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좀 늦었죠?” 성큼성큼 걸어온 권해효는 이제 막 브라운관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의 간섭쟁이 건축가, 의 까칠한 주방장, 그리고 최근 방영중인 에서의 괄괄한 모습까지. 권해효가 맡아온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그의 표정 속에 숨쉬고 있었다. 그러나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그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들은 낱낱이 벗겨지고 담백한 알맹이만 남았다. 권해효는 그저 권해효였다. 배우 권해효, 연기 속에서 ‘점프’를 꾀하다배우의 길을 택한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누구나 한 번쯤은 배우에 대한 꿈을 꾸지 않나요?”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고등학교 시절 문예부에서 형성된 문학에의 애정과 맞물려 연기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됐다는 것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권해효는 첫 번째 연기수업에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연기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생생히 드러내는 장면을 보고 이제껏 몰랐던 세상에 대해 ‘눈을 뜬’ 느낌이었다. 그리고 제대 후부터 본격적으로 연기에 뛰어들었다. 운이 좋아 학전 소극장의 김민기 대표의 초청으로 한 달여간 학전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 때 함께 활동하던 박광정, 유오성 등과는 지금도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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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권해효가 생각하는 연기란 어떤 것일까. “우리가 하는 연기가 현실의 단순한 재현이라면 가치도, 재미도 없겠죠. 배우가 할 수 있는 영역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작가와 시대, 인물들을 상상력을 통해 다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뻔한 현실을 뛰어넘은 ‘점프’죠. 그래서 저는 제가 제일 많이 점프할 수 있을 때 신나요. 방송보다는 연극에서 더 그렇죠.” 그래서인지 그는 영화, TV 출연으로 바쁜 일정 중에도 꾸준히 대학로 무대를 찾는다. “대한민국은 드라마 왕국입니다. 1주일에 70분짜리 드라마를 두 개씩 찍어내는 환경 속에서는 과거에 만든 걸 재탕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요. 하지만 연극은 무대마다 새롭게 창조되죠.” 역할이 아니라 등급으로 배우를 판단하는 것이 문제권해효를 수식하는 수많은 표현 중 하나, ‘감초 연기의 달인’. 대중들의 뇌리 속에 남아있는 권해효는 능청스럽고 맛깔나는 연기로 극의 재미를 더해주는 ‘감초’ 조연이다. “소위 ‘주연’에 대한 갈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관점 안에는 몇 가지 치명적인 편견이 숨겨져 있어요. 흔히 주연이라면 미니시리즈나 주말극만 생각하잖아요. 그 기준에서 벗어나서 보면 저는 수많은 단막극과 특집극의 주인공이었어요. 하지만 이걸 주연으로 평가하지는 않죠.” 나아가 그는 주연, 조연을 ‘등급’으로 분류하는 분위기에 일침을 놓는다. “실질적으로 제일 피해를 보는 건 관객인데 말이죠. 사실 모든 배우는 모든 역할을 다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에서 송강호 씨가 했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죠. 역할 비중에 상관없이 배우가 굉장히 빛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러나 배우의 등급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주연급 배우는 다시 조연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제 우리는 작은 건달로 출현하는 송강호의 모습을 보기 힘들죠.” 맡은 역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급을 따지는 것, 그는 그것이 영화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문제라고 말한다. 배우가 맡은 역할에 충실해지는 방법은 연기를 열심히, 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권해효가 생각하는 최고의 배우는 바로 ‘연기 잘 하는 배우’이다. 그런데 어떻게 연기를 해야 ‘잘’ 하는 것일까. 그는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나의 무대를 위해 연출자와 배우, 배우와 배우, 관객과 배우가 소통해야 하죠. 배우는 폼 잡는 일이 아니라 소통하는 일이기 때문에, 소통하는 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대 위에서 사회 속으로, 소통은 계속된다 권해효는 사회 속에서도 소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안티 조선 운동, 호주제 폐지 운동, 에다가와 조선학교 돕기 콘서트, KTX 해직 여승무원 집회, 평택 범국민대회 등 ‘걸출한’ 행사에서는 그의 얼굴이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배우’ 권해효는 때때로 ‘집회 전문 사회자’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세간의 평가에 손사래를 친다. “사회는 최광기 씨 같은 분이 잘 보는 거고. 저는 그 옆에 서 있는 사람 정도죠.(웃음) 여전히 집회는 저에게 어색한 장소예요.” 권해효가 사회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으로서의 정서적인 ‘빚’ 때문이었다. “사실 대학 다닐 때에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편은 아니었어요. 변명일지 모르겠지만 대학 다닐 때에는 학과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대학 졸업 후,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연기자로 인식되면서 작은 제안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 시초가 된 것이 199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에서 열린 ‘청소년 열린 학교’였다.