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짐의 무서움

대학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의 이야기’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그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관련 홈페이지에 들어가 서명도 해보고, 사진으로 익숙해진 그를 학교에서 직접 만날 때면 망설임 없이 인사하곤 했다.언젠가 생긴 본부 앞 그 조그만 곳을 지날 때면 가슴이 콩닥거렸고, 그와 관련된 기사를 볼 때면 눈이 동그래졌다.그랬다.그때는.6년 전 처음 그의 이야기가 학교 안에 점점 퍼지자, 사람들은 꿈틀대기 시작했다.

대학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의 이야기’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그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관련 홈페이지에 들어가 서명도 해보고, 사진으로 익숙해진 그를 학교에서 직접 만날 때면 망설임 없이 인사하곤 했다. 언젠가 생긴 본부 앞 그 조그만 곳을 지날 때면 가슴이 콩닥거렸고, 그와 관련된 기사를 볼 때면 눈이 동그래졌다. 그랬다. 그때는. 6년 전 처음 그의 이야기가 학교 안에 점점 퍼지자, 사람들은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름 익숙한 교수들이 모여 대책위를 꾸렸고, 그와 관련된 대책 홈페이지가 문을 열었다. 대책위 교수들로 구성된 그의 복직을 위한 릴레이 연대 강좌가 열렸고, 우리학교는 물론 외부 교수들의 서명도 쌓여갔다. 학생들 차원의 대책위도 꾸려졌다. 그랬다. 그때는. 6년. 김민수 교수가 재임용 탈락됐을 때 새내기였을 학생들이 졸업하고도 한두 해가 더 지났다. 한 달여 남은 올해를 넘기면 그의 이야기는 이제 7년째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대책위 교수들의 활동은 이제 사그라들었고, 홈페이지의 업데이트 속도도 느려졌다. 본부 앞에 430여일 계속 서있는 그 천막도, 이제 학생들 눈에 익숙해진 그림이 돼버렸다. 총학생회 선거 때도 학생들의 복지를 위한 그 수많은 아름다운 공약들 사이에서, 학문의 자율화를 외치는 그에 대한 목소리는 한번의 일부 선본 공동 결의문으로 대체됐다. 익숙해짐의 무서움. 익숙해짐이 낳은 무관심의 잔인함. 그 속에서 그의 이야기를, 그저 학문의 자율성과 교수들의 경직성을 알리기 위한 새내기 새터 자료집 소재 정도로 굳히기엔 그의 싸움이 너무나도 현재진행형이다. 또 그의 이야기를, 소위 대학사회의 진보를 향한 몸부림이‘었’다고 화석화시키기엔 천막 안에서의 그의 몇 백일이 너무나 시리게 현재와 이어져있다. 그의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지금이다. 그는 지금이다. 지난 4월 대법원이 ‘재임용 탈락은 행정소송의 대상이 안 된다’는 기존의 판례를 뒤엎고 그의 이야기를 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 승소는 겨우 재임용을 ‘기대’할 수 있는, 본부에 대해 대항할 ‘권리’를 준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6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야기는 원점이다. 많은 새내기들이 새터 교양 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학생들이 본부 앞을 지나면서 천막농성을 바라봤지만 결국 그는 원점인 것이다. 익숙해짐은 무섭다. 특히 연구 활동을 계속해야하는 한 학자의 몸인 그에게, 거대한 서울대의 오만을 남아있는 내, 외부의 지지 시선과 대책위 학생들의 손을 잡고 맞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익숙해짐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오는 11월 26일 ‘그의 이야기’에 대한 재판이 서울고등법원에서 다시 열린다. 익숙해지지 말자. 지금 싸우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화석으로 굳히지 말자. 그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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