴라이자 혁명가였다. 노먼 베쑨은 세균이든 사회체제든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좀 먹는 것이라면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저항했던 큰 의사(大醫)였다. 그의 삶을 지배했던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공유해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가난, 그 가장 무서운 질병 베쑨은 케나다 온타리오 주 그레이븐 허스트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다. 어머니와는 달리 종교보다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그의 할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기를 꿈꾼다. 토론토로 이주한 후 토론토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한다. 대학 재학도중에 1차대전에 참가하였고 졸업 후에는 영국군에 입대해 의무장교로 근무한다. 제대 후 혼란스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보헤미안적인 자유분방함을 만끽하며 살아간다. 런던에 있는 아동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마친 후 이스트엔드에 있는 개인병원에 취직한다. 그 후 그가 근무했던 병원의 원장인 닥터 엘리너 델의 후원과 그의 아내 프랜시스의 유산으로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유명한 의사들로부터 외과적 지식에 대해서 공부한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신흥도시 디트로이트에 병원을 개업한 베쑨은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보며 사회적인 모순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 때문에 치료받을 엄두를 못 내게 되고 결국은 큰 병을 앓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별 것 아닌 증상에도 큰 돈을 내며 자신의 병원을 찾는 부자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단지 부자들만을 상대하면서 돈을 벌려고 하는 주변 개업의들의 태도도 베쑨에게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질병은 ‘결핵’이 아니라 ‘가난’이었다. 더 넓은 의미의 의술을 위하여 병원 운영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의료봉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베쑨에게 결핵이라는 병마가 찾아오게 된다. 그 당시에는 결핵에 대한 구체적인 치료법이 나오지 않은 상태였고, 결핵환자들은 요양원에서 요양을 하면서 병이 낫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베쑨도 아내의 미래를 위해서 아내와 이혼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원에서 자신의 남은 삶을 정리하고자 한다. 하지만 결핵의 외과적 치료에 대한 글을 우연하게 찾게 된 그는 요양원 측에 그 치료법을 자신에게 사용해 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베쑨은 ‘인공 기흉술’을 통해서 두 번째 삶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당시의 의학에 대한 불만을 느끼게 된다. 첫째는 위험부담을 피하려는 의사들의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개체를 전체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그는 결핵을 단순히 폐의 질병으로만 보는 단편적인 접근방법을 비판했다. 그와 몇몇 진보적인 의사들이 주창한 결핵에 대한 외과적인 치료법이 도입되면서 결핵의 치료율을 향상되었지만, 결핵환자들은 오히려 더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게 된다. 그는 그 원인을 가난 나아가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에서 찾아낸다. 베쑨은 경제학과 사회학에는 무지했지만 당시 일어나고 있던 문제들의 해결책이 경제학과 사회학의 접점에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병마로부터 구해내고 보호하기 위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사상은 사회주의 의료체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보건의료체계에 대한 생각은 그가 소련을 다녀온 후 더욱 공고화되었다. 그는 소련의 인민 중심의 의료체계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귀국 후 토론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적 의료 그리고 사적 의료의 폐지 또는 제한은 의료 문제의 현실적인 해결책입니다. 우리 모두가 의료행위에서 사적 이윤을 배제시켜나가도록 합시다.” 파시즘에 저항하다, 스페인으로 선진적인 개혁주의자이자 세계를 바꿀 혁명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베쑨은 공산당에도 가입하게 된다. 그는 책상에 이런 메모를 써 두었다. 1. 스페인전쟁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할 것 2. 사회주의 의료관계 연설문의 사본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회람시킨 후 논편을 받을 것 3. 요양소에서 퇴원한 결핵 환자들을 엄선하여 사회복귀 프로그램 모델 도시로 보낼 계획을 세울 것 4. 아동에 대한 그러한 프로그램이 예전에 실시된 적이 있는지 의료기관 문헌을 통해서 조사할 것 일반인들에게는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일들이 그에게는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가 이런 문제 의식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동안 스페인에서는 파시스트 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공화파 세력간의 내전이 격화된다. 그에게 파시즘은 하나의 집단적 정신이상 증세로 보였다. 만약 스페인에서 파시즘 세력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인류 전체가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사로서의 안정적인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군의관으로 활동하기 위해서 마드리드로 떠났다. 그는 마드리드 시민들의 결연한 저항의지에 감동을 받는다. 분명 시민들의 그러한 태도는 베쑨의 삶의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 명의 군의관으로서 베쑨은 스페인의 전장터에서 혁명적인 일을 해낸다. 