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Korean IN Korea

프랑스 빵집에서 여러 백인 가족들이 빵을 먹고 있는 모습, 중국어 간판이 달린 가게에 들어가자 주인이 중국어로 통화하고 있는 모습, 일본물건만 파는 가게에서 일본인 주부들이 장을 보는 모습.이런 모습을 주위에서 볼 수 있다면 당황스러우면서도 상당히 흥미로울 것이다.그런데 한국에서도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이런풍경을 간직한 거리를 볼 수 있다.

프랑스 빵집에서 여러 백인 가족들이 빵을 먹고 있는 모습, 중국어 간판이 달린 가게에 들어가자 주인이 중국어로 통화하고 있는 모습, 일본물건만 파는 가게에서 일본인 주부들이 장을 보는 모습. 이런 모습을 주위에서 볼 수 있다면 당황스러우면서도 상당히 흥미로울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이런풍경을 간직한 거리를 볼 수 있다. 한남동의 프랑스인 거리 서래마을, 동부이촌동의 일본인 거리, 인천의 중국인거리, 안산의 국경 없는 마을이 그것이다. Part Ⅰ. 인천 속 붉은 색의 행렬, China town

###IMG_0###
패루. 인천 중구와 자매결연을 맺은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가 무상기증한 것으로, 중국 정부에서 다른 나라에 패루를 무상기증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따라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 이 세 항구를 개방했다. 인천항은 1883년 개항되었는데, 그 이후에 1884년 청국의 조계지가 설치되면서부터 중국인들이 현재의 선린동 일대에 이주해 와서 살기 시작했다. 그 이후 선린동과 그 일대를 포함해서 중국인 상권과 주택지가 형성되면서 인천 차이나타운의 전신이 만들어졌다. 오정희의 소설 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현재는 약 500여 명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으며 인천광역시에서 관광자원으로 집중적으로 지원, 개발하고 있다.

지자체의 노력으로 살아난 차이나타운

우리나라는 유일하게 화교들이 완전한 차이나타운을 형성하지 못한 나라다. 최근에 많이 알려진 인천차이나타운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1940년대 이후 화교들의 이탈이 시작되어 1990년대엔 중국집 두 세곳만이 겨우 남아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다시 관광객이 연간 40만명을 넘어서는 등 중흥기를 맞고 있다. 이는 2000년 이후 지방자치단체의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한중문화관, 중국풍의 북성동사무소, 삼국지 벽화 거리 등의 볼거리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평일 200여 명, 주말, 휴일 500여 명에 불과했던 관광객 수가 지난해에는 각각 3천여 명, 1만여 명 수준으로 급증했다. 지자체의 거리 VS 화교의 거리

###IMG_1###
인천시에서 설치한 화려한 가로등과 대조를 이루는 허름한 건물.

물론 차이나타운이 살아난 직접적 이유는 인천광역시의 지원이었지만, 실제로 거리를 거닐다 보면 지자체가 꾸며놓은 인공적인 구조물들과 실제 화교들의 생활상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차이나타운과 관련된 홍보물이나 사이트에는 지자체가 세운 빨간색 기둥 등 여러 구조물과 공자상, 패루, 중국풍으로 꾸민 북성동사무소, 한중문화관 등 인공적 구조물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실상 화교들의 상가나 집들은 패루나 다홍빛 구조물들과 커다란 괴리가 있다. 상가들은 몇몇 만이 빨간색 기둥과 지붕으로 화려하게 치장돼있을 뿐, 대부분은 허름한 건물 구석에 자리해있으며, 손님은 거의 없다. 이름만 풍물백화점일 뿐 안에는 텅 빈 상가들이 허다하고, 그나마 영업 중인 상가들도 사람이 없긴 마찬가지다. 주택의 경우는 상가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차이나타운 안의 주택거리는 70년대 서울의 달동네같은 분위기가 난다. 판자집이나 컨테이너 수준의 주택지가 허다하고, 아파트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건물들도 대부분 단층이나 3층 정도의 허름한 건물이다.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현재 이 거리에 살고 있는 화교들은 대부분 화교 2~3세들이며 약 170여 가구, 500여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차이나타운 내의 중국 음식점이나 전통찻집, 특산품 판매점 등을 운영하고 있고, 몇몇은 중국전통무술인 쿵푸도장이나 중국어학원, 한의원 등을 운영한다. 2000년 이후 지자체의 차이나타운 육성 사업이 진행되면서 중국음식점도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19곳 등 25곳으로 늘었다. 90년대보다는 상권도 많이 발달하고 개업하기도 편해졌지만, 여전히 화교로 살아가는 데 불편함은 상존한다.「외국인을위한봉사회」 간사 신현설 씨는 “차이나타운 내 상담소에 하루에 5~10명 정도가 임금 체불, 가정 문제, 인권 문제에 관련해서 도움을 요청하러 온다”고 했다.※찾아가는 길 : 지하철 1호선 인천역 하차 도보 1분 Part Ⅱ. 서울 안의 몽마르뜨 언덕, 서래마을

서래마을은 1985년 프랑스 대사관의 땅인 이곳에 주한프랑스대사관학교(Lycee francais de Seoul)이 만들어져 프랑스인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KTX사업 등을 비롯해 프랑스 기업들에서 파견된 주재원들이 살고 있다. 현재 약 500명의 프랑스인이 살고 있으며 이는 전체 주한 프랑스인들 중 절반을 차지한다.

