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

“본인은 사회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는 인간의 건·전·한 상식이 선택하는 자랑스런 칭호입니다” 1990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사건 관련자 윤철호씨의 법정 최후진술에서 사회주의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무조건 친북세력으로 매도되며 사회로부터 매장당해야만 했던 한국 사회에서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공식적으로, 그리고 당당하게 인정하던 이가 등장한 것이 고작 10여년 전의 일이다.

“본인은 사회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는 인간의 건·전·한 상식이 선택하는 자랑스런 칭호입니다” 1990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사건 관련자 윤철호씨의 법정 최후진술에서 사회주의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무조건 친북세력으로 매도되며 사회로부터 매장당해야만 했던 한국 사회에서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공식적으로, 그리고 당당하게 인정하던 이가 등장한 것이 고작 10여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 2001년 8월, 우리 사회는 야당 정책위의장의 발언을 기점으로 ‘사회주의’라는 화두를 가지고 또 하나의 논쟁을 만들어가고 있다. 낡은(?) 사회주의식 정책 분단현실 속에서 한국 사회의 폐쇄적인 이데올로기 지형에 갑갑함을 느끼고 있던 많은 이들에게 최근 언론의 한켠에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사회주의 논쟁은 각별한 관심을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왜냐하면 기존의 ‘무조건 색깔 입히기’와 그에 대한 ‘일단 아니고보자’ 는 구차한 방어라는 구도와는 다른 양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7월말 김만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김대중 정부와 정책에 대해 ‘낡은 사회주의식 정책을 추진하는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 정권’, ‘DJ정부가 내세우는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자들이 장사가 안되니까 시장기능을 가미한 것’이라며 공세를 편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재무장관으로서 국제그룹의 해체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거나, 지난해 10월 청와대 간담회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요구했던 일 등 개인적인 이력을 돌이켜보면 그의 주장이 다분히 색깔론에 기댄 정치공세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논리를 따라 김대중 정부의 국가개입을 좌익이고 사회주의라 한다면, 똑같은 잣대로 박정희 정권은 공산주의란 말이냐”며, 색깔론 제기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야당의 정책위의장 발언치고는 너무나 유치하다는 손호철 교수의 비판은 충분히 공감이 가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발언은 이른바 ‘용공’이나 ‘좌경’처럼 극단적인 칭호로만 불려오던 ‘사회주의’의 실명을 복권시키며 논쟁구도를 변화시킨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좌’가 ‘우’ 압도하는 시대라? 사회주의 이념 논쟁은 늘 그러했던 것처럼 수구언론과 그 이데올로그들의 이념 덧씌우기 공세에서 시작하였다.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은 지금의 한국사회를 ‘좌우 이념대립의 시기’로, 게다가 위험천만한 ‘좌’가 ‘우’를 압도하고 상황이라며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아울러 내용이 무엇이건간에 결국엔 그저 사회주의적 발상이기 때문에 그르다는 극우적인 주장도 산발적으로 제기된다. 이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반응 역시 예상대로다. 진념 부총리가 한나라당에 ‘정부 정책에 대해 제발 사회주의라는 말은 쓰지 말아달라’고 주문하였고, 민주당도 ‘지난 세기말을 마지막으로 무덤의 관 뚜껑을 두껍게 닫아버린 사회주의와 냉전의 유령’을 한나라당이 꺼내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이념 논쟁이 생산적으로 흐를 수 있다면 그것을 경원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치관에 자유로운 논의와 자유로운 경쟁, 그를 통해 올곧은 평가를 받는 것은 사회발전을 위한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좌파에 대한 우파의 폭력적인 지배가 관철되어왔고 또 관철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지형의 고려한다면 구체적인 정책과는 동떨어진 이념 논쟁만은 별 소득이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구체적인 정책을 놓고 그것의 지향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회주의적 발상으로 지목되고 있는 김대중 정부의 정책들은 무엇일까? DJ노믹스, 신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거칠게 살펴보자면 언론개혁이나 사립학교법 개정과 관련하여 소유과 경영의 분리를 강제하고 있는 것을 통해 드러나듯이 사적소유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 노사정위원회의 운영, 국민기초생활보장제, 건강보험의 통합, 의약분업, 국민연금제의 실시와 관련하여 국가가 자신의 간섭영역을 지나치게 넓히려 한다는 점이 사회주의적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기업의 부채비율이나 자기자본비율, 사외이사 의무비율을 지정하고, 빅딜 정책을 수행하는 등의 기업규제 역시 시장경제 원리에 역행한다는 점에서 모두 사회주의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사적소유가 남용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견제도, 노자의 극한대립을 막기 위한 정부의 중재도, 공동체 유지를 위한 사회안정망의 도입도 사회주의적 발상이기에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에 대해, 혹 필자가 거칠게 정리하다보니 그네들의 견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류의 주장은 앞서 언급했듯이 사회주의적 발상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르다는 그런 알량한 수준 이상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회주의 이념과 실천방식에 대한 비판의 근거와 논리를 제대로 제시한 글은 찾을래야 찾아볼 수도 없다. 논점을 다소 벗어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 김대중 정부의 정책방향은 개략적으로 중도노선으로 이해하는데 합의가 되는 것 같다. 