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회의록

삭풍이 몰아치는 어느 겨울날, 마침 서창에 곤히 든 잠에 청산을 찾아서 한 곳에 다다르니 흰 구름 푸른 수풀 사이에 현판(懸板) 하나가 달렸더라.자세히 보니 다섯 글자를 썼으되 ‘화폐회의소’라 하고 옆에 문제를 걸었는데, ‘유로(劉虜)를 논박할 일’이라 하였더라.이에 기이하게 여겨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람이 수없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더라.

삭풍이 몰아치는 어느 겨울날, 마침 서창에 곤히 든 잠에 청산을 찾아서 한 곳에 다다르니 흰 구름 푸른 수풀 사이에 현판(懸板) 하나가 달렸더라. 자세히 보니 다섯 글자를 썼으되 ‘화폐회의소’라 하고 옆에 문제를 걸었는데, ‘유로(劉虜)를 논박할 일’이라 하였더라. 이에 기이하게 여겨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람이 수없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더라. 회장인 듯 보이는 자의 몸은 S라인이요, 얼굴에는 세로로 크게 두 줄이 나있었는데 회장석에 올라서서 한 번 읍하고, 위의(威儀)가 엄숙하게 딱 서서 여러 회원을 대하여 하는 말이, “시간이 다 되었소. 내가 여러분을 청하여 만고에 없던 일대 회의를 여니 그 뜻이 이러하오. 대저 우리들이 쓰는 이 유로라는 돈은 당초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들었으니 모든 생물로 하여금 서로 막힘없이 통(通)하게 하려함이었소. 한데 지금은 서로 사정이 다르고 경제가 도탄에 침륜(沈淪)하였으니, 이의 존폐를 논의코자 하오”하였다. 이에 제일 앞에서 희랍(希臘)의 드라크마가 일어나 뽐내며 말하길 “작금의 위기는 쉬이 극복될 것이 아니니 본인은 유로를 폐(廢)하고 뜻을 달리하여 다른 통화를 만들고자 하오. 비록 우리가 처음에 품었던 대의(大義)가 고상하여 이를 따랐으나 이제 시절이 하수상하니 만부득이(萬不得已) 하오이다”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덕국(德國)의 마르크가 노(怒)하여 말하길 “저자가 이처럼 갖은 핑계를 대고 나에게 돈을 꾸어가고 갚지 않으니 이를 별러온 것이 여러 해요. 매일 태만하고 일하지 않아 근심이 컸는데 이제는 아예 돈을 다르게 하여 갚지 않겠다 하니 내 이를 두고 볼 수 없소”하며 갈(喝)하였다. 이를 보고 있던 이다리(利多利)의 리라가 말리며 말하길 “드라크마가 본시 돈을 갚지 않고자 뜻을 품은 것이 아니라 때가 난세(亂世)인지라 잠시 정신이 혼미(昏迷)하여 저러는 것이니, 그대가 참는 것이 옳소”하고 말을 보태니, 마르크가 답하길 “당신의 처지가 드라크마와 난형난제(難兄難弟)하니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가 보오. 허나 저자의 무뢰함이 하늘을 노하게 하고 인시(人時)를 어지럽히니 참을 수 없소”하며 냉소(冷笑)하니, 리라는 얼굴이 벌개지면서 유구무언(有口無言)이더라. 영길리(英吉利)의 파운드가 “옛 말에 이르길 화폐를 같이하면 일국이 곳간을 비워 백성을 구제하고자 해도 서로 막힘이 없으니 그 효과가 흩어져 사라지고, 타국의 물가가 앙(昻)하면 아국의 물가도 따라 올라 그 폐해가 극심하다 하였다. 하여 본인은 화폐를 달리 유지하였으니 그 뜻은 환란(患亂)에 대비함이라. 이제 저들이 이 이치를 궁(窮)하여 이시비(利是非)를 통해 뜻을 모은다면 이 곤(困)함을 쾌도난마(快刀亂麻)하리라”하였다. 곁에서 이들의 논의를 지켜보던 노서아(露西亞)의 루불과 화하(華夏)의 위안이 말하길 “지금은 때가 서로 통함이 드물고 다툼이 그치지 않아, 돈 보다 자원이 중하다. 저들이 저리 다투어보아야 정저지와(井底之蛙)에 불과하니 어찌 가소롭지 않으리오”하며 거드름을 피우니 갑자기 좌중이 조용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더라. 이에 단상 위에 있던 회장 달라가 “오호! 통재라. 고시(古時)에는 서로 사맞디 아니하는 일을 피하고자 협약을 맺고 돈을 일통(一統)하였으나, 시절이 변하여 작금(昨今)에는 각자 자기의 이익을 탐하기 바쁘니 누가 큰 뜻을 이룰 수 있으리오. 이처럼 천지가 개벽함과 같이 일변(一變)하였는데도 우둔한 몇이 여전히 나와 통(通)하는 일에 힘쓰니, 여(余)는 기쁘나 그들의 우둔함을 알겠노라”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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