프랑스, 프랑스어, 프랑스인

서초동 서래마을을 처음 보는 순간 여기가 서울 안이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주민들이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부르는 길을 사이로 자리 잡은 프랑스풍의 식당들과 가게들, 그리고 이색적인 가로등들은 이곳에 이국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인거리의 패루와 같은 커다란 조형물은 없지만, 거리를 형성하는 주변 조형물들의 조화가 프랑스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서래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마 ‘프랑스어’가 아닐까 싶다. 가게 간판과 교통 안내 표지판은 물론, 버스정류장 표지까지 전부 프랑스어가 병기되어 있다. 길거리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프랑스어도 이곳을 프랑스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 곳에 사는 프랑스인들은 대부분 5년 이내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단기 체류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한국인들과 사귀거나 한국에 대해 배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한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은 서로 도우며 살고 있다. 이곳에 사는 한국인들 중 프랑스에서 유학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봉사대를 만들어 정착한지 얼마 안 된 프랑스인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다. 이에 화답하듯 프랑스인들은 3년째 크리스마스 때 장터를 열어 수익금으로 독거노인들을 대접하고 있다. 프랑스 아이들의 공간, 주한프랑스대사관학교

###IMG_2###
주한 프랑스 대사관 학교 내부

서래마을에 들어왔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단연 주한프랑스대사관학교다. 대형 유리창들이 반짝이는 현대식 건물이 학교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학교 측의 허가를 받아 내부에 들어갔을 때에도 일반적인 한국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와는 전혀 딴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복도가 있고 한쪽으로 교실이 무미건조하게 쭉 붙어 있는 우리나라의 학교와 달리, 다양한 색깔들로 장식된 여러 교실들이 반원형으로 붙어있는 프랑스 학교의 모습은 마치 다양한 문화와 사상이 공존하는 프랑스를 연상케 했다. 학교 관계자인 권인숙 씨에 따르면 학교에는 초,중,고 과정이 모두 갖춰져 있지만 서래마을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이 대부분 단기 체류자여서 고등학생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찾아가는 길 : 지하철 2호선 서초역 6번 출구로 나와서 마을버스 13버을 타고 서래마을 입구에서 하차. Part Ⅲ. 서울안의 일본인 ‘은거지’, 동부 이촌동 일본인 거리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인들이 대거 한국에 거주하게 되었다. 마침 동부이촌동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고 특히 1970년대 한남동에 외인아파트가 만들어지면서 일본인들이 자연스럽게 동부이촌동 근처로 모이게 되었다. 1994년 외인아파트가 없어지면서 일본인들이 대규모로 동부이촌동으로 옮겨왔다. 현재 5000여명의 일본인들이 산다고 한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리틀 도쿄’

‘일본인 5000명 거주지’, ‘리틀 도쿄’. 동부이촌동의 일본인 거리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혹여 이런 말들을 듣고 동부이촌동에 가본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서래마을과 달리 동부이촌동의 일본인 거리는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일본인 거리라는 것을 알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IMG_3###
어느 부동산의 모습 – 일본어로 설명된 것이 흥미롭다

5000명이나 되는 일본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이곳에서 일본인이나 일본어 간판 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기자가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계절인 겨울에 찾아간 것도 이유일지 모르지만, 서래마을에 비해 일본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기는 어려웠다. 부동산들에 써 있는 일본어 단어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일본식 선술집이나 음식점들을 빼면 이곳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날씨가 춥지 않을 때에는 학교 가는 일본인 아이들과 자전거 타는 일본인 남자들, 그리고 장을 보는 일본인 아줌마들을 볼 수 있다고. 흔히 볼 수 없는 1층으로 작은 상점들이 연이어 있는 모습도, 일본에서는 손쉽게 볼 수 있는 형태의 상가라고 한다. 일본인 거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일본식 선술집이나 음식점들, 그리고 일본 식료품 전문점에서였다. 일본에서 만든 식품을 전문적으로 파는 상점은 물론이고 허름한 선술집에서조차 하얀 모자를 쓴 일본인 요리사들이 일본어로 대화하는 모습은 매우 이채로웠다. 일본 식료품전문점 ‘모노마트’ 점장 김강숙 씨는 “이 곳은 다른 곳과 달리 일본 상점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퍼져있다. 그래서 처음 오시는 분들은 일본인 거리를 느끼기 어렵지만 이곳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일본인거리”라고 자랑했다.※찾아가는 길 : 지하철 4호선 이촌역 4번 출구로 나와서 동부이촌1동 중심의 아파트 단지와 상가단지 주변.Part Ⅳ. 신은 국경을 만들지 않았다, 안산 국경없는 마을