좀 신랄하게 이야기하면 잡탕노선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복지정책이 일천한 한국사회에 그것을 도입했다는 정도의 진보성을 제외한다면, 전체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메커니즘의 내재화에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의 대표적인 논객인 황태연 교수가 현 정부의 시장철학을 사회주의, 케인스주의, 관치경제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명한 대립성을 보이는 중용노선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시장만능주의의 만연 물론 알량한 이념공세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는 수구 논객들의 견해보다 조금 세련된 것이 이른바 시장주의자들의 견해다. 그들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라는 관점에서 사적소유권에 대한 절대적인 옹호, 시장메커니즘을 통한 자원분배 및 가격의 결정만이 유일한 대안이라 주장한다. 시장메커니즘의 절대적 우월성을 신봉하는 이들에게 그 외의 다른 방식은 반시장적인 것이고 사회주의적이므로 틀리게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기본원리만을 잣대만으로 복잡다단한 현실정책을 단순화하여 비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미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시장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정부의 개입의 불가피성과 정당성은 증명된 바이다. 또한 대다수 민중의 삶에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파탄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공동체적 실행은 그것이 사회복지라 불리건, 케인스주의라 불리건간에 지구상에 실재해오고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심화되어가는 삶의 질의 불평등이나, 자신의 무정부성, 불확실성을 더욱 키우고 있는 시장에 대해 다수의 삶을 위한 치밀한 계획에 바탕을 둔 프로젝트가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인정할 수도 없다. 과연 사회주의는 사회악인가 사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가 악의 화신인 양 치부되는 것은 결코 그 지향가치와 실현방안에 대한 어떠한 실험이나 평가를 통해서가 아니다. 민족적 비극을 간직하고 있는 분단 현실 속에서 친북논리에 따라 일방적으로 매도되었던 상황, 구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실험이 실패로 귀결된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일 뿐이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변화되어 가는 상황은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비판되지만, 우선은 그것이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변질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미 실패한 것이라는 주장은 너무나 섣부른 것이다. 건전한(?) 자유주의자에게 무조건 수구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역시 그간 실패한 실험만을 가지고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자본주의가 자신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타협적인 요소들을 도입하듯이, 사회주의 역시 언제든 자신의 체제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열린 공간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료화된 조직체계를 좀더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원칙에 맞도록 극복해가는 것,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것을 제도적으로 분권화시켜가는 것, 일률적인 계획의 비효율성을 제거하기 위해 개방적인 틀을 갖추는 것 등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정작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체제가 지향하는 핵심적인 가치가 무엇이며 그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그런 면에서 사회주의는 사회악도 아니요, 역사의 심판이 끝난 체제도 아니다. 국가보안법과 좌파의 공존 좌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는 시대라고, 이 시기만 지나면 국민들이 다시는 좌파를 선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서슴지않고 나올만큼 한국사회는 아직도 사상적으로 폐쇄적인 사회이다. 북한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만경대 정신’이라는 표현만으로도 경기어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어찌보면 사상의 자유를 옥죄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살아있는 한 한국 사회에서 좌파란 애시당초 존재할 수도 없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논리가 사상시장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에 앞장서야 하는건 아닐지. 아울러 다양한 이념에 대해 생산적인 논쟁이 가능한 정치구도를 만들기 위해 진보정당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도 열릴 필요가 있다. 이미 헌법재판소가 지금의 비례대표제에 위헌적인 요소가 있다고 판결한 만큼 전국적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여 더 이상 일인 보스 중심의, 지역구도 중심의, 보수색채 일색의 정당구조에서 벗어나 이념대결, 정책대결이 가능한 구조가 열려야 사회주의에 대한 발전적인 논의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소, 당신도 사회주의자요” 사회주의 논쟁을 거치며 ‘사회주의자’의 커밍아웃(?) 소식이 종종 들린다. 사회주의에 대한 즉자적인 매도가 황당한 만큼 그에 대한 막연한 옹호의 논리 또한 빈약해 보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체제에 대한 전망을 바탕으로 자본이 아닌 ‘노동’과 ‘인권’의 가치를, 경쟁이 아닌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개발의 논리가 아닌 ‘환경’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사회주의의 지향이라면 바로 당신이 잠재적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우리’가 이 사회에서 다수는 아닐까? 그렇다면 대안을 향한 모색으로서의 사회주의 정신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그를 향한 실천 역시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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