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동 이발사’라는 영화를 보면 청와대 경호실장이 이런 구호를 송강호에게 외치게 한다. “각하는 국가다.” 이 말처럼 한국의 군사독재의 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 단어가 또 있을까. 그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많은 예가 있겠지만 시민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하는 상황만큼 이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국가를 지킨다는 그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젊은이들은 사실 한국 현대사에서 ‘각하’를 지키기 위해서 더욱 많이 이용돼왔다. 그때만 해도 둘은 같은 거였으니까.군인이 시위진압을 하게 된 사연그러나 헌법 제 77조 1항은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국가비상상태에서 선포하는 계엄이 아니라면 군대를 대민치안에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계엄선포라는 대통령의 권한이 남용돼서 나라 지키라는 군대가 시민들에게 총을 겨눈 역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나라지만, 그래도 군대가 민간인과 부딪히는 것은 계엄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군사독재 정권이라도 늘 계엄을 선포해 군대로 반정부 시위를 막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고, 내부적으로는 군을 움직이기 위해서 미국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1968년 1월 21일, 남파 무장간첩인 김신조 외 30명이 청와대 뒷산까지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정권에게도, 사회적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영화로 유명해진 실미도 684부대도 이러한 배경에서 만들어지게 되는데 정권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군대의 인력을 안정적으로 정권유지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게 된다. 1970년 12월 31일 제정된 ‘전투경찰대설치법’이 바로 그것인데, 명목상으로는 대간첩작전을 위한 전환복무를 규정한 법이었지만 사실 지금까지 전투경찰이 대간첩작전에 사용된 역사는 없다. 이후 전투경찰은 ‘작전전투경찰순경’(1976년 9월 1일 창설)과 ‘의무전투경찰순경’(1982년 12월 31일 창설)으로 분화되고 업무 영역도 범죄예방· 순찰·교통 등 치안보조 등으로 확대됐지만, 이들 모두의 주된 역할은 초기와 마찬가지로 시위진압이었다. 이러한 전·의경은 현재 4만 명 수준으로 전체 경찰인력의 2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현역으로 입대를 해서 무작위로 착출 당하는 전경과 지원입대이지만 사실상 대체복무로 군복무를 갈음하는 의경 모두 엄연한 군인이다. 그동안 국가는 군복무가 조국과 민족을 위한 희생이며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다고 독려해 왔지만, 사실상 5만 명의 젊은이들을 국가안보와 전혀 상관없는 일에 빼돌려왔던 것이다. 이처럼 계엄 상황도 아닌데 군인을 일상적으로 대민간인 작전에 투입하는 국가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다. 또한 시위진압이라는 업무의 특성상 실제 민간인들과의 물리적 충돌이 빈번함에도 불구함에도, 군대식 규율과 훈련을 받은 20대 초반의 전·의경을 시위현장에 투입하는 것은 폭력적 진압의 원인으로 지적돼 왔다. 전·의경의 과잉진압에서 비롯된 수많은 사상자가 이를 증명한다. 또한 이처럼 저렴한 인력을 바탕으로 시위인원대비 평균 1.3배나 되는 수준으로 경찰력이 동원되고 있다. 100명이 시위를 하면 130명이 동원되어서 이를 막는 셈인데 그야말로 인해전술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집회광경의 특징인 새까맣게 덮여있는 헬멧의 배경이다.이러한 문제점은 사실상 꾸준하게 지적되어왔다. 그렇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선공약으로 ‘의무전투경찰을 정규경찰로 대체’하는 것을 제시한 바 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대체복무제를 사회복무제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전투경찰제도를 폐지하겠다고 결정하기도 했다. 경찰의 인력 공백의 우려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것이야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대체할 지를 논의해서 해결할 문제이며, 군인을 가져다 쓰지 않으면 치안공백이 생긴다고 걱정하는 상황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과 함께 취임한 어청수 경찰청장은 2012년까지 전·의경을 완전 폐지하겠다는 방침에 반대하며 1만 5천 명에서 2만 명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어청수 청장의 면모를 볼 때 줄이는 것도 어디냐고 하겠지만, 이 문제는 줄여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원칙의 문제다. 전쟁시에도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군인의 공격은 전쟁법 위반이다. 계속 20대의 젊은이들이 시민들을 향해 방패와 진압봉을 잡고 돌진해야 하는 비극이 이어져야 하는 것일까?더디지만 무거운 양심의 걸음들1991년 4월 26일, 당시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 씨는 전투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고 숨졌다. 이 비통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5월 4일, 당시 전투경찰로 복무하고 있던 박석진 씨는 이러한 상황이 더 이상 지속돼서는 안 된다는 결심을 하고 “정권의 방패막이인 전투경찰대를 해체할 것”을 요구하며 양심선언을 했다. 