중국, 인도네시아, 네팔, 몽골 등 20여개국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거리를 채우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부터다. 인근 시화공단과 반월공단에 입주한 3D 업종들이 한국 근로자 구인난에 시달리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또 97년 IMF 경제 위기 이후 한국 업체들의 계속되는 부도로 한국근로자들이 떠나면서 빈집이 늘어나서, 공단과 가깝고 월 20만원 안팎의 값싼 주거지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이게 된 것이다. 현재 이 곳에 거주하고 있는 6만여 명 중 한국인은 1만 6천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외국인으로 추정된다. 외국인노동자 중에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고, 그 다음은 인도네시아이며, 태국,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이 나머지를 구성한다.

‘진짜’ 외국인 거리, 국경 없는 마을

사실 앞에 언급한 거리들은 외국인거리라고는 해도 한국인이 훨씬 많고 한국의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이국적인 풍취는 느낄 수 있었지만 ‘외국에 온 것 같다’는 느낌은 받기 어려웠다. 반면 국경 없는 마을에는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상점 혹은 식당에 외국어로 명기된 상품이나 음식이 많이 배열되어있다. 또 거리를 걷는 이들도 대부분 외국인들이다. 검은 피부의 외국인들이 지나가고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이들이 지나가서 한국인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들의 입에서 중국어가 튀어나온다. 이런 상황이기에 이 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오히려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몇몇 식당이나 전문 상점 뿐 아니라 거리 전체가 외국인에 의한, 외국인을 위한 곳이었다. 거리를 걷다보면 인도네시아나 우즈베키스탄, 또 몽골 등 여러나라의 음식이나 물품을 파는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IMG_4###
국경없는 마을의 한 거리. 오히려 한국인이 이방인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 곳은 다른 외국인 밀집 거주지에 비해 입주나 생활이 편한 편이다. 물론 처음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원곡동에 유입될 때는 지역 주민들의 반발도 많았다. 하지만 99년 이 거리가 ‘국경없는 마을’로 재탄생하면서 외국인들도 주민 자치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에 소통의 계기가 생겨 서로 불편한 점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며 마음의 담을 허물었다. 현재 지역 주민들은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한 존재임을 긍정하면서 한 발 더 나아가 불법체류자 단속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까지 벌였다. 또한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고 지역 주민들과도 교류할 수 있는 각종 행사가 정기적으로 열리는데, 설날 축제, 4~5월에 열리는 안산월드컵 대회등이 그것이다. 지역 주민들이 외국인노동자를 수용하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기는 하지만 지역 주민의 수용은 외국인노동자의 현실 상황에 충분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지역 주민과의 융화에도 불구하고 이들 외국인노동자에게는 임금 체불, 폭행 등 노동, 인권 문제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상존하는데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아동 영주권 취득 문제이다. 아동의 경우 5년 이상 체류를 해야 영주권이 나오는데, 현재 우리나라에는 합법적으로 5년 이상 체류할 수 있는 비자가 없다. 그래서 이 곳에서 태어난 아이는 신분증이 없어 교육도 받을 수 없게 되고, 자연스럽게 게토를 형성하고 할렘으로 유입되곤 한다. 물고기에게 국경이 있나요, 다양성이 키워드

###IMG_5###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정책국장 김용태 씨

이 마을의 중심에는 바로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가 있다. 이 센터는 94년 원곡동에 산재하는 외국인노동자를 돕기 위해 박천응 목사가 설립한 것인데, 99년 이 거리를 ‘국경없는 마을’로 지정하고 Kosian (한국에 사는 아시아의 외국인들)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 센터의 정책국장 김용태 씨는 국경없는 마을의 모토가 국경없는 평화, 인권, 노동, 공동체라고 말한다. “국경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물고기나 새에게 국적을 강요할 수는 없지 않느냐”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문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 마을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했다. ※찾아가는 길 : 지하철 4호선 안산역에서 하차 → 지하도를 건너서 좌측 출구 → 광장약국골목을 따라서 300m주변『서울대저널』의 취재 대상이 된 네 곳, 서래마을, 동부이촌동, 인천차이나타운, 안산 국경없는 마을은 모두 어떤 곳에 있건 언제 생겼건간에 우리나라에서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한국인이 ‘외국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내에 있는 이러한 외국인거리들은 우리나라의 포용력과 다양성의 잣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안타깝게도 불법 체류자 단속 등으로 인해 이런 거리들의 형성 움직임은 물론, 현존하는 거리의 활기까지 사그라들고 있지만 한국에서 자국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을 만나보고 싶다면, 지금 한 번 외국인거리로 나가보는 것이 어떨까.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무함마드 풍자만평, 무슬림들은 왜 분노하는가

Next Post

다수 속의 소수, 중국의 소수민족을 조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