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 많은 한반도의 현대사는 대학의 학생사회에 적건 많건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군사정권이 사회의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을 때,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이 살기 어려웠던 그 시절에 대학생들은 가만히 강의실에 앉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가 민주화되고 경제가 안정적으로 되면서 학생들을 큰 줄기로나마 엮이게 해주었던 정치적 지향점은 그 밖의 다른 관심사의 영역들로 분화되었다. 90년대 초반부터 이러한 현상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며 그에 따라 95년의 38대 총학생회는 새로운 학생회의 상(像)을 정립해야만 했다. 제 38대 총학생회 선거에는 다섯 개의 선본이 출마하였는데, 역시 선거의 핵심 쟁점은 ‘학생회 위상 재정립’에 관한 부분이었다. 기존의 중앙집중적인 총학생회는 다각화된 학생들의 관심사를 구현해낼 수 없는 명확한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당시 출마한 선본들은 학생회의 대안으로 강한 학생회, 센터네트, 계열학생회, 자치위원회 구성 등을 제안했다. 그 중 당선된 선본(김태식·박범용)은 ‘더 많은 표정, 우리세대 진보의 뿌리내림’이라는 모토 아래 과거의 중앙집중식 총학생회를 벗어나 학생사회의 수평적·상호적 연결을 시도했다. 실무부서를 국·실의 체계가 아니라 위원회로 만들었던 것이다. 38대 총학생회장 김박태식 씨의 말에 따르면 그러한 새로운 체계는 상당히 혁신적이었다. 기존처럼 총학생회-단대학생회-과학생회 체계아래 중앙집중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의 사안에 따라 관계된 사람들을 엮어내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원리는 참신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위원회가 구성되고 상호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모양으로든 학생들의 ‘움직임’이 있어야 했지만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고 철저한 준비와 연구가 전제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photo1무효표와 기권표가 유례없이 나타난 94년의 38대 총학생회 선거는 총투표율 55%에서 알 수 있듯이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학생회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이미 아니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70, 80년대부터 가져온 정치적 인식만큼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음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94년 선거가 끝난 직후 대학신문과 총학생회선거관리위원회가 학생 281명을 대상으로 ‘총학생회선거에 대한 학생인식’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였는데, 각 선본의 정책 및 공약 내용 중 제 1순위로 관심을 가졌던 영역을 묻는 질문에 대해 후보들의 시대인식 및 현실인식(47%)과 학원개혁(17%)순으로 응답했다. 또 두 번째로 관심을 가졌던 영역은 많은 응답자가 학원개혁(26%)과 학생회상(23%)이었다고 밝혀 대체적으로 1994년 당시의 학생들은 시대인식에 기반한 학원개혁추진 방안과 학생회 운영방식에 대한 후보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90년대 초중반은 학생들의 총학생회에 대한 무관심이 점차 문제화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어 사상 초유의 ‘3월 재선거’가 치러진 2003년의 제 47대 총학선거는 학생들의 무관심이 위험수위에까지 다다랐음을 보여줬다. 2004년에 치러진 48대 총학생회는 재선거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 며칠간의 연장투표를 거쳐서야 겨우 투표율 50%를 넘길 수 있었다. 이러한 학생들의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생활과 밀접한 사안들을 공약에서 제시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운동권’인 전국학생연대회의 계열인 48대 총학생회의 공약을 살펴보면 학생들의 생활과 밀접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학점취소제, 강의평가 블로그 등 학생들의 이목을 끌만한 공약이 눈에 띈다. 운동권은 정치적인 주장만 하고 비권은 복지공약만 내세운다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벗어나 학생들의 관심사를 외면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듯하다. photo2지난 10년간의 총학생회의 역사는 학생사회의 다각화되는 관심사와 기존 학생회의 한계점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새로운 실험과 시도들,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시도와 노력의 연장선상에 지금 48대 총학생회가 서있다. 아직 반년 넘게 남은 임기 동안 그들이 애초에 계획했던 구상들을 부지런히 진행하여 2005년이 끝날 즈음엔 학생사회와 학생회의 간극이 한발자국 좁혀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