당시 그는 시위진압이 헌법에 규정된 국방의 의무라고 인정할 수 없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헌법재판소는 5대 4로 전투경찰대설치법이 ‘국방의 의무’를 벗어나지 않는 합헌임을 선언한다. 아슬아슬한 합헌이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전·의경제는 유지됐다. 전·의경제가 존재하는 상황 하에서 또 다른 박석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이다. 2008년 5월, 거대한 촛불이 거리를 덮어갔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91년 당시 노태우 정권이 젊은이들을 앞세워 그들과 똑같은 젊은이들에게 쇠몽둥이를 내리치게 했다면, 정권이 변하고 변한 이명박 정권에서도 징집된 청년들이 가장 앞에 서서 그 촛불들과 대치해야 했다. 강경대 열사의 죽음이 박석진의 양심을 움직이는 가장 직접적인 힘이었다면, 2008년의 촛불집회는 이계덕과 이길준이라는 두 전·의경의 양심을 움직였다.현역 전경이었던 이계덕 상경은 촛불집회 진압이라는 정치적 행동에 자신이 속하게 되는 것을 반대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국방의 의무를 넘어선 것이라고 주장하며 육군으로의 전환복무를 요구했다. 경찰은 그에게 연이은 징계를 내리면서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했고, 일부러 온갖 빌미를 잡아서 고발하는 파렴치한 행위까지 했다. 이에 국가인권위원회는 긴급구제 결정까지 내렸고, 결국 지금은 육군과 가장 비슷한 환경에서 복무할 수 있도록 부대를 옮겨놓은 상태다.5월 31일과 6월 1일, 거대한 인파가 유래 없이 비폭력을 외치며 청와대 앞에서 밤을 새웠된 그날, 정권은 물대포와 강경 진압을 선택했다. 그 속에 이길준 이경이 있었다. 6월 1일 광화문까지 시위대를 밀어내고 나서 그는 자신의 인간성이 하얗게 타버린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이길준은 이후 계속되는 촛불시위 속에서 더욱 더 진지하게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이후 거리에 서 있으면서 헬멧 속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당장 옷을 벗고 그들과 같이 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오랜 고민 끝에 결심했고 촛불집회 특별 휴가를 나온 7월 25일, 부대에 복귀하지 않았다는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부모님이 필사적으로 기자회견을 막았기에 그날의 기자회견은 연기됐지만, 결국 이길준 이경은 부모님을 오래 설득한 끝에 이틀 후 27일 “진압의 도구에서 양심의 주체로”라는 이름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진압작전에 동원될 때도, 기약 없이 골목길을 지키고 있어야 할 때도, 시민들의 야유와 항의를 받을 때에도 아무 말 못하고 명령에 따라야 하는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근무시간이 늘어나고 육체적으로 고통이 따르는 건 감수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제가 하는 일이 대체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인가를 생각하면 더 괴로워지더군요. 누구도 그런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서라면 갓 스물의 젊은이들이 폭력적인 억압의 도구가 되어도 괜찮은가요? 그런 정당성은 누가 보장해주나요?” – 이길준 소견문 ‘나는 저항한다’ 中 |
이후 그는 ‘전의경제 폐지’를 걸고 농성을 시작했고, 자신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자신은 현행법을 어겼을지는 몰라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지켰기에 당당할 수 있다며 검찰에 자진출두했다. 현재 그는 성동구치소에 수감돼 있으며 이후 전의경제도가 위헌임을 재판과정에서 주장할 계획이다.이제는 폐지해야 할 때폐지되지는 않지만 조금 줄어드는 전·의경의 공백을 채운다고 경찰청은 얼마 전 요란하게 경찰기동대 창설식을 가졌다. 대테러진압부대를 연상시키는 베테랑들은 고난이도의 무술로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든 가상 시위대들을 화려하게 진압하는 쇼를 선보였다. 간첩 잡는다고 수 만의 젊은이들을 돌려쓰고서,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인 집위·시위를 막는다고 시위인원의 1.3배 되는 경찰력을 남용해 놓고서는, 이제 그거 좀 줄이려고 하니까 너무 아쉬운 나머지 테러진압 흉내까지 내고 있다.물론 인권단체들은 전·의경제 폐지를 요구하며 그 대안으로 보다 전문적인 경찰력 확충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실제 시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차분하게 적법한 절차를 지켜나가고 최대한 인권침해를 줄이는 훈련을 받은 경찰력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비폭력을 외치는 지금, 여전히도 물리력으로 이들을 누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비무장한 시민들을 향해 공중 이단 옆차기를 할 수 있는 전문요원이 필요한 것은 무엇을 지키기 위함인가. 부조리한 것이 너무 오래 함께 있었기에 우리 역시 그 부조리에 익숙해졌다. 큰 고민 없이 젊은이들은 의경에 지원했고, 전경으로 착출되면 그냥 재수 없다 생각했다. 시위에서 전·의경을 만나며 ‘니네도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하는거지’라는 말을 내뱉었고, 거리를 가득 채운 전·의경들의 모습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군대와 민간인이 이렇게 대립하는 비극적인 상황을 인식한다면, 그 속에서 친구와 이웃을 향해 방패를 잡고 있는 자신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젊은이들의 양심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이제는 폐지해야 할 때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