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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 소개할 인물인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4)은 알제리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프랑스 정신과 의사이다. 그는 식민지 아프리카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했던 혁명가이자, 피식민지인에 대한 식민지배자들의 폭력에 대해서 사유했던 사상가였다. 그리고 그는 인종주의의 벽을 넘어서 모든 인종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던 사람이다. 그의 삶과 사상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하얀 가면’의 허위에 대해 생각해보자. 청년 파농, 인종차별의 벽을 경험하다 파농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르티니크 섬의 포르 드 프랑스에서 출생해서 성장한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프란츠 파농은 안정적인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프랑스의 로베르 제독이 1만명의 해군을 이끌고 마르티니크 섬으로 들어오면서 파농은 삶의 첫 파란을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 백인 병사들로부터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인종차별을 경험해야했기 때문이다. 결국 파농이 도미니크 섬으로 군사훈련을 받는 동안 마르티니크 섬에서는 로베르 제독에 대항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 봉기를 통해서 결국 로베르 제독은 섬을 떠나게 된다. 그 후 투르테 대령은 마르티니크와 구아들루프와 기아나의 병사들과 자유프랑스군 의용군들을 ‘제5대대’라는 이름으로 결집시킨다. 파농은 도미니크에서 돌아와 그 부대에 참여한다. 파농이 다니던 고등학교의 한 교사가 이 전쟁(2차 세계대전)은 마르티니크 사람의 전쟁이 아니라면서, “백인들끼리 서로 총질을 하는 것이니까 흑인들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농은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소신대로 전쟁에 참여한다. 하지만 전쟁에 참여하는 중에도 파농은 흑인 병사들에 대한 차별을 계속해서 경험한다. 그리하여 파농은 일련의 괴리, 즉 이상과 일상적인 현실 사이의 괴리, 어디에서나 똑같아야 할 인간의 존엄성과 일상 속에 배인 분리나 인종차별 사이의 괴리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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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포르 드 프랑스로 돌아와 쇨쇠르 리세에서 바칼로레아 과정을 수료한 파농은 프랑스 리용에 가서 의과대학에 등록한다. 파농은 프랑스의 정신과 병원을 돌며 인턴으로 일하면서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초기 저작중의 하나인「북아프리카 증후군」을 서술하게 된다. 이 글을 통해 파농은 고통을 가지고 찾아온 북아프리카 출신 환자에 대한 프랑스 의료집단의 인종차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규명하고 있다. 생탈리 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마치고 리용대학으로 돌아온 파농은 자신의 지도교수에게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한다. 그 논문은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큰 소동을 빚게 된다. 결국 지도교수는 파농의 논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파농도 좀 더 학술적인 주제를 다룬 논문을 다시 제출하게 된다. 바로 그 논문의 초안이 파농의 유명한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Peau Noire, Masques Blancs』의 원고였던 것이다. 이듬해 1952년에 파농은 프란시스 장송의 도움으로 책을 출간하게 된다. 원래 「흑인 소외에 관한 시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려던 것을 장송의 의견을 따라서‘검은 피부, 하얀 가면’으로 바꾸게 된다. 파농이 이 책을 쓰는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다음 3가지로 보인다. 1)정신의학과의 만남 – 억압된 주체의 해방 2)현상학, 실존주의 및 정신분석학과의 만남 – 파농의 사상적 도구 3)군대와 리용에서의 소수집단으로의 경험 – 파농의 사성을 뒷받침하는 실질적 경험 정신과 의사로서의 프란츠 파농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좌파 경향을 뚜렷이 드러내던 정신과 의사들을 중심으로 환자를 소외로부터 해방시키는 치료요법이 개발되고 있었다. 이 치료법에 있어서 정신병자는 단순히 관찰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의사는 환자와 굳게 결속하여 자유를 향해 투쟁을 함께 벌이는 사람,‘타자와 그의 고통을 향해 언제나 자기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파농은 바로 그런 치료방법을 배우고, 그런 정신을 지닌 채 알제리로 떠나게 된다. 알제리의 블리다 주앵빌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파농은 자신의 이러한 치료법을 그대로 적용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는 먼저 유럽계 백인 여성 환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사회요법을 실시했고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이 방식을 그대로 무슬림 남자 환자에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파농은 문제에 부딪친다. 동료 의사들과 주변 사람들은 무슬림이 생물학적으로 무능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파농의 사회요법이 무슬림들에게 적용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며, 파농을 풋내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파농은 서양의 모델을 무슬림에 그대로 적용하려했다는 것에서 문제의 핵심을 발견한다. 나아가 식민지 동화정책이 식민지의 문화를 파괴하고 본국의 문화를 강제로 이식하면서, 하나의 억압과 폭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인식한다. 그는 곧 무슬림의 문화에 맞는 사회요법을 찾아내었고 이를 환자들에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파농은 정신의학에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했고, 정신의학을 인종차별의 벽을 깨는 도구로서 사용하고자 했다. 