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G_0### |
소년은 마돈나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서랍은 아기자기한 장신구와 형형색색의 화장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곧 그의 꿈이기도 했다. 여자가 되는 것, 그것은 동구의 오랜 소망이었다. 는 더없이 착한 영화다. 감독은 트랜스 젠더가 겪을 수밖에 없는 험난한 현실을 일일이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조명할 뿐이다. 여자가 되면 뭘 하고 싶냐는 친구의 질문에 동구는 명료하게 답한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 이 말은 우리에게 일련의 당혹감을 안겨준다. ‘살고 싶다’는 말은 너무도 원초적인 까닭에 욕망의 대상으로 쉽사리 인지하기 힘들다. 오히려 ‘잘’이라는 부사를 앞에 붙이고 나서야 비로소 익숙한 느낌에 안도감이 느껴진다.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운동의 캐치프레이즈는 오늘날까지도 모든 담론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살고 싶다는 소망은 너무도 당연하다. 문제는 ‘잘’이라는 단어가 주는 터무니없는 무게감이다. ‘잘’이라는 단어는 흔히 ‘보다’라는 단어와 조응하여 ‘보다 잘’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리하여 ‘(보다) 잘 살고 싶다’는 말은 반드시 비교 대상을 전제하게 된다. 누군가보다 열등해지지 않기 위해, 누군가보다 더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쫓기듯 ‘잘’ 위에 더욱 크고 선명한 방점을 찍는다. 그 가운데 ‘살고 싶다’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만다. 누구도 삶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동구의 소망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너무 많은 동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들이 몇몇 이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의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한다. 생존의 기로에 서있는 이들에게 ‘잘’이라는 부사는 지나친 사치다. 그들은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냥 ‘살고 싶다’고 말할 뿐이다. 버마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도시 외곽에서 빈곤과 싸우는,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세상의 벽 앞에서 좌절하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 적어도 ‘살고 싶다’는 그들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더 많은 동구들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