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동안 참 많은 싸움이 있었고, 많은 아까운 목숨들이 하늘나라로 갔다. 그러나 웃음을 되찾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 기껏해야 기륭 노조의 10여명 정도. 이런 상황에서도 지치지 않고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두리반, 콜트의 사람들은 가히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전투적이라거나, 위대하다든가 하는 수식어 보다는 ‘아름답다’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단순히 문화투쟁을 해서가 아니다. 이들의 투쟁력이 약해서도, 이들의 투쟁이 위대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다만 이들의 투쟁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두리반과 콜트의 투쟁이 처음으로 나의 흥미를 끌게 된 것은 그 곳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살펴보면서였다. 처음에는 그곳들이 내로라하는 인디밴드들의 무대가 이어지는 공연장인줄만 알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문화 연대차원의 공연이었던 것이다. 집회에서 민중가요를 부르시는 민중가수는 종종 봤지만,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인디밴드가 어떻게 그곳에 갈 생각을 했을까. 처음 보는 형식의 공연이었기에 무척이나 신기했다. 투쟁과 파업은 한국에서 늘 당사자들만의 문제였다. 그러나 요즘의 문화연대는 투쟁과 파업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적이지 않은, 최소한의 윤리는커녕 법조차도 지키지 않는 거대기업의 횡포에 살이 베이는 것은 무단해고를 당한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그 악기를 연주하며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뮤지션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 악기로 연주된 음악을 듣는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시에 정규직으로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은(물론 서울대는 예외일 수도 있다만…), 노동자의 권리를 말할 수 조차 없을 우리 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 번만 더 생각하면, 이건 절대 남의 문제가 아니다. 너와 나의, 그래서 우리의 문제이다. 그 곳의 무대를 채우는 사람들은 두리반의 철거민들과, 콜트의 노동자들과 공감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참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있는 사이였다. 그렇기에 돈도 권력도 없는 인디밴드이지만, 무자비하게 노동자들을 내치면서 만든 콜트의 악기는 사용할 수 없었고, 매정하게 두리반을 철거하려는 사람들에 맞서 그 소중한 공간에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두리반과 콜트의 싸움을 지키는 자들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던져 고민을 말한다. 그 사람들은 너의 문제가 너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가 나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임을 가장 여실히 드러내주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우리에게 가장 잘 와 닿도록 ‘노래하며 춤추고’있다. 두리반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머무르며 행사들이 진행된다는 것 자체가, 콜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투쟁인 것이다. 큰 희생과 노력을 들여서 거창한 것을 만들어 내지 않아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더라도, 사회에 파문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에 이들은 아름답다. 두리반은 ‘그저 와서 노는 곳’임에도 그 어느 곳보다 투쟁력이 강한 곳일 수밖에 없다.이들의 삶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너희의 삶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고. 너희의 삶을 통해서 어떻게 말 할 것이냐고. 필자는 대학생들의 삶을 통해서도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전공인 국문학도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에서의 투쟁을 이야기한다면, 소위 참여문학이라고 7~80년대의 문학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반드시 강경한 필체와 투쟁의 메시지를 담고 있을 필요는 없다. 문학은 언제나 그 시대가 당면한 현실의 고민을 녹여내는 통로이기 때문에, 현대 사회의 소외문제를 고민하는 요즘의 소설들이어도 된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투쟁이라는 것을 안다면, 현대의 소설을 통해서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속한 반공동체는 어떻게 말할지에 대한 해결책에 대한 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반에 있는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의 고민을 옮겨 놓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고민이 우리의 고민이 되는 작은 출발점에서부터, 다양한 행동들이 뿜어져 나올 수 있다. 올 봄에는 콜트의 노동자들과, 홍대의 인디밴드들과 연대 장터를 기획해보는 것은 어떨는지. 학교에서 인디밴드들이 공연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 주고, 그들의 후광을 등에 업고 높은 매출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수익금을 전달해 주는 것을 넘어서, 그들에게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생각에 노동자들은 더 힘이 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삶 속에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노래하듯 일하고 춤추듯 투쟁하는 그들이 아름다운 이유.
작년 한 해 동안 참 많은 싸움이 있었고, 많은 아까운 목숨들이 하늘나라로 갔다.그러나 웃음을 되찾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기껏해야 기륭 노조의 10여명 정도.이런 상황에서도 지치지 않고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두리반, 콜트의 사람들은 가히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이들은 전투적이라거나, 위대하다든가 하는 수식어 보다는 ‘아름답다’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단순히 문화투쟁을 해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