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의 언론들은 10년간 무엇을 했나? 97학번인 내가 알 리가 없다. 결국 주워들은 이야기로 따라간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선배들의 이야기는 선배들의 이야기일 뿐이니 내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래도 한 번 관심을 가지고 한 두 달 걸쳐 예전 책자와 문건들을 뒤져본 일이 있었다. 93, 94년 경은 참으로 재미있는 시기였다. 매체운동에 있어서도 말이다. – 실패한 대학의 문예부흥(르네상스)랄까? 한참동안 학우들의 생활 속에 녹아드는 학생회 이야기가 나왔고, 문화운동이 한 켠에서 벌어지며 문화학회들이 과 학생회 속에 하나씩 생겨났다. 언론은? 언론도 예전과는 다른 소재들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록음악이라든가, 페미니즘이라든가. 단순한 생활 속의 이야기를 꺼내도 점점 괜찮게 되었다. 모 연애인이 예쁘다든가. 격변기였다. 그러나 전환기는 아니었다. 이후 관악 언론들의 행보는 사실 솔직히 말하면 시원찮은 것이었다. 대학에서 90년대 내내 앞서나갔다고 할 만한 흐름은 거의 없고 언론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포함된다. 대놓고 자본주의적인 여러 물결 속에 대학의 자치단위들은 대응하는 구호를 내놓는데 급급했다. (좀 더 학술적이라는 인간들은 ‘테제’라는 것을 내놓았지만 쓸모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언론은, 회의하거나 구호를 함께 외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양쪽 다 대부분의 학내 대중에게는 매력이 없었다. 학생운동이 권위와 함께 매력을 잃자 언론도 비슷한 운명을 걸었다. 사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뭔가 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나는 대학 내의 공론장이 하나둘씩 꺼져갔어도 언론은 계속 자신의 지면 안에 갇혀 있었다는 혐의를 둔다.90년대 내내 관악의 언론들이 학생운동의 기관지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변화할 수 없었을 뿐이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자신의 전통에 안주하여 변화하고 싶어하지 않았노라고. 90년대 후반에는 그토록 치열했던 언론의 자기비판조차 사라진다. 나중에 학생운동 기관지 역할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생기는데, 그것은 언론들이 선택해서 그랬다기 보다는 계속되는 방향성의 상실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좀 더 자유로운 소재를 선택한다. 예전에는 방향성이 강하게 굳어진 것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과연 방향성이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그러나 비슷한 경향은 계속된 것이 아닐까. 저학번은 고학번이 했던 일을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고학번은 용기를 잃는다. 역량은 소실되고 의지조차 희박해지는 현상을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언론. 관악의 언론은 이제 무엇일까? 나도 모르겠다. ‘서울대 저널’은 무엇이며 무엇을 해 왔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서울대 저널’의 현재 위치는 매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지와 대학신문 등과는 다른 수요를,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는 종이매체로서 거의 유일한 언론이라고 할 만하다. 내용의 측면에서, 대중성과 의식성 사이의 교량을 놓으려는 시도가 돋보이기도 한다. 서울대저널의 시도는 끊임없는 다리놓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 저널은 좋은 언론이다. 그러나 특출난 언론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부족하다고 하겠다. 부족한 것은 스타일과 색깔이 아닐까? 사람들의 눈을 붙들어두면서 ‘이것은 서울대 저널 다운 것’이라고 느끼게 할 만한 것 말이다. 서울대 저널이 ‘우경화’라는 개념으로 비판받은 일이 있는데, 나는 이 잡지가 우경화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경화라는 개념은 ‘오버’라고 생각한다) 다만 종종 서울대 저널의 대중과 정치 사이의 절충주의가 그 절충적 방법론 때문에 무채색으로 보일 때가 있다. 내 생각에, 우경적인 내용이든, 좌파적인 내용이든, 개량적인 내용이든, 혹은 절충주의적인 내용이라도, 강하게 발언되어야 멀리까지 들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 자체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매력적인 것으로 말이다. 또 하나는 내용에 대한 것이다. 지금의 내용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서울대 저널의 고유한 문제제기이며, 그들이 집착하는 내용이고, 그들이 이루어놓은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 서울대 저널의 편집실은 무엇에 집착하고 무엇을 하려 하는지. 그것이 보다 잘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많은 언론이 방향성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2000년대식의 대중에 대한 말걸기’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내용으로? 솔직히 말해서 종종 서울대 저널의 글 속에서 필자들의 자신없음을 느낀다. 무리없는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지으려는 감성이 글 속에 도사리고 있을 때가 있다. ‘서울대 저널’의 이전 이름인 ‘우리세대’라는 이름에 대해서 한 선배와 이야기한 바 있다. 그 선배는 잘된 작명이라고 평가했다. 당시에 잡지가 창간될 때 그 주요학번의 고민은 “과연 우리의 세대는 어떤 세대인가?”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잡지는 고민 속에서 창간되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아간다. 그렇다면 지금 ‘서울대 저널’의 정체성과 내용은 무엇인가? 막연한 이념적 스펙트럼 속에 편리하게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은 대중적이지도 않고 재미도 없으니. 관악의 언론은 ‘선언’을 잃어버렸다. 그 이전에 선언이 난무했다면, 지금 우리는 아무 것도 소리높여 주장하지 않는다. 말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말 하는 방법을 새로 배우고 구축해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진통이다. 대학 바깥의 대중지의 말하기 방식과 대학에서의 말하기 방식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을 느껴가면서 우리는 말한다. 할 말이 있다면 어떤 형식으로든, 가장 잘 들리는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누군가가 말하면, 벙어리였던 누군가가 또 자신의 언어를 획득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게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이 언론활동의 시작이 아닐까? 형식을 고민하고 내용을 고민하고, 매너리즘을 배격하자. 선배들이 80년대와 90년대의 갈등 속에서 겪었을 엄청난 진통이 단지 나에게 하나의 흥미거리로 읽혔듯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진통은 나중에는 흥미거리조차 못 될지 모른다. 하지만 고민없는 언론처럼 사악한 것도 없다. ‘서울대 저널’의 고민이, 관악을 진동시킬 수 있도록, 그리고 소리가 소리를 부를 수 있도록. 관악언론의 르네상스, 르네상스, 르네상스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