광기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거기에 혁명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는 광기를 일탈과 소외 그리고 억압된 과거 경험으로 얻어진 무거운 짐으로 보았고, 정신병자를 몹시 가여운 존재로 생각했다. 알제리의 투쟁가, 아프리카의 해방자 1955년에 이르러 파농의 활동은 병원을 넘어서 확장되기 시작한다. 파농은「알제리의 우정」이라는 청년단체를 통해서 알제리 독립 세력과의 관계를 넓혀 나가게 된다. 이 시기에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과도 관계를 맺게 되고, 비밀리에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병사들을 돌보게 된다. FLN에 대한 프랑스의 탄압이 심화되면서 파농은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곧 알제리에서 추방된다. 파리에 잠시 체류한 뒤 튀니지의 튀니스로 가서 FLN에 보다 직접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그곳에서 파농은 국가주의에 포위당한 채 알제리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이의제기를 하지 못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을 비판한다. 또한 독립 이후의 미래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민족주의 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비판을 가한다. 파농은 독립 이후의 알제리가 모든 인종의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농은 끊임없이 후기 식민주의에 대해서 경계하였고, 아프리카의 진정한 독립과 혁명을 주장하였다. 60년대에 접어들면서 피식민 국가들이 본국과 독자적인 타협을 진행하면서 후기 식민주의의 수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협을 통해서 독립을 획득한 국가에서는 식민지배의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었고, 종족과 종교에 따른 분열과 권력투쟁, 부정부패 등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많이 나타났던 것이다. 파농 자신은 마오주의자나 맑시스트가 전혀 아니었지만 독자적인 혁명사상을 통해서 아프리카에서 완전한 식민지 억압의 해체를 위해서는 농민대중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프랑스인으로서 제 2의 조국 알제리의 독립 나아가 아프리카의 해방과 단결을 위해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프란츠 파농은 1961년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게 된다. 골수성 백혈병은 그 당시에는 불치의 병이었다. 그는 생의 마지막 해에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을 저술한다. 그리고 그가 존경했던 지식인 사르트르에게 책의 서문을 부탁한다. 그리고 결국 그 해 12월 치료 차 미국에 가있던 프란츠 파농은 워싱턴 D.C.에서 눈을 감는다. 그의 시신은 그의 소원대로 알제리 땅에 매장된다. 하얀 가면을 벗자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만연해있다. 그중에서도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폭력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있다. 우리 경제는 그들의 노동 위에 세워졌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이른바 ‘불법인간’ 취급을 받으며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다. 지난 1월 ‘노말 헥산’에 노출된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반신 마비증상으로 병원에 집단으로 입원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 사회 내에 만연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이 만천하에 들어나게 되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을 반성하고 피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가진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핍박은 멈추지 않고 있다. 식민주의의 몰락에 따라 파농의 삶과 사상은 잊혀져갔고, 오늘날 파농은 그리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파농 시대의 폭력은 식민지를 벗어나 우리 사회 내부로 옮겨왔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사회에 ‘내적 식민지’를 구축하였다.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태도가 존재하는 한 파농의 사상과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유효하다.
프란츠 파농의 목소리 “나는 내 과거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내 과거를 증거해 보일 뿐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던 프란츠 파농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침해되는 상황이면, 피부색이 희든 검든 노랗든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 위협받고 있다면, 저는 언제라도 참여하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백인들의 전쟁이니 오히려 흑인들에게는 잘된 일이라는 고등학교 선생님의 말에 반박하며 “한 언어를 말하는 것은 한 세계와 그 문화를 수용하는 것이다. 백인이 되고 싶어 하는 앤틸리스 사람은 언어라는 문화적 도구를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더욱 쉽게 자신을 백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지배언어에 대한 종속을 지적하면서 “그들은 독립될 알제리에서 권력을 잡고 싶어 한다. 하지만 권력을 잡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들 자신도 권력 장악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 혁명지도부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 비판하며 ‘동지들이여! 유럽을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해 새로운 피부를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사상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인간을 우뚝 세워야 한다.’ -그의 책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끝맺음에서 |
| 파농에 관한 책 알리스 셰르키 지음/ 이세욱 옮김 페트릭 엘렌 지음/ 곽명단 옮김 파농의 저서 古김남주 시인이 파농의 을 완역한 책이다. 원래는‘알제리 혁명 기원 5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라는 제목으로 초판이 나왔다 |