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청소년 캠프를 차렸는데, 연극반에 일일교사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 즈음에 변영주 감독의 제안으로 명동성당 앞에서 매년 열리는 양심수 석방을 위한 일일감옥 체험에도 참여하게 됐다. “참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그 더운 여름에 0.7평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 간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얼차려도 주고. 끌려 나와서 쪼그려뛰기를 하고 있는데 민주화를 위한 가족 협의회 어머니들이 달려들어서 ‘내새끼 괴롭히지 마라’하고 간수들을 때리며 우시더라구요. 일종의 퍼포먼스라면 퍼포먼스겠지만 어머니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게 단순히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란 생각을 했어요. 그 묘했던 느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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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느낌’이 이후 그의 행동을 이끌었다. 안티 조선 영화제에서 영화인 대표로 선언문을 읽기도 하고, 많은 시민단체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최근에는 퇴직기자들이 새로 만든 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름만 올리는 것이 부끄러운 것 같아 혼자 독립군처럼 전국 대학들을 돌며 강연도 했다. “조선일보 바로보기, 또는 대학생들의 참여, 투표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강연을 했었죠. 그런데 요즘 대학가에서는 500명 모으기도 힘들더라구요. 자본이 최고의 가치인 양 숭배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최소한 학교에서만큼은 돈보다 가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연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까워요.” 비판의 말을 던지기는 쉽다. 하지만 그는 한 명의 생각이라도 바꿔보기 위해 행동하는 쪽을 택했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부모로서의 책임감도 더해졌어요. 우리 아이를 이 사회에서 어떻게 키울까, 답답했어요.” 그래서 참여한 것이 바로 호주제 폐지운동이다. “4년 동안 호주제 폐지 운동을 했는데, 2008년부터 호주제 대신 개인별 신분등록제가 만들어지게 됐습니다. 호주 기재가 사라진 딸아이의 신분증명서를 보면 정말 뿌듯할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오지랖 넓게 여기저기 얼굴을 내미는 권해효지만, 모든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이다. “약간의 이견이 있는 거죠. 스크린쿼터가 문화 다양성 측면에서 중요하지만, 몇 가지 추가적인 질문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영화가 문화적으로 사회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부정적으로 생각해요. 또 제작, 배급, 상영을 일괄적으로 담당하며 영화산업을 독과점하는 몇몇 거대기업들은 영화인이 아닌가. 과연 대한민국 영화인임을 자부하는 이들 기업들이 우리 극장에서만큼은 스크린쿼터를 지키겠다는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나. 그리고 배우들은 이들 영화권력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못하고, 왜 정부 탓만 하나. 스크린쿼터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런 공적 책임을 묻는 질문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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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주장을 뚜렷하게 말하는 권해효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나 배우로서 사회운동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지는 않을까. “부담감, 많죠. 그런데 흔히들 생각하시는 그런 부담감이 아니라 제 자신이 언제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참여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부담감이에요. 책임감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네요. 배우인 제가 활동가분들께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그 분들이 하는 일들을 홍보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자로서의 가치를 더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하죠. 가끔은 내가 왜 더 유명하지 못할까, 아쉬움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아쉬움으로 끝내야죠. 그래도 역시 중요한 건 진정성 아닐까요.” “한 2년 쯤은 미친듯이 놀아보세요”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한 마디를 부탁했다.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10년 전인가, 서울대 출신 친구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어요. 자기들은 서울대에 입학하는 순간 사회와 민족에 대해 묘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지금 무슨 소리하냐’ 웃어 넘겼는데 스무살 때 그런 대단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입학하자마자 토익을 공부하고, 취업을 걱정하는 현실에서 너무 거창한 요구가 아닐까 하지만, 이제는 정말 그런 고민을 해봐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좀 재미있게 노세요. 4년 내내 놀기는 힘들고, 한 2년 정도는 미친듯이 놀아봤으면 좋겠어요. 놀 땐 서로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같이’ 놀까 고민하지 않습니까. 그럼 자기뿐만 아니라 옆 사람도 좀 보일 테고.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쟤 뭐야, 짱나’ 이런 거 말구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