전장에서 혈액이 부족해 죽어가는 병사들을 위해서 이동 수혈대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 두란 호르다라는 의사가 ‘혈액은행’을 조직한 적은 있었지만 베쑨이 생각해낸 ‘이동 수혈대’의 개념은 무척 획기적인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주장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베쑨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그것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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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전선 가까이에 있는 병사들에게 헌혈대의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말라가로 갔던 베쑨은 피난민들의 행렬과 마주치게 된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과 프랑코 장군의 폭격기들이 민간인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하는 것을 목도한 베쑨은 파시즘에 대한 분노를 키워간다. 그리고 그 후 베쑨은 스페인 공화국 군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순회하면서 파시즘에 대해 저항할 것과 스페인 공화국 군을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게 된다. 실제로 그의 연설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다, 지구 반대편 중국으로 그가 연설 활동을 계속하는 동안 일본군이 북경에 대한 진군을 노골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자신의 기득권에만 집착하고 있던 국민당 군은 일본군의 토벌보다는 공산당군을 괴멸시키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이었다(실제로 장개석 정부는 일본에 대항해 국민당 군과 공산당 군이 힘을 합치기로 한 후에도 일본군과 타협해 공산당 군을 위험으로 몰아넣는다). 중국 공산당 군을 돕기로 결정한 베쑨은 우여곡절 끝에 공산단 군의 기지를 찾아가게 된다. 베쑨의 눈에 비춰진 공산군 주둔 지역은 국민당 군이 포기한 손문의 삼민주의를 누구보다도 잘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팔로군(공산당 군의 명칭)은 일본군의 후방인 진찰기 지역(산서성, 차하르성, 하북성이 만나는 지역)에 침투하여 새로운 군사지구를 세워놓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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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곳에서 부상병들의 치료를 위한 병원을 세우기 위해서 나아가 그가 상상하던 사회주의 의료체계를 실행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더불어 그는 실천하는 사회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전선으로 달려 나가 열정적으로 부상병들을 돌본다. 그의 열정은 빠른 시간 내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던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구해내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부상병들에 대한 치료를 계속하던 그는 수술 중 손가락 감염으로 패혈증에 걸리게 된다. 죽어가면서도 그는 팔로군 병사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인다. 그는 사후에도 중국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도 중국 근대사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칭송받고 있다. 오늘날의 의학, 베쑨의 충고 오늘날 인류는 엄청난 의료 기술의 진보를 이뤄냈으며 몇 십 년 전만 해도 치료가 불가능하던 질병을 정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처럼 오늘날의 의사들이 ‘의료기술의 풍요 속에 애정의 빈곤’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의사들(물론 모든 의사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이 환자를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전체적인 유기체로 파악하기 보다는 단지 의료행위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의사라는 직업을 단순히 안정된 직장과 수입의 측면에서만 바로 보는 경향도 강한 것 같다. 최근에 이공계기피 현상과 의대 열풍은 이를 잘 반영해 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베쑨은 스페인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어디를 가도 저는 그곳에서 병자들을 치료 하겠습니다”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기만하고 있지는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스페인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나서야 그러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런 문제의식은 오늘날의 의사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문제의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의 의사들은 환자와 자신, 그리고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기만하고 있지는 않는가? 루돌프 비르흐의 명제 – 의학은 넓은 의미의 사회과학이고 사회과학은 넓은 의미의 의학이다 – 를 기억하라, 그리고 베쑨의 삶을 돌아보라. 의학은 인간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는 포괄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실천이다.



노먼 베쑨 동지는 중국의 항일전쟁을 돕기 위하여 불원만리하고 중국에 왔습니다. 동지는 작년 연안에 와 오대산에서 일했는데 불행하게도 그곳에서 몸을 불사지르게 되었습니다.(중략)

베쑨 동지의 정신은 조금도 이기심이 없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완전한 희생정신과 일에 대한 무한한 책입감을 갖고 모든 동지들과 인민들에 대한 무한한 열정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동지는 의사로서 병을 고치는 데는 전문적이었으며 끊임없이 그의 기술을 완벽하게 하여 팔로군의 의료계통 수준을 높게 하려고 했습니다(중략)

본인은 동지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는 바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 모두 동지를 기념합시다. 그리하여 동지의 정신이 얼마나 깊이 모두를 감동시켰는가를 나타냅시다.

모택동
1939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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